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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85화 (85/113)

85화

기태연의 비늘에는 특수한 능력이 있다.

원작에서 그 사실이 밝혀진 건 국장이 죽고 난 뒤, 정이흔과 본격적으로 맞부딪히면서부터다.

거의 궤멸하다시피 한 위기관리실 직원을 보호하기 위해 그가 직접 나누어 주었으니까.

뭐랬더라, 그래.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체력과 순발력이 향상되고.”

콰아앙——!

튀어 오르는 돌조각. 피어오르는 먼지. 살갗을 저미는 살기를 피해 뛰어오르며, 한차수는 손바닥을 폈다.

조개껍질처럼 반짝이는 비늘이 보였다.

“물고 있으면….”

방어력을 올려 준다고 했었나. 한차수는 웃으며 비늘을 덥석 물었다.

후우욱!

뜨거운 기운이 바닥에서부터 솟구치는 듯한 느낌이었다.

훈훈하게 몸을 감싸는 열기를 느끼며 한차수는 비늘을 뺨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생각만큼 역겹지는 않군.’

단단한 돌조각을 물고 있는 기분이었다.

원작에서는 비늘을 받은 이들마다 헛구역질을 하길래 조금 걱정했는데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쿠웅.

콰아아앙!

“!”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리는 바위 조각에 한차수는 재빨리 몸을 빼냈다.

툭, 툭.

겨우 두 번 바닥을 박찼을 뿐인데 순식간에 거리가 멀어졌다. 비늘의 효력은 확실했다.

“싸울 만하겠는데….”

한차수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하지만 곧이어 귀찮은 족쇄가 떠올랐다.

위장 신분의 페널티 말이다.

“쯧.”

한차수는 아쉬움에 혀를 찼다.

‘그래, 기태연도 버티라고 했지 해치우라고 하지는 않았으니까.’

게다가 비늘의 효과는 영구적이지 않았다.

체력과 속도. 그리고 방어력를 비약적으로 상승시키는 대신 지속 시간이 짧았다.

그래도 그게 어딘가.

한차수는 자욱한 먼지 사이에 몸을 숨긴 채 신상을 지켜보았다. 신상이 벽을 마구잡이로 부숴 준 덕에 공간이 넓어져 몸을 숨기기가 수월해졌다.

아아아아아아악——!

기태연에게 한 방 먹어서 그런가. 광기에 가득 차 보였던 이전과 달리 신상은 어딘가 간절해 보였다.

실수로 잡히기라도 하면 뼈째 씹어 먹힐 듯한 분위기라고 할까.

‘음… 역시 사리는 편이 좋겠어.’

버티라고 했으니 이쪽으로 올 자신이 있는 거겠지. 한차수는 기태연을 일단 믿어 보기로 했다.

그래 봬도 맡은 일에 있어선 제법 성실한 공무원 아닌가. 게다가 동해 용왕의 화신씩이나 되시는 분이니 뱉은 말은 지키겠지.

단단한 비늘을 입 안에서 굴리며, 한차수는 자세를 낮췄다.

쿠웅, 쿵. 쿵——!

신상은 두 팔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점점 거리를 좁혀 왔다. 그것의 발아래로는 진득한 검은 물 같은 게 점점이 남았다.

치이익—

‘산성 용액인가.’

검은 물이 닿은 곳마다 바닥이 푹 파였다. 한차수는 포션을 준비했다.

이제 남은 거리는 약 5미터.

뒤로는 더 이상 물러설 공간이 없었다.

‘벽이 무너질 때를 노려서 빈틈을 파고들어야겠군.’

신상의 공격 하나하나는 막강했지만 정확도가 떨어졌다. 아무래도 기태연에게 적잖이 당한 여파인 듯싶었다.

‘다리 사이로 뛰어들면 얼추 될 것 같기도 하고.’

한차수는 커다란 돌덩이 뒤에 몸을 숨겼다. 신상이 또 한 번 벽을 내리치기를 기다리면서.

