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8화
“연구동 쪽이 시끄럽다고?”
“네, 방금 인트라넷에 올라온 글들로 보건대 무슨 일이 생기긴 한 모양입니다.”
집중안보실 실장, 곽이적의 미간에 주름이 졌다.
“사람들이 자기네들 대피해야 하는 거 아니냐고 그러고 있네요. 위기관리실 애들이 복도를 미친 듯이 뛰어다니고 있다고….”
“뭐?”
위기관리실 이야기가 나오자 곽이적의 얼굴이 험상궂게 변했다.
“내놔 봐, 보자.”
곽이적이 잔을 내려놓고 손을 까딱였다. 부하가 들고 있던 초밥을 한 입에 삼키고 납죽 핸드폰을 바쳤다.
내용을 확인한 곽이적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기태연이랑 고아 새끼 둘이서 휘말렸나 보네.”
“정말요?”
“어어, 야 일어나려던 놈들 다시 앉아. 굳이 갈 필요 없겠다. 둘 다 뒤지면 좋고 아니면 됐지. 잠잠해질 때까지 내버려 둬.”
어차피 자신들은 컨퍼런스 뒤풀이에 참석한 VIP들을 경호하기 위해 바빴다고 하면 끝이다.
실실 웃은 곽이적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두꺼운 손가락이 빠르게 화면을 움직였다.
연구동으로 간 직원들이 보냈을 보고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으응?”
“왜 그러세요?”
“이 녀석들 왜 연락이 없지.”
도착한 메시지 0, 부재중 통화 0.
별도 통신기를 살펴봤지만 마찬가지였다. 연구동으로 보낸 다섯 명 중 누구도 그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책임자로 임명한 강우진조차 말이다.
“…눈치 보고 있나?”
게시글을 봤을 때 이상이 발생한 건 최소 이삼십 분 전. 그런데 아직까지도 소식이 없다는 건 이상한 일이었다.
“야, 다들 전화 걸어 봐라.”
저마다 전화를 걸어 본 부하들이 답했다.
“안 받습니다.”
“저도요.”
“뭐야, 이거 위기관리실 새끼들이 협박이라도 한 거 아냐?”
곽이적이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거렸다.
협박받은 게 아니라면 설명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특히나 강우진이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안보실 신입 강우진은 만사에 적극적인 사내였다. 한차수 경호팀에 신입만 넣자고 제안한 것도 그이지 않은가.
곽이적은 콧김을 뿜었다.
“설마 연구동 직원들 도와준 걸로 억하심정 품고 애들 괴롭히고 있는 거 아니에요?”
“미친놈들! 실장님, 빨리 가서 애들 데려오죠?”
한숨을 내쉰 곽이적이 이를 악물었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내리누르며 그가 말했다.
“…기척 지울 줄 아는 애들로만 가자. 붙잡혀 있다면 빼 오고, 한 대라도 맞았다면 바로 증거 남겨.”
그들에게 한차수는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멍청하게 위기관리실에 넘어간 놈. 어떻게 되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기태연이 알아서 구해 주겠지.’
“조금이라도 위험한 것 같으면 바로 몸 빼. 알겠냐?”
그때였다.
“곽이적 실장님.”
그를 부른 건 차분한 목소리가 잘 어울리는 우아한 남자였다.
“여기 계셨군요.”
푸른빛이 도는 회색 눈이 반달처럼 접혔다. 창백한 안색에 호리호리한 체격. 하지만 곧은 자세 덕에 강단 있는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
그를 본 곽이적이 바로 낯빛을 바꿨다.
“아이고 우리 연구소장님.”
곽이적이 환히 웃으며 몸을 틀었다. 당장에라도 두 손을 붙잡고 크게 흔들 기세였다.
사내의 정체는 민간 군사 기업 모놀리스 회장의 아들인 채라하.
