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4화
아쉽게도 한차수는 변태 유령 놈을 베지 못했다. 물리 공격이 전혀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 경고! ]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 페널티가 랜덤으로 정해집니다. ]
[ 상태 이상 ‘각혈’에 걸렸습니다! ]
“쿨럭.”
입 안 가득 찬 피를 뱉어 내는데 귀신이 주둥아리를 놀려 댔다.
[하하, 죽은 이를 어찌 다시 죽이려 드느냐. 꽤나 앙칼진 일격이긴 했지만 이 내게는 역부족이란다.]
‘자신이 죽었다는 건 인지하고 있군.’
평범한 영체 타입의 몬스터는 아닌가. 한차수는 남은 피를 마저 내뱉으며 인상을 구겼다.
불현듯 아파트에서 자신을 농락하고 떠난 귀신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 녀석도 공격이 제대로 먹히지 않았지.’
아무래도 저 변태 유령을 상대하려면 다른 방법이 필요할 것 같았다.
회색 눈동자가 상대를 주의 깊게 관찰했다.
귀신은 자신의 힘을 자랑이라도 하듯 턱을 치켜세우고 있었다. 치렁치렁한 옷에 쓸데없이 과한 장신구가 눈에 띄었다.
[그나저나 몸놀림이 재빠른 걸로 봐서는 남총 행세를 하는 첩자인가 보구나. 하긴 베갯머리송사를 원하는 이는 어디든 있으니.]
파렴치한 언행에 한차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여러모로 평범한 귀신은 아니었다.
한차수는 단검을 역수로 잡은 채 천천히 간격을 쟀다.
[왜 아무 말이 없느냐? 네 주인이….]
귀신이 살짝 고개를 돌린 순간, 한차수는 그대로 몸을 날렸다.
점점 커지는 귀신의 눈동자를 지나치며 한차수는 손을 뻗었다.
‘됐다.’
촤아악!
한차수는 브로치를 움켜쥔 채 자세를 바로잡았다.
‘역시 저쪽도 날 공격하지 못하는 거였군.’
귀신은 감히 그를 가로막을 생각도 하지 못했다.
[…….]
긴장된 분위기 속에 침묵이 감돌았다. 이쪽을 가만히 바라보는 시선에 한차수는 브로치를 매만졌다.
어떻게 할까.
저 이글거리는 눈빛을 보아하니 이쪽이 본체인 건 확실했다. 잠시 고민하던 한차수는 입을 열었다.
“당신, 환각 심장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기마병이 흘린 아이템에서 나온 놈이었다. 지금 이 상황에 대해 알 가능성이 컸다.
[지금 내게 하문하는 것이냐?]
적잖이 곱게 자란 귀신인가 보다. 꼿꼿한 자세와 한껏 치켜올린 턱까지.
자신감을 넘어 오만함이 뿜어져 나오는 태도에 한차수는 한숨을 삼켰다.
“질문을 바꾸지. 아데르잔 마도사에 대해 아는 게 있나?”
심장의 주인인 마도사. 그에 대한 정보를 얻으면 이곳을 탈출할 구체적 방법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귀신은 질문을 무시했다. 거기다 한술 더 떠 도발하듯 귀를 후벼 파기까지 했다.
“허….”
한차수는 헛웃음을 터트렸다. 뭐, 그냥 떠보기 식으로 물어본 거긴 한데….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그래, 아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로 알아듣지.”
[…….]
“그럼 이만. 내가 좀 바빠서.”
한차수는 귀신을 지나쳐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브로치에서 멀어질 수 없는지 귀신도 그를 따라 움직였다.
예상대로였다.
등 뒤에 꽂히는 따가운 시선에 한차수는 피식 웃었다. 귀신 주제에 감정 표현이 다양하단 말이야.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스르륵. 스륵.
거대하고 축축한 무언가가 꿈틀거리는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기다렸다는 듯 발치에 걸리는 돌을 걷어차자 휘릭 하고 촉수가 동굴 밖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추릅.
굉장히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촉수는 돌을 휘감고 사라졌다.
[잠깐.]
귀신이 다급히 그를 불러 세웠다. 고압적인 목소리에 당황스러움이 섞여 들었다.
‘귀신 주제에 촉수는 싫나 보지.’
한차수는 자신을 불러 대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걸음을 옮겼다.
스스슥.
발자국 소리를 들은 촉수가 그를 환영하듯 날렵한 끄트머리를 흔들어 댔다.
등줄기를 타고 오르는 소름을 견디며 한차수는 숨을 골랐다. 그리고 팔에 힘을 주고서 브로치를 던져 넣으려는 순간.
[이만하면 시험을 통과했다고 봐도 되겠군.]
“…….”
[으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이야기를 좀 나누도록 하겠나?]
귀신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딱딱하게 굳은 입매가 제법 볼 만했다.
하지만 그걸로는 부족하지.
“나한테 할 이야기는 없는 줄 알았는데.”
한차수는 브로치를 두어 번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 언제든 동굴 안으로 던질 수 있도록 자세를 잡는 건 덤이었다.
끄응, 앓는 소리를 낸 녀석이 마침내 두 손을 들었다. 그 와중에도 시선은 브로치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아데르잔 마도사란 말이지. 그래. 알고 있네. 알고 있어.]
진작 그랬어야지.
코웃음을 치는 한차수를 바라보며 귀신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대들이 부르는 아데르잔 마도사의 이름은 오르데. 촉망받던 마도사이자 많은 이들의 사랑을 받던 존재였지.]
그리고 날 팔아넘긴 배신자이자, 날 되살리려 한 미친놈이기도 하고.
사내의 입가에 맺힌 미소는 제법 씁쓸했다.
