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화
원래 세계에도 변이종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저렇게 대놓고 수상한 촉수를 만난 적은 없었다.
[ 경고! ]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 페널티가 랜덤으로 정해집니다. ]
[ 상태 이상 ‘이명’에 걸렸습니다! ]
삐이이이—————!
“허억, 헉…. 콜록!”
거대한 촉수가 꿈틀거리는 동굴에서 겨우 탈출한 한차수는 숨을 몰아쉬었다.
이명이 귓가를 뒤흔드는 와중에도 빠져나왔다는 안도감이 가슴을 적셨다. 그만큼 촉수의 존재감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다.
‘다시는 마주치고 싶지 않군.’
꿈틀거리는 촉수는 눈과 귀가 없는 대신 기척에 민감했다. 숨만 쉬어도 순식간에 발목을 휘감아 대니 스킬을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존재감 희석과 소리 없는 발걸음.
한차수의 원래 직업인 암살자 스킬이 아니었다면 아마 평생 동굴에 갇혀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생각을 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삐이이이———
“윽.”
스킬을 연속해서 쓴 탓에 페널티가 오래갔다.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고, 시야가 일그러졌다. 한차수는 재빨리 준비해 둔 포션을 마셨다.
“후우….”
이제야 좀 살 것 같다.
이마를 훔치는데 손에 식은땀 대신 점액질이 묻어 나왔다. 옅은 분홍색의 끈적거리는 점액이었다. 한차수는 그것을 가만히 바라보다 제 몸을 내려다보았다.
“하…….”
어쩐지 동굴을 벗어났는데도 더럽게 달달한 냄새가 사라지지를 않더니. 한차수는 헛웃음을 토했다.
“빌어먹을, 아주 덧칠을 해 놨네….”
고개 숙인 자세 그대로 점액질이 바닥으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반투명한 액체를 손으로 걷어 내며 한차수는 이를 갈았다.
‘아주 제대로 묻혀 놨군.’
크림도 아니고 구석구석 듬뿍 발라 놨다. 한차수는 한숨을 내쉬며 남은 점액질을 전부 걷어 냈다.
다행히 살갗이 녹아내리거나 뜯긴 곳은 없었다. 하지만 촉수에게 붙들렸던 손목과 허벅지, 그리고 허리가 아직도 시큰거렸다.
“후우….”
겨우 자세를 바로 한 한차수는 깊은 숨을 쉬었다. 공기가 바람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밀폐된 장소는 아니군.’
타다 남은 잿더미 같은 눈이 주위를 훑었다.
빛 한 점 들지 않는 어둑한 공간. 아직 어둠에 익숙해지지 않은 눈으로 알 수 있는 건 얼마 없었다.
바닥이 고르고 높이가 상당하며 폭은 좁다는 것 정도.
“흠….”
한차수는 차분한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일단 기태연과 함께 떨어진 건 아니다.’
기태연은 멀리서도 자신의 기척을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근처에 있다면 진작 찾아오고도 탐았을 터.
‘지금 날 찾아올 수 없는 상황인 것 같군.’
한차수는 턱을 매만졌다. 기태연은 꽤 좋은 동행이었다. 자꾸 달라붙는 게 귀찮긴 했지만 몬스터는 확실히 퇴치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것도 끝이다.
“좋은 건지, 나쁜 건지….”
한차수는 긴장에 굳은 근육을 풀고 허리를 숙였다. 손끝에 거친 질감이 느껴졌다. 한차수는 그대로 손을 튕겼다.
툭.
데구르르.
1미터, 3미터, 5미터. 바닥, 허리, 어깨 높이. 한차수는 여러 가능성을 두고 비슷한 행동을 반복했다.
“함정은 없고.”
손을 탁탁 털자 새하얀 분진이 흩날렸다. 날카로운 철선도 없고, 함정을 작동시키기 위한 기관 장치도 없다.
간단한 함정도 없는 걸 보니 세심하게 만든 공간은 아닌 듯싶었다.
‘그래도 안심하기엔 이르지.’
한차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점액질에 젖어 회복 불가능한 옷자락을 펄럭였다.
도대체 뭐 하는 액체인지 푹 적셔진 옷은 가운데부터 점점 투명하게 변해 갔다.
“벗을 수도 없고.”
방어 스탯이 달린 아이템이라 차마 벗어 던질 수가 없었다.
한숨을 쉰 한차수는 어느 쪽으로 갈까 고민했다. 빛 한 점이라도 보이면 그쪽으로 갈 텐데 말이다.
그때였다.
우우웅——
“음?”
기태연이 준 브로치가 몸을 떨었다. 브로치를 덮고 있던 점액질이 진동에 튕겨 나갔다.
화아악!
별안간 검은 보석 위로 희미한 빛이 연기처럼 피어올랐다.
“…!”
한차수는 재빨리 브로치를 던지며 몸을 뒤로 물렸다.
‘저게 뭐지?’
빛 한 점이라도 달랬더니 브로치가 발광하고 있었다.
후우욱!
발사체처럼 튀어 오른 샛노란 연기는 뭉치고 흩어지길 반복했다. 처음에는 뭉게구름 같더니 이윽고 단단한 형체를 잡고.
[여기는…. 이런, 누가 날 불렀나 했더니. 남총이로군.]
마침내 충격적인 언행을 내뱉는 귀신으로 변모했다.
[흐음, 누군지 몰라도 주인의 취향이 제법 괜찮군. 역시 아예 헐벗은 것보다는 얇은 옷자락만 걸친 게 음심을 동하게 한다니까. 내가 죽지 않았다면 한 번쯤 품었을 만해.]