세계 각국 요인들에게 각성자 호위 서비스를 제공하는 헌터 용병업으로 시작, 현재는 각성자 관련 의료기기나 강화제 등 다양한 분야에서 연구 성과를 내는 글로벌 기업의 후계자였다.
항간에는 그들을 두고 마피아니 조폭 출신이니 하며 말을 흘렸지만 모두 확인되지 않은 소문일 뿐이었다.
곽이적에게 중요한 건 채라하가 장차 한국에 설립될 예정인 모놀리스 한국 연구소의 소장이 될 사람이라는 것뿐이었다.
“여기는 어쩐 일이십니까. 연구소장님을 필요로 하는 분들이 저렇게나 많으신데요.”
곽이적이 흘끗 채라하의 뒤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의 말대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아쉬운 눈길을 보내고 있었다.
곽이적의 아부에 채라하가 작게 웃었다.
“충분한 대화를 나누다 온 참입니다. 그리고 연구소장이라뇨. 그냥 편하게 불러 주십시오. 아직 연구소 기둥도 세우지 않았는데요.”
채라하의 말에 곽이적이 하하 웃었다.
본부장이 오늘 직접 연 컨퍼런스의 목적은 사실 채라하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관리국 중추인 자신은 이만큼이나 내줄 수 있다. 이렇게까지 퍼부어 줄 수 있으니 해태나 다른 유력가들 말고 자신을 선택하라는 제안 말이다.
그만큼 모놀리스의 유치는 매력적인 사안이었다. 누가 가져가냐에 따라 정치권 역학 구도에 변화가 생길 테니까.
다행히도 채라하는 컨퍼런스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고 뒤풀이가 끝난 뒤 본부장과 따로 시간을 갖기로 했다.
드디어 서류에 사인을 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돌연 생각지도 못한 말이 들려왔다.
“오면서 들었는데 연구동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겁니까?”
“예?”
“본부장님이 그렇게 자랑하시던 가상현실 시스템이 마침 가동 중이라고 들었는데, 설마.”
“그럴 리가 있습니까!”
곽이적이 말도 안 된다는 듯 호탕하게 웃었다.
가상현실 시스템은 모놀리스를 낚기 위한 떡밥 중 하나였다.
그러니 시스템에 오류나 사고가 생긴 것 같다는 말은 절대로 할 수 없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만약 문제가 생겼다면 제가 진작에 달려갔겠지요. 집중안보실은 관리국의 안전을 최우선시하니까요.”
“…그렇군요.”
채라하의 눈이 묘한 빛을 띠었다. 진위를 가늠하듯 눈여겨보는 모양새. 곽이적은 저도 모르게 긴장했다.
“솔직히 이야기하셔도 됩니다.”
“예?”
“사실 전부 들었습니다. 위기관리실 실장이라는 사람이 본부장님이 이야기하던 장애물 같던데요. 맞습니까?”
곽이적은 답하지 않았다. 경계심 어린 공기에 채라하가 어깨를 늘어트렸다.
“우린 이제 한 배를 타지 않았습니까. 본부장님의 적은 제 적이나 마찬가지인데, 곽 실장님은 그렇지 않으신가 보군요.”
채라하는 그대로 자리를 뜨려 했다. 곽이적의 두 눈이 번쩍 뜨였다.
이대로 보낸다면 오늘 계약서에 사인하는 건 물거품이 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자, 잠시만 기다려 보시죠.”
주위를 확인한 그는 조용히 채라하를 다른 회장으로 데려갔다. 안보실 직원들도 동행했다.
잠시 뒤, 자초지종을 전해 들은 채라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아, 장애물이 하나가 아니라 둘이었군요?”
“예에. 뭐, 환자 쪽은 회유해 보려 했는데 아무래도 안 될 것 같아서 이대로 치울 수 있을 때 치울 생각입니다. 듣자 하니 고아던데 이대로 죽는 편이 그놈한테도 더 좋을 거고요.”
