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화
세 번째 방의 토벌이 끝났다. 랜스를 든 기마병은 빙벽에 갇혀 두 팔이 잘린 채 목이 꿰뚫렸다.
너절한 반항 끝의 허무한 죽음이었다.
크아아아——!
사람 흉내라도 내고 싶은 걸까. 기사의 목 안쪽에서 원망하는 듯한 소리가 끓어올랐다.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선 붉은 연기가 유황처럼 타올랐다.
기태연은 무심한 낯으로 손을 틀었다.
끄드득!
‘너는 그래도 죽을 수라도 있지 않냐.’
누군가는 지금 네 처지를 부러워하겠지. 비록 가짜라 하여도.
스으윽―
창을 뽑아내자 기마병의 거대한 형체는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잿더미조차 남지 않은 바닥. 얼음이 녹은 자리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기마병이 드롭한 아이템이었다.
“흠?”
뒷면에 백합 문양이 양감된 브로치였다. 검은 보석을 둘러싼 금속 테는 보지 못한 빛을 띠고 있었다.
테스트용 던전에 넣기엔 꽤 정밀도가 높은 물건. 그러나 기묘한 데서 전문성을 발휘하는 개발진의 취향을 생각하면 이상한 것도 아니었다.
‘뭐가 됐든 한차수한테는 도움이 되겠군.’
아이템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불길하지 않았다. 아마 가지고 있어 해가 되는 종류는 아니리라.
‘나중에 줘야겠군.’
그때였다.
“실장님, 말씀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한차수가 창백한 얼굴로 터벅터벅 다가왔다. 기태연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붉은 상처는 하얗게 질린 뺨과 대비되어 유난히 도드라졌다. 우연히 났다기에는 너무 깔끔한 상처의 모양과 깊이.
한차수의 팔을 붙든 기태연이 물었다.
“뭐야, 어쩌다 다친 겁니까?”
“아, 궁병이 함정을 발동했습니다. 그림자 속에 숨겨 뒀던 것 같은데… 별거 아닙니다.”
“별거 아니긴.”
혀를 찬 기태연이 손바닥을 폈다. 한차수가 멀뚱한 얼굴로 고개를 기울였다.
“아까 그 포션 줘 봐요. 나한테 썼던 거.”
“아.”
한차수는 그제야 그의 말을 알아들었다. 푸른 액체가 찰랑이는 포션이 곧 모습을 보였다.
기태연은 뚜껑을 열며 한숨을 내쉬었다.
“나참, 이걸 선견지명이라고 해야 할지.”
원래 규칙상 참가자는 제어실에서 공급하는 아이템 외 다른 아이템을 소유, 사용할 수 없었다. 데이터 수집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하지만 한차수만은 예외였다. 의료진이 그걸 가만히 두고 보지 않았다.
“아무리 가상현실이라지만 맨몸으로 보낼 수는 없어요!”
“맞아. 그리고 한차수 씨는 치료 목적으로 들어가는 거잖아. 데이터 오염이니 뭐니 상관없는 거 아닌가?”
의료진의 강력한 항의에 개발실은 두 손 두 발을 들었다.
그렇게 한차수는 가지고 있는 포션들을 사전에 등록. 시스템 안에서도 사용할 수 있도록 허가받은 것이다.
“요새 과보호가 도움이 될 때가 있다는 걸 한차수 헌터를 보면서 깨닫고 있습니다.”
포션을 손에 받은 기태연은 그대로 한차수의 뺨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회색 눈동자가 화등잔만 해졌다.
“무슨, 뭐 하십니까?”
한차수는 반사적으로 뺨에 묻은 포션을 털어 내려 했으나 소용없었다. 기태연이 그의 손목을 꽉 붙든 탓이었다.
‘이 녀석 능력치 제한 풀린 거 아니야?’
기마병을 단숨에 제압한 것도 그렇고, 아무래도 수상하다. 한차수의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그러건 말건 기태연은 나머지 포션을 전부 한차수의 뺨에 발랐다. 청량한 박하 향이 코끝을 파고들어 뇌 속까지 닿는 기분이었다.