그 순간이었다.

[오데르….]

이렇게 될 줄 알았다는 듯, 체념 어린 목소리가 울려 퍼진 건.

‘이런 미친.’

한차수는 이를 악물며 눈을 흘겼다.

자신과 신상 사이. 팔이 닿지 않을 곳에 브로치가 떨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 위로 아른거리는 희미한 인형은 무척이나 애달픈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 꼴이 무엇이냐, 오데르….]

환장하겠네.

공작은 연인의 꼴에 적잖은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흐릿한 형체가 사라졌다 다시 나타나길 반복했다.

‘제발 그대로 사라져라.’

한차수는 바위 뒤에서 기도했다. 저 빌어먹게 낭만적인 유령이 제발 브로치 안으로 빨려 들어가기를.

하지만 유령은 없어질 듯 없어지지 않았다. 그의 곧은 시선은 신상에게서 떨어지지 않았다.

쿠웅, 쿵—!

그러는 동안 신상은 착실하게 발을 옮기고 있었다.

“하아….”

한숨을 쉰 한차수는 몸을 낮춘 채 팔을 뻗었다. 동시에 동굴의 위치를 파악했다.

브로치를 잡자마자 동굴 속에다 던져 넣을 생각이었다.

유령의 독백대로 신상의 정체가 마도사라면 둘을 마주하게 둘 수는 없으니까.

죽은 연인을 마주한 뒤에 없던 힘도 생기는 건 모든 창작물의 법칙이지 않은가.

‘평범한 인간의 형상이라더니 왜 갑자기 신상으로 나타났는지는 모르겠지만….’

달그락.

‘됐다.’

하지만 연인의 힘은 그의 생각보다 강했다.

손가락 끝에 브로치가 닿음과 동시에.

[■■■….]

알 수 없는 목소리가 뇌리를 강타하고.

“커헉!”

묵직한 힘이 온몸을 짓눌렀다.

허리가 꺾이고 고개가 땅에 처박힐 정도로 끔찍한 압력. 한차수는 척추를 부러트릴 것 같은 힘에 저항하며 겨우 숨을 토해 냈다.

고오오오——

“허억, 헉….”

바닥을 짚어 힘겹게 고개를 들었다. 뿌연 흙먼지가 점점 가라앉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를 굽어살피는 건 붉은 눈을 부릅뜬 거대한 석상.

[■■■…!]

“빌어먹을.”

신상의 발치에서 한차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거대한 수정이 불길한 빛을 흩뿌리고 있었다.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렬한 색채에 깨달았다.

버티기는 고사하고 죽지만 않으면 다행이라고.

***

채라하는 안개가 걷힌 복도를 빠르게 걸으며 생각했다.

떠나라는 사람들을 만류하고 내려오길 잘했다고.

그가 연구동에 도착했을 무렵, 가상 현실 시스템과 관련된 주요 인력을 제외한 직원들은 모두 대피 중이었다. 외부 사람들도 하나둘씩 관리국을 빠져나가고 있었는데.

“이거 안 놔?”

“한차수 씨를 위해서라도 여기서 대기하고 계시는 게 맞습니다, 백담 헌터! S급 힐러가 휘말리면 어떻게 하려고요!”

“그걸 왜 그쪽이 정하는지 모르겠네. 뇌랑 두개골이 분리되고 싶어? 놔! 놓으라고!”

제 동생을 가로채려고 했던 S급 힐러는 끝까지 남으려 들었다.

채라하는 그 모습에 어이가 없으면서도 속이 상해 하마터면 화를 낼 뻔했다.

“왜 기분이 상하셨습니까?”

“아.”

고개를 돌리자 서정민이 곁에 있었다. 채라하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무것도 아니야.”

“하지만.”

“쉿. 조용히 해. 차수를 데려오려면 집중해야 하니까.”

담담하게 말하는 채라하의 오른쪽 눈동자가 일순간 붉게 물들었다. 힘을 과도하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서정민은 그 모습을 보고 입술을 달싹였으나 이내 한숨만 내쉬었다.

