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화
“확인은 끝나셨습니까?”
“…….”
“실장님?”
한차수의 부름에 기태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그만큼 당황스러웠기 때문이다.
“잠깐, 기다려 봐요.”
기태연은 눈을 감고 다시 한차수의 가슴을 짚었다. 손끝이 푸르게 빛나고, 한차수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윽.”
“조금만 참읍시다.”
여기서 제일 놀란 건 나니까.
기태연은 숨을 참고 집중했다. 찌푸린 미간이 그가 얼마나 몰두하고 있는지를 나타냈다.
희푸른 기운이 처음으로 한차수의 가슴 속을 파고들었다.
쿵, 쿵.
규칙적으로 뛰는 심장에서 흘러나오는 기운이 느껴졌다. 기태연의 입에서 탄식이 터졌다.
“진짜잖아.”
그는 더 이상 현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바다를 뒤집어엎고, 폭풍우를 불러일으키는 힘.
대대로 이 땅과 바다를 지켜봤으며 이제는 직접 지키고자 하는 거대한 의지의 조각.
대격변의 날, 쓰러진 기태연을 일으켜 세워 그를 화신으로 삼은 동해 용왕의 힘이 한차수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한차수는 용혈을 한 점의 소실 없이 온전히 받아들였다. 죽지 말라고 먹여 놨더니 제 걸로 만든 것이다.
따라서 그의 몸에 남은 잔 기운은 부작용의 흔적이 아니라 심장에 자리 잡은 힘의 잔여물이었다.
“나 참, 믿을 수가 없네.”
하지만 사실이었다. 한차수는 그의 힘을 심장에 품었다.
“아아.”
이제야 머리가 좀 돌아갔다. 어쩐지 부작용이 터졌다기엔 지나치게 쌩쌩하다 했더니.
‘권속이 아니라 분신이라고 여겨졌던 건가.’
그렇다면 자신이 한차수의 귀속 아이템을 풀어낸 것도 설명이 된다.
물귀신이 되었다기엔 별로 물에 집착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없던 한차수. 그러나 그의 몸에는 여실히 남아 있던 용혈의 기운.
그리고 그의 존재감을 지나치게 느끼던 자신과 그에게서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아쉬운 마음까지 말이다.
전부 한차수가 그의 일부분을 취해서 생긴 일이었다.
‘그러니 놓치고 싶지 않았지.’
헛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느꼈던 찜찜함이 일시에 풀리는 기분이었다.
“한차수 헌터.”
“예.”
“그동안 내 말을 잘 들은 게 아니라 아예 조심할 필요가 없었던 거였네요.”
한차수가 무슨 말이냐는 듯 바라보았다. 기태연은 작게 웃으며 그의 머리를 헝클어트렸다.
이런 줄 알았으면 치료 잘 받는다고 칭찬 겸 몰래 간식을 주다가 혼나는 일도 없었을 텐데.
한차수에게 더 이상의 당분을 공급하지 말라며 의료진에게 한소리 들었던 게 떠올라 기태연이 한숨지었다.
“알아듣게 말씀해 주시면 안 됩니까?”
한차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자꾸 말을 빙빙 돌리시는 것 같은데, 지금 이렇게 농담이나 할 시간 없습니다.”
한차수가 흐트러지는 공간을 가리키며 말했다. 단정한 그의 미간이 한껏 찌푸려져 있었다.
기태연은 머리를 헝클이던 손을 내려 그의 주름을 살살 문질렀다.
보통 이쯤 되면 뭐 하냐고 손을 내칠 타이밍인데 희한하게도 한차수는 가만히 손길을 받아들였다.
기태연은 묘한 표정으로 한차수에게 속삭였다.
“다 말해 줄 테니 이리 와 봐요.”
“…….”
한차수는 탐탁지 않은 표정으로 그에게 다가왔다. 일어서지 않은 채 꿈지럭거리는 게 제법 귀엽게 느껴졌다. 이것도 한차수가 자신의 힘을 품고 있어서인가?
기태연은 헛웃음을 터트릴 뻔했다.
‘이거 꽤나 성가시네’
이런 살아 움직이는 감정을 느낀 게 몇십 년 만이던가. 가슴께를 간질이는 생경한 감각에 기태연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한차수 헌터 말이 맞습니다. 영체화고 나발이고 그건 핑계고, 내가 당신한테 뭔 짓을 하긴 했지.”
“…….”
“그날 기억합니까? 관리국에 처음 온 날 말입니다.”
“기억합니다.”
한차수는 눈살을 찌푸리며 답했다. 그날을 어떻게 잊는단 말인가. 눈앞의 남자가 자신을 납치해 자백을 강요했었는데.
‘설마 그때 내게 이상한 걸 심었나?’
의심이 마음속에 싹텄다. 만약 자신을 의심해서 뭔가 수작을 부린 거라면.
한차수가 열심히 머리를 굴리는데 믿을 수 없는 말이 뒤를 이었다.
“그때 그쪽이 죽을까 봐 어쩔 수 없이 내 피를 먹였습니다. 아마 그것 때문에 이상한 게 보인 걸 거예요.”
“예?”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피? 나한테 피를 먹였다고?’
한차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하….”
사람이 피를 토하고 쓰러지면 상식적으로 지혈을 하고 치료를 해야지. 왜 자기 피를 먹인단 말인가.
역시 이 세상에는 미친놈이 너무 많다. 한차수는 극심한 피로감을 느꼈다.
“너무 그렇게 치를 떨지는 맙시다. 나도 상처받아요.”
“…아픈 사람한테 피를 먹여 놓고 그런 말을 하시니 참 재밌습니다.”
