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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75화 (75/113)

75화

쩌엉—!

쩌저적!

냉기가 대기를 휩쓸고, 힘과 힘이 허공에서 부딪힌다. 강한 압력에 몸이 밀리기가 무섭게 부서진 바닥 사이로 얼음창이 솟아난다.

콰드득!

얼음창을 부러뜨린 기태연이 그대로 땅을 박찼다. 날카로운 창 끄트머리가 기사의 목덜미를 정확히 겨눈 순간.

크아아악—!

거친 포효와 함께 묵직한 랜스가 허공을 쓸었다.

“어이쿠.”

검은 기운이 폭발함과 동시에 창날이 터졌다. 비산하는 얼음 조각을 바람에 날려 보내며, 기태연은 혀를 찼다.

‘생각보다 몸이 가볍긴 한데… 이 녀석들도 만만친 않군.’

보스 룸으로 향하는 길목에 위치한 세 번째 구역.

이름을 알 수 없는 거대한 신상이 사면을 둘러싼 방. 그곳을 지키는 건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은 여덟 명의 인간형 몬스터였다.

“아, 오늘 여기서 땀 다 빼고 가네.”

나가서 따로 운동 갈 필요가 없겠어.

투덜거린 기태연이 발을 쿵 하고 굴렀다.

훅!

바닥에서부터 튀어나온 얼음창이 손에 감겼다. 방금 전에 만들어 낸 창보다 세 배는 될 법한 두께였다.

‘이거라면 쉽게 못 부수겠지.’

푸른 눈동자가 새파란 궤적을 그리며 사위를 훑었다.

한차수의 도움을 받아 격살한 몬스터는 총 여섯. 이제 남은 건 둘뿐이었다.

방금 전 그의 창을 부순 중갑의 기마병 하나와.

후우욱-!

“오른쪽 천장 위!”

어둠 속에 숨어 한순간을 노리는 활쟁이 하나.

한차수의 외침을 들은 기태연은 그대로 왼발을 축으로 삼아 반 바퀴 돌았다.

“고개 숙여!”

화살촉 끝이 한차수가 숨어 있는 기둥을 향해 있었다. 기태연은 그대로 창을 날리는 동시에 허리를 숙여 왼손으로 바닥을 훔쳤다.

꽈과광!

아아아악!

사람의 것과 다를 것 없는 비명. 그러나 음울한 기운이 묻어 나오는 단말마가 무너져 내린 잔해 속에서 흘러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기태연은 손끝에 느껴지는 감촉에 집중했다. 말랑말랑한 게 아주 만지기 좋았다.

“먼지투성이네, 우리 한차수 헌터.”

한차수의 발목을 붙잡은 기태연이 씩 미소 지었다.

무너지는 기둥에 한차수가 휘말릴까 싶어, 바람을 움직여 그를 제 쪽으로 끌어당긴 참이었다.

한차수는 잔뜩 헝클어진 머리로 사납게 눈을 치떴다. 공략에 돌입하고 나서 이런 식으로 휘둘린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평소에는 냉기만 사용하더니 오늘은 무슨 변덕이 들어 바람까지 사용하는 건지. 덕분에 잘 숨어 있다가도 계속 기태연의 품으로 번번이 끌려가야만 했다.

“미리 신호라도 좀 달라고…. 대각선, 옵니다!”

“아주 쉴 틈을 안 주지!”

쩌저적!

얼음벽이 솟구치는 소리를 뒤로하고 기태연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붉은 눈을 번뜩이는 유령마가 이쪽을 향해 질주하고 있었다. 말 위에 올라탄 기사가 틀어쥔 랜스를 중심으로 폭풍이 일기 시작했다.

후우우웅—!

소용돌이치는 검은 기운이 대기를 찢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고 목 뒤가 쭈뼛해질 정도로 사악한 힘.

얼굴 없는 기사가 풀어내는 힘에 기태연은 웃었다.

상서롭지 못한 것들은 언제나 그의 먹잇감이었다.