말한다고 들을 도련님이 아니었으니까.

때맞춰 저 멀리 관리국 사냥개들이 짖어 대는 소리가 우렁차게 울려 퍼졌다.

“이쪽에 또 한 명 있다! 으악, 촉수! 촉수도 남아 있어!”

“여기는 아무도 없… 어우씨, 천장. 천장에 매달려 있다. 비행 가능한 사람들 이쪽으로 와 줘!”

산 제물을 지키던 촉수와 몬스터들이 모두 퇴치된 상황.

저들은 떼로 몰려다니며 산 제물이 된 멍청한 놈들을 구출하기 바빴다.

방금 전까지 자신을 두고 무기를 겨누던 이들이라고는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혼란스러운 상황을 틈타 행한 약간의 비술과 모놀리스의 기술력. 그리고 서정민이 나서서 자신의 신분을 입증해 준 덕이었다.

그때, 돌연 채라하의 발걸음이 멈췄다.

“여기입니까?”

“그래.”

채라하가 팔을 걷으며 웃었다. 회색 눈동자 위로 음울한 붉은빛이 퍼졌다.

가동실을 둘러싼 결계의 가장자리. 눈에 띄지 않는 위치이나 결계 중 가장 지저분하고 복잡한 술식을 갖춘 곳.

이곳이 ‘중심’이었다.

끼기기기긱!

채라하의 눈을 중심으로 공간이 뒤틀렸다. 비틀리고 충돌하고 얽혀서 조각난 파편이 서로 맞부딪힌다.

카가가각!

피를 토하듯 부스러기를 내뱉는 균열. 억지로 잡아 뜯어 구멍 낸 공간 사이로 채라하는 스스럼없이 손을 넣었다.

그리고 찾는다.

그의 형제를, 피를 나눈 가족을. 하나뿐인 동생을….

덥석.

누군가 그의 손을 잡아 온 건 찰나였다.

“——!”

바로 다음 순간, 곁에서 그를 지켜보던 서정민은 비명을 지를 뻔했다.

“젠장, 당신 누구야?!”

채라하의 손을 잡고 튀어 나온 건 개떼들의 수장.

위기관리실 실장, 기태연이었다.

***

[ 경고! ]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 페널티가 랜덤으로 정해집니다. ]

[ 상태 이상 ‘경련’에 걸렸습니다! ]

“——!”

사지가 뒤틀리고 격통이 관절을 쑤신다. 한차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바위틈에 몸을 비집어 넣었다.

마도사가 소환한 몬스터들과 지리멸렬한 싸움을 이어 나간 지 대략 십여 분.

한차수는 슬슬 결정해야 할 때가 왔다고 느꼈다.

‘기태연은 못 올 거라고 상정해야 해.’

이제 남은 건….

“후우… 하….”

식은땀을 닦는데 시야가 흔들렸다.

[■■■ ■■—!]

뼛속까지 파고들어 심장을 쥐고 흔드는 울림. 뒤이어 날개 파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마도사가 소환한 흡혈박쥐가 틀림없었다.

한차수는 입술을 깨문 채 허벅지 벨트에 찬 포션들을 꺼냈다.

챙강, 챙강, 챙강!

차가운 액체가 거침없이 퍼부어졌다. 포션은 피에 뒤섞여 뺨을 타고 턱 아래로 흘렀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고통에 지금도 시야가 흔들릴 정도니까.

쿠웅, 쿵!

공기에 스며든 살기. 점점 좁혀지는 포위망. 그만큼 따가워지는 살갗.

무너진 바위틈에 몸을 숨긴 채, 한차수는 헛웃음을 삼켰다.

뻥 뚫린 눈구멍 사이로 이글거리는 붉은 빛. 각기 다른 무기를 손에 쥔 검은 기사들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하….”

어쩔 수 없나.

죽으면 위장 신분이고 뭐고 다 쓸모없지.

한차수는 상태창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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