기태연이 어린아이를 혼내듯 엄한 눈빛으로 말했다.
“상처는 제때제때 치료해야지. 이런 거 습관 되면 무섭습니다.”
별것도 아닌 상처로 난리를 친다.
의료 센터 직원들한테 옮은 건가. 한차수는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상처도 아니고…. 어차피 가벼운 생채기잖습니까. 가만히 놔둬도 나을 겁니다.”
한차수는 별 생각 없이 한 말이었다. 진짜 상처라고 해도 어차피 재생 스킬에 의해 나았을 테니까.
하지만 기태연은 그의 말을 의미심장하게 받아들였다.
‘생사의 경계를 여러 번 드나든 영향인가.’
기태연이 보기에 한차수는 자신이 입는 상처나 고통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해태의 포션을 챙겨 왔길래 그래도 제 몸 하나는 잘 챙기려 한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그게 아닌 모양이다.
부어오른 손목과 날카롭게 베여 피가 흐르는 뺨. 둘 중 뭐가 심각한 상처인지는 물어보지 않아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런데 그게 가벼운 상처라니.
‘그뿐만이 아니야.’
한차수는 인지하지 못한 것 같지만 그는 가볍게 몸을 떨고 있었다.
그 상태로 피를 흘리면서 이런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말한 것이다.
‘위기관리실로 데려오고 싶다는 건 취소해야겠군.’
몸을 아끼지 않는 건 자신 하나만으로도 충분했다.
상처가 사라진 걸 확인한 기태연은 다른 손으로 한차수의 손을 꽉 붙잡았다.
역시나 지나치게 차가웠다.
“한차수 헌터, 여기서는 죽어도 상관없다는 거 알지만 그래도 자기 몸 하나는 제대로 건사합시다. 밖에서도 이럴 거 아니잖아요?”
한차수가 가상현실을 기꺼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밖에서는 골골대는 사람이 여기서는 마음껏 날뛸 수 있으니 당연히 기쁘겠지.
‘하지만 그러다가 치명상을 입기라도 하면 곤란해.’
아무리 거짓이라고는 하나 죽음의 무게는 무거운 법. 한차수의 연약한 정신이 어떤 영향을 받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기태연은 그가 여기서 더 망가지지 않기를 원했다.
살아서 제 곁을 떠나는 권속은 처음이었으니까.
하지만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져만 갔다.
“실장님.”
“왜요.”
“아까 말씀을 못 드렸는데, 아무래도 제 통각 동조율이 달라진 것 같습니다.”
“뭐라고요?”
“20%가 아니라 100%. 그러니까 현실의 고통이 그대로 느껴지는 것 같더군요.”
한차수가 상처 하나 없이 말끔한 뺨을 톡톡 건드리며 말했다.
“통각 동조율이 20%라면 찰과상 따위야 아무 느낌 없이 넘어가야 할 것 아닙니까. 그런데 공격을 받은 순간부터 치료 전까지 통증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상처를 치료하지 않고 있던 것도 통증이 언제까지 지속되는지 보기 위해서였다고 한차수는 말했다.
기태연은 누군가 자신을 상대로 장난이라도 치는 것 같았다. 머리를 짚은 그가 한숨처럼 말했다.
“…잠깐 정리 좀 합시다.”
통각 동조율은 제어실 측에서 언제든 변경할 수 있다. 하지만 권장되는 사항은 아니었다. 계속되는 변화는 정신과 신경을 혼란스럽게 만드니까.
게다가 지금은 제어실과의 통신이 끊긴 상태가 아닌가.
“던전이 생성되며 동조율 제한이 풀려 버린 건가.”
기태연의 혼잣말에 한차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가장 그럴듯한 답이긴 합니다. 던전에 돌입한 이후로 다친 적이 없으니 동조율이 높아진 걸 체감하지 못한 거고요.”