[ 역천 ]

한순간 기태연의 눈동자가 길게 늘어졌다. 파충류의 눈처럼 세로로 좁아진 동공.

희푸른 물안개가 늘씬한 신형을 감싸고 자취를 감춘 그 순간.

콰아아앙!

검은 안개를 반으로 가르는 새파란 창날. 줄기줄기 뻗어 나오는 시린 기운에 공기가 얼어붙는다.

쩌저적!

냉기가 갑옷을 통째로 얼린다. 창날이 부딪힐 때마다 검은 갑주가 탈각되어 떨어져 나간다.

콰앙! 쾅!

2미터가 훌쩍 넘는 거대한 몸집의 기사를 상대로 기태연은 한 치도 밀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태연은 상대를 압도해 나갔다.

쿠우웅!

유령마가 소리 없이 무너지고 기사는 기우뚱 몸의 중심을 잃었다. 재빨리 무릎을 세웠음에도 소용없었다.

승리의 기운은 이미 기태연이 잡은 뒤였다.

“빨리 끝내자.”

끄드득. 얼어붙은 길을 밟으며 기태연이 창끝을 치켜들었다.

그 일련의 흐름이 무척이나 자연스럽고 압도적이라 한차수는 경탄을 금치 못했다.

‘S급은 S급이라는 건가?’

능력치를 자신과 동일한 수준으로 낮췄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만큼 기태연의 질주는 거침없었고, 한 점의 피격도 허락지 않았다.

촤악!

크아아아아아—!

새까만 핏물이 허공에 흩뿌려지고, 한쪽 팔이 날아간 기마병이 울부짖었다.

목청이 어찌나 좋은지, 무너진 돌기둥이 흔들릴 정도였다.

“슬슬 끝인가.”

두꺼운 얼음벽 뒤에서 한차수는 그의 활약을 전부 지켜보았다.

그때였다.

“——!”

강제로 감각이 일깨워지는 기분. 찰나의 평안에 젖어 있던 본능이 그에게 경고했다.

왼쪽 뒤, 무너져 내린 천장 아래. 일순간 하얀빛이 번뜩이다 사라졌다. 궁병의 눈빛이었다.

‘아직 숨이 붙어 있었군.’

얼음벽 너머를 본 한차수는 단검을 꺼내 들었다. 기태연은 기마병의 목을 따는 데 집중한 상태. 아무래도 자신이 나서야 할 듯싶었다.

페널티가 주어질까 걱정되긴 했지만, 뭐.

‘어차피 보스 룸에 이르기 전까지는 죽고 싶어도 못 죽는다고 했으니 다쳐도 상관없겠지.’

페널티는 그때그때 랜덤으로 정해진다. 운이 좋으면 편두통이나 각혈 같은 게 걸리지만 기절이 걸리면 골치 아파진다. 겨우 몬스터 하나 해치우고서 팀원의 발목을 잡게 될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그건 현실에서의 이야기고, 이곳은 가상 현실 시스템 안.

죽어도 상관없다는 사실이 그에게 걸린 제약을 한결 가볍게 만들어 주었다.

한차수는 단검을 틀어쥔 채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멀리서 기태연이 열심히 싸우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고개를 튼 한차수는 검은 기사가 구석에 몰린 걸 확인했다.

‘저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그는 안심한 얼굴로 검을 쥔 손에 힘을 실었다.

커다란 돌 틈으로 흘러나오는 핏내음. 정신을 집중하니 상대의 숨결이 느껴졌다.

휙!

한차수는 그대로 손을 떨쳤다. 그리고 따끔한 감각이 뺨을 스쳤다.

“허?”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한차수는 궁병이 마지막 발악으로 함정을 발동시켰다는 걸 깨달았다.

다행히도 바로 피했지만 뺨이 긁히는 건 피할 수 없었다.

[ 경고! ]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 페널티가 랜덤으로 정해집니다. ]

[ 상태 이상 ‘경련’에 걸렸습니다! ]

“큭…!”