***
파렴치한 영체형 몬스터. 죽기 전 신분으로 말하자면 아데르잔의 공작이었다던 귀신의 말을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왕위 계승권자였던 당신의 형이 보낸 게 오르데라는 자였고, 당신은 그걸 알면서도 그를 연인으로 삼았는데 결국 뒤통수를 맞았다는 겁니까?”
[내 인생이지만 그렇게 들으니 참 기구하게 느껴지는군. 그래, 맞아.]
그건 그냥 조심성이 없는 것 아닌가. 한차수는 희한하다는 눈으로 공작을 바라보았다.
[사랑했으니 어쩔 수 없지 않나.]
공작이 어깨를 으쓱였다. 한차수는 할 말을 잃었다.
의외로 낭만적인 구석이 있는 변태였다. 생각해 보면 배포도 넓은 듯했다. 연인이 그를 배신해 팔아넘긴 걸 탓하는 낌새도 없으니.
다만 마도사의 사랑은 낭만으로 치부할 수 없었다.
공작은 자신이 죽은 뒤에 일어난 일이라 전부 알지는 못한다고 했으나, 대략적인 정보만으로도 충분했다.
아데르잔 마도사는 공작의 사후, 정신을 놓고 그를 되살리려 시도했다.
[반절뿐인 성공이었지만 무슨 이윤지 나는 이 브로치에 의식이 담기게 되었네. 내가 진짜 생전의 공작인지 아니면 그의 미련이 만들어 낸 환상인지는 모르는 일.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고, 생전 내게 충성하던 기사들은 그 비밀을 지키고자 했지.]
그래서 기마병이 브로치를 가지고 있던 거군. 한차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방이 제물을 바치던 제단인가 보군.’
어쩐지 다른 방에 비해 유독 정교하고 사실적으로 느껴진다 했다. 그 공간에 대한 감정과 기억이 그만큼 강했다는 거겠지.
한숨을 내쉰 한차수는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그럼 환각 심장이 가만히 있어도 사람들을 홀려 댔던 것도 다 그것 때문이었겠군요.”
[그래, 마도사의 심장은 본디 마력을 담기 위한 그릇. 하지만 오르데의 경우에는 다르지. 이제 그의 심장에 도사린 건 민초의 생명을 불살라 날 되찾고자 했던 집념과 욕망뿐일 테니까.]
이걸로 확실해졌다.
자신이 갇힌 공간은 마도사의 기억과 욕망이 반영된 세계였던 것이다.
“흐음….”
[눈빛이 예사롭지 않군. 무슨 생각을 하고 있나?]
이 녀석을 인질로 삼으면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릴 수 있지 않을까.
한차수는 그를 바라보며 눈을 빛냈다. 쓸모없다 생각한 유령이 이젠 꽤나 유용한 도구로 보였다.
그때였다.
스스슥. 스슥.
동굴 속에서 또아리 틀고 있던 촉수들이 하나둘씩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
한차수는 곧바로 몸을 피했다. 작게 소리 지른 공작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저 녀석들, 도망치는 것 같은데.]
한차수도 동의했다. 촉수들은 이전과 달리 그에게는 관심 한 톨 주지 않았다.
그것들은 그저 빠르게 통로를 벗어나기 바빴다. 마치 거대한 재앙이 닥칠 거라는 걸 예감이라도 한 듯….
쩌저적.
어둠 속에 균열이 일었다.
틈 사이로 새어 나오는 희미한 빛 사이로 커다란 인영이 보였다. 한차수의 눈이 커졌다.
그림자를 뚫고 나타난 건 그를 쫓아다니던 신상이었다. 그런데 어딘가 달랐다.
‘뭐지?’
신상을 살피던 한차수는 곧 차이점을 깨달았다.
가슴팍 부근이 완전히 박살나 있었다. 어깻죽지에서 가슴뼈 아래까지.
신상은 발톱으로 할퀸 듯 무참한 상처로 너덜거리는 상태였다.
‘기태연인가…!’
신상은 그를 먼저 처리하려 했던 게 틀림없다. 하지만 기태연은 동해 용왕의 수호를 받는 S급 각성자.
‘한 방 크게 먹었나 보군.’
그때, 신상을 바라보는 한차수의 눈에 다채로운 빛이 어렸다. 그건 신상의 가슴팍에서 뿜어져 나오는 빛이었다.
사람으로 따지자면 심장이 있어야 할 자리.
그곳에 있는 건 피가 도는 심장이 아니라 강렬한 색채를 쏘아 내는 수정이었다.
한차수는 단번에 직감했다.
저게 바로 환각 심장이라고.
쿠웅, 쿵——!
점점 거리를 좁히는 신상을 노려보며 한차수는 천천히 심호흡했다.
‘일단 동굴로 갈 수는 없고.’
도주로가 없는 곳에 자진해서 갇힐 수는 없다. 그러면 시선을 돌린 뒤 정면 돌파를 해야….
그때였다.
“한차수!”
쥐어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멀지 않은 곳에 균열이 일렁거리고 있었다.
짐승처럼 가느다란 동공이 그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와 시선을 마주친 한차수의 눈이 커졌다.
“받아. 그리고, 버텨!”
하얀 운무를 구름처럼 휘감은 기태연이 크게 소리치며 무언가를 던졌다.
휙!
손 안으로 빨려 들듯 날아온 건 오색찬란한 비늘이었다. 기태연은 이어 무어라 말하려 했다.
“—!”
안타깝게도 그전에 균열이 닫혀 버렸지만.
쿠웅.
쿵——!
신상이 그를 향해 눈을 빛내며 다가왔다. 한차수는 차게 웃으며 비늘을 꽉 움켜쥐었다.
그는 이 비늘의 용도를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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