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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77화 (77/113)

77화

이런 걸 원한 게 아니었다.

기태연에게 한쪽 손이 완전히 붙잡힌 채 끌려다니기를 어언 삼십여 분.

[죽■라, ■■한 ■■■—!]

[침입자를 ■죄해라. ■■시여, ■■받은 이에게 ■■ 를!]

한차수는 흐린 눈으로 안개 너머에서 울부짖는 이들을 바라보았다.

넝마 같은 로브를 뒤집어쓰고 비루먹은 개처럼 짖어대는 몬스터의 정체는 리치.

네 번째 방인 지하 제단의 주인이자 마법을 쓰고 저주를 내리며 영생을 탐하는 해골이었다.

“도망치는 주제에 조잘조잘 시끄러워 죽겠네.”

쌔액!

혀를 찬 기태연이 얼음창을 날렸다.

콰앙! 허공에 펼쳐진 마법진 위로 얼음조각이 흩날렸다.

[■■■■■■!]

리치가 또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흩뿌리며 뒤로 물러났다.

스스슥. 수십이나 되는 무리가 한꺼번에 움직이는 광경은 꼭 벌레가 떼로 꿈틀거리는 것 같았다.

“잡아 죽이겠다면서 왜 자꾸 도망치는지, 원.”

기태연은 당장이라도 뒤를 쫓고 싶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가 으르렁거리는 목소리로 내뱉었다.

“이런 식으로는 끝이 없겠는데….”

푸른 눈동자가 짐승처럼 번뜩였다. 한순간 동공이 바늘처럼 가늘어졌다 돌아왔다.

안개 너머를 꿰뚫는 시선이 서슬 퍼랬다.

“슬슬 끝을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말인데.”

“실장님 말이 맞습니다.”

“음?”

한차수는 기다렸다는 듯 그의 말을 잘랐다.

“보스룸까지 얼마나 남은지 모르는 상황에서 시간을 더 지체할 수는 없는 노릇이죠. 게다가 바깥에서도 슬슬 저희를 걱정하고 있을 테고요.”

적극적인 주장에 기태연의 고개가 기울어졌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의미 없는 추격전은 그만하고 근접전을 치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제가 아니라 실장님이 말입니다.”

은근슬쩍 깍지 낀 손을 흔들며 하는 말에 기태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또 이런다, 또. 그렇게 손잡는 게 힘듭니까? 지금까지 많이 잡아 봤으면서 왜 이제 와서 내외하는 건지 모르겠네.”

“그건 치료를 위해서 그런 거 아닙니까.”

“지금도 다른 거 없는데.”

기태연이 가만히 웃으며 붙잡은 손에 힘을 줬다.

‘힘자랑하는 거야, 뭐야.’

눈매를 찌푸린 한차수가 툭 하고 말을 뱉었다.

“고집 좀 그만 부리고 그냥 좀 다녀오십시오.”

“꼭 우리 애들처럼 말하네.”

기태연이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한차수는 아랑곳 않고 말을 이었다.

“여기 잠깐 혼자 있는다고 제가 죽기라도 합니까? 어차피 몬스터들은 저쪽에 다 몰려 있지 않습니까.”

안개 너머를 응시하는 한차수의 눈동자에서 불똥이 튀었다.

이게 다 저 리치 놈들이 벌이던 의식 때문이었다.

지금으로부터 이십여 분 전, 네 번째 방에 발을 들였을 때.

[신성한 ■■께서 ■ ■을 불어■으신다—!]

지하 제단 안은 온통 피바다였다.

발목까지 차오른 끈적한 핏물과 코끝을 찌르는 시취. 고개를 들어 올리자 거대한 석상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세 번째 방에서 보았던 신의 석상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 아래 놓인 건 천장에 닿을 듯 높이 쌓아 올린 제단과 시체더미.

‘이게… 뭐지?’

