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81화 (81/113)

81화

“후우….”

이마에서 흘러내린 땀이 시야를 가렸다. 이글거리는 불꽃, 검게 물든 대지.

정이흔은 끓어오르는 지옥 한가운데 서서 검을 고쳐 잡았다.

그아아아—!

괴조의 하반신이 녹아내리고 있었다. 강철 같던 날개 또한 마찬가지였다.

세 번의 시도 끝에 마침내 동쪽 구역의 보스 몬스터를 죽일 수 있었다.

‘이제 남은 건 북쪽뿐인가.’

압록강 1급 게이트 공략을 시작한 지 오늘로써 이틀하고도 반나절.

천령 길드는 게이트의 75%를 격파했다.

이대로 간다면 새벽이 오기 전 게이트 공략에 성공하고 돌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럼 바로 관리국에 들려 한차수를….

그때였다.

“큭.”

“길드장님?!”

“뭐야, 무슨 일이에요?!”

적당히 썼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건가. 정이흔은 입을 가린 채 숨을 몰아쉬었다.

몸속에서부터 끔찍한 고통이 피어올랐다.

무화가 일으키는 경고의 불꽃. 그것이 등줄기를 타고 오르며 그의 신경을 불태웠다.

한차수가 선사한 평온은 그렇게 여름날의 소나기처럼 순식간에 증발해 사라져 버렸다.

그것이 아쉬우면서도, 아쉬워하는 자신이 생경해 정이흔은 손을 말아 쥐었다.

“후우… 다들 볼일 보세요. 난 괜찮습니다.”

말을 하는 와중에도 숨통이 조여들고 폐가 갈라지는 통증이 끊이지 않았다. 하지만 견딜 만했다. 언제나 견뎌 왔고….

‘사실 이 며칠이 이상했던 거지.’

한차수가 무화를 없애 줬기 때문이다. 낙인이 사라진 몸은 새로 태어난 것처럼 가볍고 재빨랐다.

덕분에 게이트 공략은 예상보다 빠른 진척을 보였으며 피해 또한 경미했다.

모든 게 한차수 덕분이었다. 그래, 그가 제 인생에 뛰어들면서부터 모든 게 너무 좋은 쪽으로만 풀리고 있었다.

내 것이 아니라 생각했던 행운이 사람이 되어 나타난 것처럼 말이다.

그래서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생각의 끝이 그에게로 향하는 건.

“하아.”

몬스터를 베어 내면서도 자꾸만 한차수가 떠올랐다.

그와 가슴을 맞댄 채 숨을 공유했던 순간. 창백하지만 부드러웠던 그의 살결이 생생하게 떠올라 미칠 것 같았다.

욕심내면 안 되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어찌할 수가 없었다. 본능이 그를 갈구하고 있었다.

정이흔은 미약한 죄악감을 느꼈다.

“어이, 길드장. 정말 괜찮은 거 맞아? 정신 좀 차려 봐.”

창끝을 땅에 박은 길드원이 포션을 건넸다. 해태의 문양이 새겨진 포션. 한차수가 길드에 기증한 물건이었다.

어디를 봐도 그의 흔적뿐이라, 정이흔은 작게 웃고 말았다.

“고맙습니다.”

한차수를 떠올려서일까. 등줄기를 파고드는 고통도 어느샌가 희미하게 느껴졌다.

이진렬이 듣는다면 자기 세뇌일 뿐이라고 한 소리 할 테지만 상관없었다.

“일단 아이템들부터 수거하죠. 마정석은 가져온 수레에 싣고, 들어오기 전에 정한 것처럼 운반 담당이 가지고 베이스캠프로 돌아가세요. 정리가 끝나는 대로 북쪽으로 전진하겠습니다.”

“예!”

“알겠습니다아.”

길드원들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이쪽으로 몇 명 좀 와 볼래? 마정석이 너무 커서 나 혼자 들 수가 없을 것 같은데.”

“도축 스킬 있으면 이거 한 방에 발라낼 수 있는 건데… 하.”

왁자지껄. 소란 속에서 괴조의 사체를 분해하던 중이었다.

지이잉.

품속에서 한차례 진동이 울렸다. 정이흔 재빨리 붉은 구슬을 손에 쥐었다.

“서흔아?”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그를 불러낸 건 하나뿐인 동생이었다.

“무슨 일이야. 설마 길드에 게이트가 터지기라도 한 건.”

아니다. 길드에는 대응 설비가 갖춰져 있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설마 친척들이 찾아왔니?”

의식치 않았음에도 살기가 피어올랐다. 발밑에서부터 훅 하고 올라오는 열기에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아니, 아니야. 형! 진정하고 일단 들어 봐.

동생은 아마도 천천히 이야기를 전하면 자신이 이성적으로 받아들일 거라 생각한 듯했다.

그러나 그건 아주 귀여운 착오였다.

“…앞으로 20분.”

-뭐? 뭐라고 한 거야, 형?

“20분 내에 북쪽 구역을 점령하고 의료 센터로 갈 테니 게이트 입구에 차량 준비해 둬.”

관리국까지 가는 이동 시간을 줄일 수는 없으니 공략 시간을 최대한으로 단축해야 한다.

칼을 뽑아 든 정이흔의 몸에서 막대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후우욱—

-형!

-야, 정이흔, 너 미쳤어?!

서흔이의 뒤로 이진렬의 외침이 이어졌다. 재차 그를 불러 대는 목소리에 짙은 걱정이 서려 있었다.

“내가 걱정된다면 지금 당장 의료 센터로 사람부터 보내 놔.”

무화의 흔적이 피어나기 시작한 팔목을 슬쩍 들어 올리며 정이흔이 말했다.