관리국에서 시체는 수습해 주지 않겠습니까. 곽이적이 피식거리며 덧붙인 말에 채라하의 얼굴에 그림자가 졌다.
“…그렇군요.”
쾅!
“그럼 나도 치울 수 있을 때 치워 둬야겠어요.”
“컥!”
나지막한 읊조림과 동시에 곽이적은 눈 깜짝할 사이 벽에 처박혔다. 콰앙, 쾅! 뒤이어 부하들 또한 그와 같은 신세가 되었다.
곽이적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지금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가 미친 듯이 흔들렸다.
“미…!”
다급히 입을 열었으나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폐를 쥐어 짜내는 듯한 통증에 곽이적은 몸부림쳤다. 그의 얼굴이 점점 보랏빛으로 변했다.
“왜 세상엔 쓰레기가 이리도 많을까.”
채라하가 안타까운 목소리로 읊조렸다.
“어떻게 할까요, 도련님.”
“물어볼 필요가 있나?”
우드득.
사지가 뒤틀리는 고통을 견디지 못한 곽이적의 눈이 까뒤집혔다.
채라하가 우아하게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고아도 아니니 시체 수습해 줄 사람은 넘쳐 나겠지.”
“…….”
“이걸로 확실해졌다. 여긴 차수가 있을 곳이 못 돼.”
관리국에 쓰레기만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위기관리실도, 의료 센터 직원들도 모두 동생에게 상냥하다고 했지.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인가.
“당장 연구동으로 가자.”
쓰레기는 존재만으로도 해악이었다.
그들은 동생의 지척에서 역겨운 숨을 내쉬었다는 것만으로도 죽어 마땅했다.
***
한차수는 숨이 막혔다. 시야가 어지럽고 머리가 돌아 버릴 것 같았다.
아니, 진짜 세상이 빙글빙글 돌고 있는 걸지도 모르지.
“하아, 하….”
“괜찮습니까?”
“네. 후욱. 좀 울렁거리는 걸 빼면… 쿨럭!”
바닥을 짚은 한차수의 입에서 거친 기침이 쏟아져 나왔다.
“후우….”
도망치며 입 안을 깨물었나 보다. 핏물을 뱉어 낸 한차수가 손등으로 입가를 닦았다.
“여긴 안전한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긴장 풀지 말아요.”
기태연은 완벽한 경계 태세였다. 한차수의 어깨를 짚은 채 주변을 살피는 그의 푸른 눈이 번뜩였다.
그도 깨달은 것이리라.
리치들을 일거에 쓸어버린 이후 일어난 일. 거대한 신상의 피눈물 섞인 절규와 공간의 뒤틀림.
그건 어딜 봐도 ‘테스트용 던전’에서 일어나서는 안 되는 상황이었다.
“포션 남은 거 있으면 바로 마시고.”
창해 같은 푸른 눈은 여전히 먼 곳에 박혀 있었다. 먼지를 털어 낸 한차수가 제 어깨를 붙잡은 그의 손을 잡았다.
“안 됩니다.”
“뭐?”
“아까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여기가 단순한 테스트용 던전이 아닌 것 같다고. 저도 동의합니다. 그러니 포션은 되도록 아껴야….”
시선이 닿았다. 먼 곳을 바라보던 기태연의 눈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아, 평생 이렇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뭐?’
내가 지금 무슨 생각을 한 거지?
한차수는 놀라 손을 뿌리쳤다. 기태연이 황당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하지만 그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두근.
“윽….”
“한차수 헌터?”
가슴이 울렁였다. 심장에서부터 피가 쏟아져 내려 세차게 흘렀다.
두근.
다시 한번 거세게 약동하는 심장.
“한차수 헌터, 왜 그래요. 괜찮습니까? 피를 너무 흘려서 어지러워요?”
창해처럼 푸르른 눈. 청옥처럼 빛나는 그의 영혼을 제게 붙들어 놔야 했다.
그는 기태연이 필요했다.
알 수 없는 충동이 한차수를 사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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