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화
한차수가 환각 심장의 힘에 휘말린 지 대략 삼십여 분이 지난 시점.
“아 미친, 왜 이렇게 넓어! 진짜 더럽게 넓네!”
“이런 데 처바를 돈이 있으면 신입이나 더 뽑을 것이지….”
서정민은 위기관리실 직원을 이끌고 환각 심장이 위치한 가동실이 있는 아래층으로 향하고 있었다.
가는 내내 투덜거리는 게 더럽게 시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기태연을 닮아 성질머리에 있어선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위기관리실 직원들. 그들은 신경질 나도록 깐깐한 연구동의 보안을 뚫는 최고의 창이었다.
지금도 봐라.
“죄송하지만 이 앞은 1급 보안 카드가 없으면 들어가실 수 없으십….”
“너네 방송 못 들었어?”
“예?”
“얼씨구, 진짜 못 들었다고? 그게 자랑이냐 지금? 우리 각성자 관리국의 소중하신 VIP께서 위험에 처했다고 방송을 때렸는데 그걸 개무시하고…!”
“V, VIP라면 가상현실 시스템 때문에 오셨다던 그분 말씀이십니까?”
“그래! 왜, 못 믿겠어? 그럼 내가 직접 개발실 실장한테 전화 걸어서 확인시켜 주지. 통화 걸어 봐.”
“어…. 자,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이번이 벌써 세 번째였다.
상대를 찍어 누르는 데에 있어서는 거의 베테랑이나 다름없는 솜씨.
모놀리스의 이사진 못지않은 행패에 서정민은 감탄했다.
‘이 녀석들이라면 연구동의 비밀 구역도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은데.’
각성자 관리국 설립 초기부터 암암리에 모아 온 온갖 아이템과 괴생물체가 모여 있다는 비밀 구역. 그곳을 턴다면 관리국의 치부를 손에 넣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시간만 좀 더 있었어도.’
이번 임무가 끝나면 관리국을 떠나야 되기 때문에 더욱 아쉬웠다. 연구동 깊숙이까지 올 기회는 더 이상 주어지지 않을 테니까.
하지만 그건 자신의 욕심일 뿐이었다.
서정민은 눈앞의 현실에 집중하기로 했다.
모놀리스의 유일한 후계자이자 그의 상사인 채라하의 동생.
독기를 품고 태어나 단 한순간도 사람다운 일이라고는 해 본 적 없는 빌어먹을 한차수. 아니, 채차수를 위해서 말이다.
솔직히 말해 지금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그 인간쓰레기를 위해 관리국 지하를 뛰어다니고 있다니.
‘그래도 기억을 잃고 난 뒤에는 제법 사람다우니… 본의 아니게 개과천선했다고는 할 수 있겠네.’
채차수와 개과천선이라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다.
서정민이 회한에 사로잡혀 있는 동안 위기관리실 직원들은 착실히 자신의 임무를 수행했다.
“어때, 맞지? 큰일 났다지?”
“…일단 통과는 시켜 드리겠습니다만 그 후에 일어나는 일에 대해서는.”
“어, 우리가 책임질게. 안녕! 서정민 씨, 갑시다!”
“아, 예.”
역시 기태연이 길러 낸 충직한 미치광이들이었다. 일처리 솜씨가 아주 깔끔했다.
쿠우웅—-
육중한 철문이 열리고 드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연구동 지하 H-12구역. 그 광활하다 못해 압도적인 크기에 서정민은 절로 한숨이 나왔다.
“아, 여기도 엘리베이터 없어. 이거 진짜 미친놈들 아냐? 보안하고 엘리베이터하고 무슨 상관인데!”
“투덜거릴 시간 있으면 뛰어라?”
그래도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여기서 한 구역을 더 가서 아래로 내려가면 드디어 목적지가 나온다.
타다닥.
엘리베이터는커녕 무빙워크도 없는 길을 내달릴 때였다. 직원 중 한 명이 곁으로 따라붙었다.
푸른 머리카락을 말총처럼 올려 묶은 직원이었다.
“저기, 서정민 씨라고 했나?”
갑자기 뭘까. 고개를 까딱이자 상대가 씩 웃더니 친근한 척 말을 붙여 왔다.
“궁금한 게 있는데, 실장님이 진짜로 한차수 헌터를 치료하는 게 맞아? 그냥 집적거리려고 매번 찾아가는 게 아니라?”
서정민은 순간 정신이 아찔해졌다. 대꾸할 필요도 없는 헛소리였지만, 이 개소리가 상사의 귓가에 흘러 들어간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반사적으로 떠올린 탓이었다.
“기태연 실장님에게서 이상한 낌새를 느낀 적은 없습니다.”
“그래? 흐음… 근데 왜 매번 집무실을 놔두고 거기서 자고 오는 거지?”
그건 자신도 궁금했다.
서정민은 대충 애매모호한 미소를 지어 주고서 고개를 돌렸다.
혀 차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이쪽은 집 나간 탕아의 안전을 생각하는 데에도 바빴으니까.
품 안에서 진동이 느껴진 건 그때였다.
-계획을 변경한다
발신인 불명의 메시지였다. 하지만 서정민은 알 수 있었다. 이건 채라하가 보낸 메시지였다.
‘계획 변경이라면….’
뒤이어 메시지가 연이어 도착했다.
-더 이상 지켜볼 필요 없어
-안전이 확보되는 대로 무슨 방법을 써서든 데리고 나와
-그게 안 된다면 내가 직접 나선다
서정민이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는 재빨리 안 된다는 메시지를 보냈으나 채라하는 강경했다
-연구동으로 가고 있는 중이야
-이쪽에 합류할 필요 없어
-차수를 당장 데리고 나올 수 있는 게 아니라면 계속 서정민으로서 움직여도 된다
“미치겠네.”