어차피 한차수가 없다면 자신도 영원히 이 주박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가 말하고자 한 바를 알아들은 이진렬이 이를 꽉 깨물었다.

-너…! 끝나고 보자, 이번엔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자꾸 이런 식으로 협박해도.

“시간 없어. 20분, 지켜라.”

-으아악, 이 개자식아!

“서흔이 앞에서 욕 쓰지 마.”

뚝.

“어, 길드장님? 쉰다고 하시지 않았어요?”

“여러분은 쉬셔도 됩니다.”

저벅.

북쪽 구역으로 향하는 길을 밟는 정이흔의 눈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20분 뒤에 게이트 입구에 차량이 도착할 겁니다.”

“예?”

“모두에게 전하세요. 다들 돌아갈 준비 하라고.”

화르륵!

날카로운 검신을 타고 불꽃이 일었다.

***

상황이 아주 빌어먹게 되었다.

‘바라봐 줬으면 해? 아주 미쳤구나, 한차수.’

그는 스스로의 입을 꿰매 버리고 싶었다. 겨우 떨쳐 냈다 했더니 그 괴상망측한 욕망이 아직 무의식중에 남아 있던 모양이었다.

그 바람에 이 꼴이 되었다.

“날 원한다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참 궁금한데, 우리 한차수 헌터는 왜 더 말을 안 해 주는 걸까.”

기태연이 빙글거리며 곁을 맴돌았다. 날카로운 눈매 끝에서 즐거움이 뚝뚝 떨어져 내리는 게 퍽 재밌어 보였다.

“아, 설마 침대에서 함께 보냈던 시간을 잊지 못하는 건가? 이런, 그럼 그때 노려봤던 건 싫어서가 아니라 부끄러워서였나 보네. 내가 그것도 모르고 너무 빨리 일어났군요. 이거 미안합니다.”

S급만 아니었어도 주둥이를 꿰매 줬을 텐데. 한차수는 깊은 아쉬움을 느꼈다.

기왕 악역에 빙의할 거면 아예 작중 최고 악역에 빙의하는 게 나을 뻔했다. 그랬다면 지금처럼 침묵하는 대신 한 방 먹여 줄 수라도 있지 않겠는가.

‘그게 아니더라도 원래 내 위치였다면 기태연 정도는….’

“이런.”

한차수는 포션을 정리하다 말고 혀를 찼다.

‘여기서 갑자기 옛날이 왜 나와, 나오긴.’

부모님의 목소리를 떠올린 부작용인가 보다. 버렸다 해도 과언이 아닌 인생을 무의식중에 제 것처럼 여기려 했다.

‘이 나이를 먹어도 못된 습관은 버릴 수가 없나.’

아무래도 태어나면서부터 자연스레 습득한 거라 어쩔 수 없는 듯했다.

처음부터 가지고 있어 그게 특권인 것을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 자신은 그런 부류의 인간이었다.

하지만 특권에는 대가가 존재한다.

그러니 이곳이 소설 속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 살던 세계라 하여도 달라질 건 없다.

다른 이가 원해도 자신이 원하지 않을 테니까.

한차수는 빠르게 헛생각을 정리하고 손을 놀렸다.

“반응이 없네.”

주위를 뱅글뱅글 돌던 기태연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드디어 포기한 듯싶었다.

한차수가 그를 흘끗 건너다보며 말했다.

“앞으로 어떤 몬스터가 나올지 모르니 포션을 좀 나누고 싶은데요. 특별히 필요하신 게 있습니까?”

“아예 모르는 척하는 건가. 흠, 고백받자마자 차이는 건 처음이라 좀 충격적이네.”

충격은 이쪽이 받아야지. 한차수는 무심한 얼굴로 인벤토리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지금 기태연에게 아주 필요한 아이템이었다.

“온몸에 용혈이 흐르시는 분께 체력 포션이 필요하지는 않으실 테고… 이건 어떠십니까.”

한차수는 그의 손에 침묵 포션을 쥐여 줬다.

“필요하면 지금 드셔도 됩니다.”

쓸데없는 말만 할 거면 닥치라는 뜻이었다. 기태연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피식 웃은 그가 포션을 다시 제 손에 넘겨주었다.

“내 걱정은 말고 한차수 헌터나 많이 쓰세요.”

한차수는 인상을 쓰며 포션을 인벤토리에 쑤셔넣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독약을 좀 남겨 놓을 걸 그랬다.

파지직!

“서둘러야 할 것 같은데?”

“…알고 있습니다.”

한차수가 인상을 쓰며 구석을 응시했다.

안전 구역이라 여겼던 공간의 가장자리가 점점 깨지고 있었다.

뭐 이딴 던전이 다 있나 싶었지만….

“정말로 이게 환각 심장이 만들어 낸 공간이라면 그걸 가진 놈을 죽이면 해결되는 거겠죠.”

시스템의 근원이 되는 강력한 마력원이 폭주한 결과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모든 게 엉망진창이라는 점에서.

“그건 내가 알아서 할 테니 한차수 헌터는 다치지 않는 데에만 집중해요. 심장에 다른 사람의 힘이 담겨 있다는 거, 특히나 자기는 쓸 수도 없는 힘이 있다는 거… 나쁜 건 아닌데 좋은 일도 아니거든.”

제어할 수 없는 강력한 힘은 재앙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콰아아앙—!

콰앙, 쾅, 콰아앙!

“실장님!”

바로 지금처럼.

아아아아아————!

적은 그들에게 도주로를 내주지 않았다.

순식간에 바닥이 무너져 내렸다. 무저갱이 기다렸다는 듯 그들을 집어삼켰다.

“한차수!”

어둠 속으로 떨어져 내리는 순간에도 기태연은 팔을 뻗었다.

서늘한 손끝이 그를 스치고 떨어져 내렸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81)============================================================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