기태연의 얼굴에 심각한 빛이 스쳤다. 그가 가만히 읊조렸다.
“그렇다면 앞으로 동조율이 더 올라갈 수도 있다는 소린데….”
“저는 그렇다 쳐도 실장님은 괜찮으십니까?”
한차수가 그의 손목을 붙잡으며 말했다. 기태연은 무슨 소리냐는 듯 눈을 깜빡였다.
“저만 올라간 게 아닐 수도 있지 않습니까.”
한차수가 통각 동조율에 대해 말을 꺼낸 이유는 바로 기태연의 상황을 알기 위해서였다.
기태연의 기본 통각 동조율은 2배. 만약 거기서 더 올라갔다면 고통은 걷잡을 수 없게 될 터.
‘만약 기태연이 통증 때문에 싸울 수 없게 된다면 나도 따로 대비를 해야 한다.’
한차수의 눈동자가 냉정하게 기태연을 살폈다. 그는 살짝 생각에 잠긴 얼굴이었다.
잠시 뒤 기태연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으며 입을 열었다.
“나는 상관없습니다. 여기서 몇 배가 되든 별로 다를 것도 없고.”
‘개소리군.’
S급이라 그런지 허세가 아주 대단했다. 한차수는 헛소리를 무시하고 그에게 말했다.
“무턱대고 괜찮다고 말하지 말고 테스트를 해 보죠.”
“예?”
“제 동조율이 올라간 만큼 실장님도 같이 올라갔을지 모르는 것 아닙니까.”
설마 자기 동조율은 올라갔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한 걸까. 기태연은 놀란 듯 애매한 표정이었다.
“나는 괜찮을 텐데.”
“장담할 수는 없죠. 그러니 실험을 해 봅시다.”
한차수가 무덤덤하게 말하며 단검을 꺼내 보였다. 따로 등록한 기억은 없는데 어째선지 인벤토리 안에 들어 있었다.
‘의료진들이 등록해 준 거겠지.’
그들의 오지랖은 때때로 이렇게 도움이 될 때가 있었다. 한차수가 새파란 날을 치켜든 채 말했다.
“혼자 하기 힘드시면 제게 부탁하셔도 됩니다.”
“…….”
“포션은 바로 부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시고요.”
기태연은 할 말을 잃었다. 한차수가 이렇게 발칙하게 나올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한 탓이었다.
자기 몸만 아끼지 않는 게 아니라 남의 몸도 안 아끼는 거였나. 아니면 여기가 가상현실이라는 걸 믿고 배짱을 부리는 건가.
하지만 무슨 이유든 그는 피를 볼 생각이 없었다.
‘힘이 섞이지 않은 피라 하더라도 한차수를 자극할 가능성이 있어.’
어렵게 빼낸 힘이었다. 다시 부작용이 터지게 할 수는 없는 노릇.
기태연은 대충 둘러대기로 했다.
“통각 동조율이 올라갔다면 진작에 알았을 겁니다. 여기까지 오면서 물리친 몬스터가 몇인데요. 아까 내가 격투술 쓰는 놈한테 맞는 거 못 봤습니까?”
“흠….”
그건 그렇지. 한차수는 아쉬워하며 단검을 집어넣었다.
그 순간, 기태연이 한 발자국 다가왔다. 그를 붙잡았던 손이 반대로 붙들렸다.
강한 악력이었다.
“그보다 내가 아니라 본인 걱정부터 해야 하는 거 아닌가?”
푸른 눈동자가 빛을 받은 보석처럼 반짝였다. 어째선지 예감이 좋지 않았다.
“동조율이 반절 이하였다면 모를까, 이제는 절대로 다치면 안 되겠네. 우리 한차수 헌터, 다음 방부터는 내 옆에서 떨어지지 맙시다.”
“…….”
한차수는 아차 했다.
의료 센터에서 지낸 시간이 얼마인데. 녀석이 의료진에게 물들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니.
‘젠장.’
자신이 섣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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