그때, 한차수는 생전 처음 보는 광경을 해석하기 바빴다. 그 사이 제단을 둘러싼 리치 한 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팔을 치켜올렸다.

[——!]

앙상한 손이 움켜쥐고 있던 건 펄떡거리는 심장이었다.

바로 그 순간, 바닥이 일렁였다. 악취가 숨통을 틀어막고 추잡한 기운이 허공을 휩쓸었다.

잠깐이지만 눈앞이 일그러진 것도 같았다.

“한차수 헌터, 이런 데서 멍 때리면 안 된다니까.”

“…그런 거 아닙니다.”

상념에서 빠져나온 한차수가 고개를 흔들었다. 여하튼 그때 기태연에게 손을 붙잡힌 뒤로 지금까지 이 모양 이 꼴이었다.

기태연은 자신이 다칠까 봐 걱정된다며 리치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않았고, 그쪽은 원래 원거리 특기라 굳이 접근전을 펼치지 않았다.

그리하여 지금에 이른 것이다.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면 던전 나가서 가집시다. 미안하지만 지금은 나한테 전부 내주고.”

“하지만 언제까지 이럴 수는-”

“그래서 말했잖아요. 이제 슬슬 끝을 보겠다고.”

“무슨… 아.”

한차수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그래, 이래 봬도 S급에 위기관리실 실장 아닌가.

아무 생각 없을 리가 없지.

“일부러 시간을 두고 구석으로 몰아넣으신 거니까?”

한차수가 기태연과 시선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기태연의 능력은 바람과 얼음.

다수를 상대하기에 알맞은 힘이었지만 동시에 한계 또한 존재했다. 적이 넓게 퍼져 있다면 그만큼 힘을 집중시킬 수 없으니까.

파괴력이 낮아지는 것이다.

기태연이 소리 없이 미소 지었다. 한차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럼 지금까지 하신 공격도 전력을 다한 게 아니었겠군요.”

어쩐지 기마병의 중갑까지 뚫었던 창이 속속들이 부서진다 했다.

“알았으면 이제 가만히 있읍시다. 내가 나 좋자고 이럽니까. 다 한차수 헌터를 위해서 이러는 거예요.”

능구렁이처럼 내뱉은 남자가 손을 끌어당겼다. 순식간의 일이었다.

한차수는 소리조차 내지 못하고 기태연의 품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아이고, 착하다. 이렇게 얌전히 있으니 얼마나 좋아.”

“…….”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한차수 헌터는 쓸데없는 걱정 말아요. 우리 애들 흉내 낼 생각도 말고, 몸 건강히 집에 돌아갈 생각만 합시다.”

기태연의 손이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한차수는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왜 일찍 그의 계획을 알아차리지 못했나 싶어 입을 다물었다.

이게 다 머리를 아프게 하는 냄새 때문이었다.

“후우….”

살이 썩어 들어가며 나는 시취. 오랫동안 굳어 딱딱해진 핏물의 비릿한 냄새.

오염된 공기에 아까부터 머리가 지끈거렸다.

휘오오오———

바람이 빨려 들어가는 소리가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슬슬 끝냅시다.”

나지막한 읊조림이 고막을 스치고 옷자락이 거칠게 흔들렸다.

먼 곳에서 폭풍이 일었다. 안개가 걷히며 리치들의 낡은 로브 자락이 뜯어지는 게 똑똑히 보였다.

뻥 뚫린 눈구멍 안쪽에서 흔들리는 붉은 빛. 마치 살아 있는 사람인 것처럼 감정이 전달되는 빛무리에 한차수의 숨이 차분해졌다.

우우웅—

기태연이 손을 치켜듬과 동시에 거대한 신상의 면전에 하얀빛이 어렸다.

푸른빛이 허공을 긋는다. 세상을 두 개로 쪼개듯 내리 그어진 궤적. 그 자리에 모습을 드러낸 건 새하얀 얼음의 창.