화려한 옷자락을 팔랑거리며 다가오는 귀신을 보며 한차수는 생각했다.
‘팔다리 하나 정도 날아가도 말하는 데는 문제없겠지.’
기마병이 드랍한 브로치에서 나온 걸 보니 몬스터일 가능성이 높고.
‘일단 시도나 해 보자.’
판단을 마친 한차수는 허리춤의 단검을 뽑아 들었다.
[음?]
브로치에서 튀어나온 변태의 얼굴이 굳었다. 하지만 한차수는 멈추지 않았다.
쌔애액-
새까만 어둠 속, 칼날이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서정민이 힘차게 복도 안으로 뛰어든 이후.
쿠웅, 쿵—!
캬아아아악!
“끝이 안 보이는데? 이 녀석들, 죽이는 대로 재생하고 있어!”
“아아악, 소름 끼쳐! 이 미친놈들은 왜 촉수 주제에 빨판이 있는 거야!”
“말할수록 기분 나쁘니까 입 다물고 죽이기나 해! 증원 도착하려면 한참 멀었다!”
서정민을 포함한 위기관리실 직원들은 힘차게 촉수를 베어 나가기 시작했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다면 촉수의 재생력이 상상을 초월했다는 것.
“안 되겠다. 엄호 서 줘. 뿌리를 찾아야겠어.”
희뿌연 안개 속에서 마스크를 쓴 직원 한 명이 말했다. 위기관리실 직원들이 일제히 그녀를 둘러쌌다.
“3분 이내로 끝내!”
“걱정하지 마.”
지이잉——
하얀 눈동자 위로 붉은 글자가 떠올랐다. 동시에 사방으로 퍼져 나가는 힘의 파도.
“…찾았다.”
“찾았어? 어디야!”
마스크를 쓴 직원이 두 눈을 빛내며 읊조렸다.
“뿌리가 아니야.”
“뭐?”
“제물이야. 누군가 산 제물을 환각 심장에 바쳤어. 그래서 이 사달이 난 거라고.”
“뭐?”
“도대체 어떤 미친놈이…!”
욕설 섞인 경악이 복도를 휩쓸었다.
누군가 가동실에 닿지 못하도록 수작질을 부렸다는 건 인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산 제물을 바쳤다니.
이건 차원이 다른 이야기였다.
환각 심장이 사람들을 홀려 그들의 생기를 빨아먹는 건 모두 알고 있는 사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위험물 취급을 받는 건 아니었다.
심장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들을 환각 속으로 밀어 넣어 잡아먹었다.
심장의 주인인 아데르잔 폐허의 마도사. 그가 꿈꾸는 세계를 완벽히 복원하기 위해서.
그때, 나지막한 목소리가 소란을 꿰뚫었다.
“제물이라니. 그게 무슨 말입니까?”
갑자기 등 뒤에서 들려온 낯선 목소리. 위기관리실 직원은 반사적으로 공격을 가하려다 멈췄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떠올렸기 때문이다.
‘의료 센터 직원… 이름이, 뭐더라. 아 그래, 서정민이었지.’
한차수에 대한 애착이 지나친 직원이었다. 환각 심장의 힘이 폭주하자마자 그들에게 함께 살피러 가자고 말한 걸로도 모자라 이 난리통에 직접 뛰어들기까지 했으니.
하지만 그렇기에 오히려 마음에 들었다. 의료 센터 직원이면서 자신들에 못지않은 힘을 가진 것도 의외였고.
여러모로 도움이 되는 존재였다.
직원은 바닥에 손을 짚은 채 입을 열었다.
“환각 심장은 아무 이유 없이 폭주한 게 아닙니다. 누군가 심장에게 산 제물을 바쳤어요. 이대로 가다간 본래 힘을 전부 되찾을지도 몰라요. 그렇게 되면….”
지이잉—
말을 하는 내내 직원의 눈에서부터 끊임없는 파동이 흘러나왔다.
그녀가 돌연 욕설을 내뱉었다.
“미친, 이거 안보실 새끼들이잖아.”
“뭐?”
결계의 허점을 찾으려다 산제물의 정체를 알아내고 말았다. 직원이 헛웃음을 터트리며 외쳤다.
“산 제물이라는 게 안보실 녀석들이었어.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저기서 시체 꼴이 되어 있다고!”
여기저기서 욕설 어린 외침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그르르…!
거미줄처럼 뻗은 복도 저편. 갑자기 안개 한가운데 시커먼 구멍이 뚫리더니 집채만 한 짐승들이 뛰어오기 시작했다.
“와, 씨. 돌겠네.”
“누군지 몰라도 준비 단단히 했잖아.”
마치 이럴 때를 위해 대비했다는 듯이 등장한 몬스터라니.
결계를 이중으로 친 걸로도 모자라 몬스터 스포어까지 깔아 놨다는 말이 아닌가. 날을 잡고 제대로 준비한 게 틀림없었다.
“슬슬 증원이 올 때가 됐는…데! 큭, 이 새끼들 겁나 무겁네!”
“서정민 씨. 이제 그만 돌아가세요!”
자신을 향해 달려드는 몬스터를 걷어찬 다른 직원이 외쳤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없었다.
설마 격전 중에 몬스터에게 당한 걸까.
다급히 뒤를 돌아본 직원은 당황했다.
“뭐야, 당신 누구야?!”
“기다리던 증원.”
홀연히 나타난 사내의 눈동자는 푸른빛이 도는 회색이었다.
한차수의 것보다 더 짙고 푸르른 회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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