덜덜 떨리는 몸을 겨우 추스리던 한차수는 깨달았다.

자신의 통각 동조율은 20%.

뺨의 미미한 상처에선 아무런 통증도 느껴지지 않아야 함이 옳다.

“잠깐, 이거 설마….”

한차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거짓 같은 햇살이 창백한 얼굴을 감싸고, 멀리서 비통한 단말마가 울려 퍼졌다.

크아아아아—!

핏내음이 선연했다.

***

“언제까지 여기서 죽치고 있을 거야.”

“아.”

툭 하고 머리를 내리치는 서류철에 백담이 인상을 썼다.

“뭐에요? 시비?”

미간을 잔뜩 구기며 부리는 짜증에 상대가 코웃음을 쳤다.

다른 이들이라면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숙였을지 몰라도 그녀는 아니었다.

독기만 가득했던 어린애. 펄펄 끓어오르는 증오를 애써 누른 채 어른인 척하던 백담을 이곳까지 이끈 게 누구인가.

백담 형제의 실질적 보호자이자 필로소의 현 길드장, 서정희였다.

‘하여간 몸만 자랐다니까. 정신 연령으로 따지면 선이가 더 어른일 거야.’

한차수에게 본의 아니게 큰 실수를 저지른 뒤, 백담은 내내 이 상태였다.

마음이 복잡한지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그렇다고 의료 센터로 가서 한차수에게 미안하다 사과도 못 하고.

그런 주제에 경과보고는 듣고 싶은지 의료 센터를 들들 볶는 건 잊지 않았다.

“에휴. 언제 철이 들려나.”

한숨을 내쉰 서정희가 백담의 머리를 가볍게 헝클어트렸다. 정신 좀 차리라는 의미가 담긴 손길이었다.

물론 그걸 곧이곧대로 받아들이면 백담이 아니었다.

“심심해서 온 거면 딴 데 가시죠. 저 바쁘거든요.”

그나마 상대가 서정희이기에 공손한 어조였다. 하지만 성질머리가 어디 가겠는가. 삐죽거리는 눈빛에 서정희가 한심하다는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짜증 낼 힘이 있으면 가서 사과나 하면 되지. 그걸 못 해서 이러고 있다니.

자식이나 다름없는 녀석이었지만 이런 놈을 누가 주워 갈까 참 걱정이 됐다.

“넌 그냥 혼자 살아라.”

“…오늘따라 다들 왜 이러지? 누가 공기에 독이라도 풀었나?”

아니면 단체로 정신이 나갈 리가 없을 텐데.

혼자 중얼거리는 백담의 눈이 핸드폰에서 떠나지 않았다.

현재 시각은 오후 4시. 한차수에 대한 보고가 와도 진작 왔어야 할 시간.

그런데 오늘따라 유독 소식이 없었다. 잠잠한 화면을 바라보는 연한 갈색 눈동자에 노기가 서렸다.

‘…이것들이 슬슬 해이해지네?’

발길 좀 끊었다고 자신이 만만해지기 시작했나 보다. 까득. 잇새로 살벌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상한다.”

서정희가 물려 주는 과자를 아드득아드득 씹은 백담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그때였다.

우우웅-

진동하는 핸드폰을 순식간에 낚아챈 백담이 전화를 받았다. 서정희가 별꼴을 다 본다는 얼굴로 혀를 찼다.

“당신 목소리 듣고 싶은 거 아니니까 메시지로 보내라고- 뭐?”

백담이 사나운 얼굴로 눈을 치떴다.

“한차수 씨에게 무슨 일이 생겼나 보네.”

“…가상 던전에 휘말렸대요. 관리국 새끼들이 일을 제대로 안 해서! 안 그래도 연약한 인간인데 무슨 일이 생길 줄 알고, 씨발!”

백담이 거칠게 외투를 집어 들며 뇌까렸다. 눈앞에 상대가 있다면 바로 목을 졸라 버릴 기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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