석상의 얼굴을 절반이나 가릴 정도로 굵은 창의 몸체에 한차수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저거 저래도 되는 건가.’

구석에 몰아넣어 한번에 처리하려는 건 알겠는데 보스룸에 다다르기도 전에 너무 많은 힘을 쓰는 것 같았다.

한차수가 당연한 걱정을 하는 사이 창은 천천히 떨어져 내렸다.

천벌을 내리듯, 폭풍에 갇혀 한데 뭉쳐 있는 리치들을 향해.

콰아앙!

아아아악!

캬아아아아아!

땅이 갈라지고 냉기가 지면을 뒤덮는다. 폭발력에 쪼개진 신상의 얼굴이 쩍 조각나고.

털썩.

후드득.

안개에 몸을 숨기고 대규모 마법을 준비하던 리치들의 몸이 산산조각 나 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약동하는 마법진 위로 굴러다니는 시체와 뼛조각. 그 위를 휩쓰는 폭풍과 얼음의 창.

피와 살점. 오래된 원한과 욕망. 그리고 그들의 신 앞에서 신자를 몰살한 힘이 한데 뒤섞였다.

두근.

“…!”

한차수는 돌연 심장이 크게 움직이는 걸 느꼈다.

누군가 심장을 망치로 때린 것처럼 강한 충격이었다.

‘이게, 무슨.’

한차수는 저도 모르게 가슴팍을 틀어쥐었다. 평범한 고통은 아니었다. 페널티가 주는 경련처럼 쥐어 짜내는 듯한 통증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그보다는… 그래, 울림에 가까웠다.

몸 안에서 시작된 파도가 한차례 그를 휩쓸었다.

쏴아아-

머릿속에서 바다가 춤춘다. 수평선을 따라 흔들리는 시야. 검은 언덕을 뒤덮은 들풀처럼 해무가 피어오른다.

소용돌이가 하늘에 닿는다. 구름 위의 권좌를 향해 솟구치는 물줄기.

그것을 타고 오르는 건 푸른 눈을 가진….

꽈르릉!

“윽.”

환몽에서 깨어난 건 한순간이었다.

“한차수!”

날카로운 외침이 고막을 때리고 한차수는 현실을 자각했다.

쩍. 손목에 차고 있던 팔찌가 갈라지며 바닥을 굴렀다.

한차수는 그것을 곧바로 알아보았다.

의료 센터 직원, 서정민이 따로 팔목에 채워 준 아이템이었다.

정신력을 올려줌과 동시에 환각을 물리치는 저항 스킬이 달려 있는 팔찌. 그것이 쓸모를 다해 부서진 것이다.

‘그렇다는 건….’

삐이이————————

귓가를 울리는 희미한 경고음 속에서 한차수는 눈을 가늘게 떴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척추를 따라 쭈뼛 소름이 돋았다.

그러고 보니 이 던전은 그에게 아무런 정보도 알려 주지 않았다.

던전의 이름도, 지형도, 하다못해 몬스터의 이름 일부분조차도 나타나지 않았다. 테스트용 던전이라면 당연히 알려 줘야 할 것들인데 말이다.

왜일까.

의문을 가지는 건 쉬웠으나 그에 뒤따른 답을 인정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당장 일어나요.”

단단한 손이 그를 붙들었다. 허리를 감싸는 걸로도 모자라 행동을 제약하는 자세.

하지만 한차수는 그에 불평하지 않았다.

“이거 아무래도 평범한 테스트용 던전이 아닌 것 같아.”

아아아아아——-!

신상의 절규가 붉게 피어오르고, 세상이 무너진다.

규칙에 따라 단단히 얽혀 있어야 할 세계가 먼지처럼 부서져 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콰르릉!

“이쪽으로!”

기태연을 따라 검은 문 안쪽으로 발을 들이며 한차수는 생각했다.

어쩌면 이건, 현실일지도 모르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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