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도착하는 메시지에서 서정민은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채라하는 지금 눈이 뒤집힌 상태였다.
서정민은 재빨리 그를 수행하는 경호원에게 연락을 넣었다.
-안보실 새끼들이 차수 도련님을 두고 죽어도 상관없다고 지껄인 모양이야
미친놈들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딴 말을 지껄인 걸까. 경호원이 보낸 답장에 서정민은 아득함을 느꼈다.
동생을 향한 채라하의 비정상적인 집착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서정민 씨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아요? 토할 것 같아요?”
“…그런 것 같네요.”
원래 그들의 계획은 우연을 가장해 한차수와 안면을 트고 정을 쌓은 뒤 정체를 밝히는 것이었다.
기억이 없는 사람에게 다급히 나타난 친인척이란 그 자체로 의심을 살 수밖에 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채라하는 일부러 동생이 가상현실 시스템에 들어가는 날을 골라 관리국을 방문했다. 본부장이 그에게 자랑해 마지않은 가상현실의 견학을 핑계 삼아 운명적인 첫 만남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데 그게 홀라당 날아가 버렸다.
서정민은 위기관리실 직원들을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연거푸 마른세수를 했다.
‘지금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래, 도련님이 연구동을 뒤집기 전에 한차수를 구출하는 거야. 그게 최선이야.’
훼까닥 돌아 버린 채라하는 누구도 말릴 수 없었다. 심지어 그 이유가 동생의 목숨이 위험해서라면….
‘연구동이 통째로 무너질지도 몰라.’
절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되면 각성자 관리국을 완전히 적으로 돌리는 거나 다름없었다. 오랜만에 고향으로 돌아온 입장에서 그것만은 말리고 싶었다.
그때였다.
“다 왔다, 빨리 문 열어!”
드디어 가동실이 위치한 격리 구역에 다다랐다. 특별한 장치가 되어 있는 듯, 천천히 열리는 문.
서정민은 위기관리실 직원들 뒤에서 차례를 기다렸다. 그런데 돌연 고함이 고막을 때렸다.
“씨발, 저거 뭐야?”
“미친! 왜 복도에 촉수가 꿈틀거려!”
“잠깐, 안개가…!”
“서정민 씨, 뒤로 물러나요!”
몸을 가로막는 팔을 뿌리치며, 서정민은 문 안쪽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이를 악물었다.
환각 심장이 위치한 가동실. 그곳을 중심으로 방사형으로 뻗은 복도는 그 자체로 하나의 제어석과 같은 기능을 했다.
바닥부터 천장까지 빼곡히 환각 심장의 힘을 막기 위한 마법진과 장치들을 잔뜩 깔아 놓았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건 마법진의 불빛이 아닌 두꺼운 촉수들이었다.
희뿌연 안개 속에서 살아 움직이듯 꿈틀거리는 녹색 촉수들 말이다.
“당장 개발실이랑 국장님한테 연락해. 아무래도 연구동 지하 폐쇄 들어가야 할 것 같다고!”
스륵.
스르륵.
짙게 깔린 안개를 헤치며 녹색 촉수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정민 씨, 지금이라도 돌아가세요.”
“아뇨. 함께 하겠습니다.”
이건 누군가에 의해 의도된 테러다. 서정민의 직감이 그에게 말했다.
‘다른 사람들은 기태연을 노린 거라고 생각하겠지만….’
글쎄, 우리 작은 도련님도 더러운 성질머리만큼 적이 많아서.
서정민의 손끝이 하얗게 빛났다. 안경알 너머 갈색 눈동자에 샛노란 빛이 감돌았다.
그는 그대로 위기관리실 직원들과 함께 안개 속을 향해 몸을 던졌다.
쿠우웅——!
캬아아아악!
정체불명의 괴성이 벽에 부딪혀 사방으로 울려 퍼졌다.
***
“윽.”
아릿한 둔통과 함께 한차수는 정신을 차렸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건 온통 새까만 어둠뿐.
“…….”
그는 가장 먼저 주변의 기척을 살폈다. 가까이서 느껴지는 호흡은 없었다.
한차수는 그제야 한숨을 삼키고 몸 상태를 체크했다. 다행히 부러진 곳은 없었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모르겠네.”
아무리 생각해도 그 높이에서 떨어졌으면 최소 골절에 최대 사망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자신은 어느 하나 부러진 곳 없이 멀쩡했다.
‘하여튼 엉망진창이라니까.’
한숨을 내쉰 한차수는 벽을 짚으며 일어섰다.
일단은 이곳의 지형을 파악하는 게 먼저였다. 그 뒤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가능하면 기태연을 찾아 합류해야겠지.
그렇게 한 발자국, 앞으로 내딛은 순간이었다.
스륵.
물컹한 무언가가 발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
잠깐, 잠깐만.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괴상망측한 자태가 들어왔다. 잘못 풀어낸 털실 뭉치처럼 제멋대로 엉킨 굵고 늠름한 촉수 더미.
한차수는 그제야 자신이 한 가지 사실을 놓쳤다는 걸 깨달았다.
이 미친 세계에도 식물형 몬스터가 존재했다.
그의 깨달음을 칭찬하듯 촉수 끄트머리에서 무언가가 떨어져 내렸다.
뚜욱… 뚝.
뭉근한 점액질이 허벅지에 닿은 순간, 소름이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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