“즐거우면 됐습니다. 그리고 내 피는 좀 특별해요. 입으로 먹어도 아무 이상 없으니 걱정하지 말고. 환각 속에서 내가 어떤 존재인지 봤다면서 왜 이렇게 호들갑이야.”
“그래서 애초에 피는 왜 먹이신 겁니까?”
“그야 우리 한차수 헌터 살리려고 그랬지. 내 피는 만병통치약이나 다름없으니까.”
씩 웃는 기태연의 동공은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오싹.
반사적으로 소름이 돋았다. 저도 모르게 팔을 매만지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차수 헌터가 제대로 봤어요. 날 일으켜 세운 세계의 의지는 청룡. 제 딴에는 동해 용왕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땅의 수호자입니다.”
기태연은 시원스레 제 정체를 밝혔다.
“어때, 이제 내가 좀 달라 보이나?”
너무 아무렇지 않게 말해서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윽고 깨달았다.
동해 용왕이라니. 그건 신화 속의 존재 아닌가. 한차수는 탄식했다.
‘그래서 원작에서는 끝까지 숨겼던 거로군.’
그런데 왜 지금 제게 밝힌 걸까. 대충 둘러대면 됐을 텐데.
의문을 가지기가 무섭게 기태연이 그의 의문을 해소해 주었다.
“너무 솔직하게 말해서 놀랐습니까? 걱정 말아요. 어디 가서 내 배후에 대해 떠들고 다니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테니까.”
새파란 눈동자에 예기가 깃들었다.
“궁금하면 한 번 시도해 봐도 좋고.”
“됐습니다.”
어디 가서 떠벌렸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판인데 무엇하러.
한차수가 혀를 차자 기태연이 빙그레 웃었다.
“하여튼 그날 갑자기 쓰러진 한차수 헌터 살리려고 내가 직접 피를 먹였고,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된 겁니다. 이제 이해가 되나?”
기태연은 자초지종을 모두 설명했다.
혼자서 의료 센터며 개발실이며 모두 속여 넘긴 그의 활약에 한차수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생명의 은인한테 반응이 왜 그럽니까?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다고 말해도 모자랄 일 아닌가.”
“애초에 절 끌고 가시지 않았으면 그런 일도 없었을 것 아닙니까.”
기태연이 그런가? 하는 얼굴로 눈을 깜빡였다. 한차수는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이성을 다잡았다.
‘이놈이 어디서 은인 행세를 하려고.’
하여간 조금만 방심했다가는 바로 뒤통수를 치려는 세상이었다.
‘어디 보자.’
한숨을 내쉰 한차수가 팔짱을 꼈다. 벽에 등을 기댄 그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대충 어떻게 된 건지 알겠습니다. 응급 처치를 위해 실장님이 제게 본인의 피를 먹이셨고.”
“용혈. 그게 정확한 말입니다.”
“…알겠습니다. 그놈의 용혈은 그래서 치료만 하지 왜 절 이상하게 만드는 겁니까. 이것 때문에 자꾸 실장님이 저만 바라봐 주셨으면 하고.”
젠장.
입을 가렸을 땐 이미 늦었다.
“뭐라고? 다시 말해 봐요.”
먹이를 노리는 짐승처럼 형형한 눈동자가 코앞에 있었다.
***
이진렬은 식은땀을 흘렸다.
“…특별공략대 1팀 게이트 3차 진입 시간이 언제였지?”
“어, 10분 전입니다. 현장에서 무슨 사건이 터지지 않는 한 이미 진입하셨을 것 같은데요.”
“망했다.”
“부길드장님? 왜 그러세요!”
“아아….”
소파에 드러누운 이진렬이 몸부림쳤다. 방금 전 그가 받은 소식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한차수 씨한테 무슨 일이 생겼나 봐….”
“헉.”
“무슨, 무슨 일이요? 오늘 새로운 치료 들어간다고 하지 않았어요?”
“그러니까….”
이진렬이 죽어 가는 목소리로 그가 받은 메시지를 읽어 줬다. 사무실이 침묵에 감싸였다.
사무실에 모인 각성자들은 모두 천령 길드 소속 헌터들. 정이흔과 함께 게이트 클리어를 위해 떠난 공략대의 원격 지원을 위해 모인 이들이었다.
한마디로 정이흔이 얼마나 한차수를 아끼고 집착하는지 곁에서 지켜본 사람들이란 소리였다.
“그, 길드장님 외부랑 통신되는 아이템 가지고 계시지 않아요? 작년에 피투성이 탑 클리어하고 받은 눈깔 모양의 그거.”
“정서흔 헌터한테 있다.”
“아.”
침묵이 사무실을 짓눌렀다.
만약 한차수에게 무슨 일이 생긴다면. 그리고 게이트를 클리어하고 나온 정이흔이 뒤늦게 그 사실을 알게 된다면….
“관리국으로 갈 길드원들 모집해라. 위기관리실 헌터들이랑 붙은 적 있는 사람들은 안 된다고 적고….”
“저, 저희도 갈게요!”
“됐고 너희는 여기 남아서 현장 상황 주고받아.”
이진렬이 외투를 챙기며 다 죽어 가는 목소리로 지시를 내렸다.
“나는 가서 한차수 씨 상황 보고 있을게. 만약 구출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바로 연락 넣을 테니까….”
그때였다.
“그게 무슨 말이야, 형?”
“어, 어? 너 어떻게 여기 있어?”
활짝 열린 문 한가운데, 주홍빛 눈을 사납게 번뜩이는 사내가 서 있었다.
“한차수 씨가 뭐 어떻게 됐다고?”
피나는 수련 끝에 돌아온 A급 헌터, 정서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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