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화
“아아.”
한차수의 말을 들은 기태연이 낮은 신음을 터트렸다.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이었다.
‘뭐지?’
예상치 못한 반응에 한차수가 눈썹을 치켜올렸다. 기태연이 안타깝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이걸 어쩌나. 한차수 헌터 말이 맞긴 한데, 반만 맞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공략 실패가 뜨려면 일단 보스 룸까지는 가야 하거든요.”
“…예?”
“그 전까지는 죽고 싶어도 죽을 수가 없습니다. 시스템상으로 그렇게 만들어 놨어요.”
기태연이 귀찮아 죽겠다는 얼굴로 말했다. 한차수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보스 룸에 진입하기 전까지는 죽을 수가 없다니. 무슨 그런 쓸데없는 제약을 걸어 놨단 말인가?
한숨을 삼킨 한차수가 기태연을 훑었다. 혹시나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닌가 싶어서였다.
하지만 그런 기색은 없었다. 오히려 기태연은 윗선의 기조에 없던 정도 사라졌다는 태도였다.
“한차수 헌터는 복지 좋은 대형 길드라서 모르겠지만 나랏돈 먹는 곳은 원래 이럽니다. 쓸데없는 데 낭비하는 걸 엄청나게 싫어하거든.”
몬스터의 구현과 던전의 생성은 비용 단위 면에서 차원이 달랐다. 투입한 자원 대비 최대한의 효율을 내고 싶은 건 당연한 일.
“테스트용 던전을 처음 만들었을 때 개발실 애들이 들어가자마자 몰살당해서 아무 데이터도 못 건졌거든. 그것 때문에 본부장이 한바탕 지랄 떤 이후로 최소한 보스 룸까지는 진입한 뒤에 던전을 나올 수 있게끔 바뀌었습니다.”
“…그런 일이 있었군요.”
하긴 기태연처럼 일하기 싫어하는 사람이 쉽고 빠른 퇴근길을 놓고 어려운 길을 선택할 리가 없지.
한차수는 기태연과 처음 만났던 날을 떠올렸다.
“지금이라도 한차수 헌터가 작당했다고 말해 주면 알아서 잘 손질해 줄게요.”
다짜고짜 사람을 납치한 주제에 자백하면 빨리 끝내 주겠다며 헛소리를 지껄이지 않았나. 그만큼 일하는 걸 귀찮아하는 사람이니 그의 말은 진실이리라.
‘아쉽게 됐군.’
빠른 퇴근에 한 손이라도 보태 주려 했는데 말이다.
한차수는 인벤토리 창에서 꺼낸 단검을 허리춤에 달며 한숨을 내쉬었다.
이렇게 된 이상 기태연을 보조하며 보스 룸까지 나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쩔 수 없군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부탁은 내 쪽에서 해야지. 혼신의 힘을 다해 지켜 드릴 테니 나가서 잘 좀 부탁합시다.”
“알겠습니다. 그럼 슬슬 갈까요.”
“씩씩하고 좋네.”
부기가 가라앉은 손목을 매만지며 기태연이 장난스레 웃었다.
한차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에 일순간 어둑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걱정한 것치고는 잘 넘어갔군.’
보스 룸에 도달하기 전까지 아무리 죽어도 공략 실패가 뜨지 않는다는 말은 진짜였다.
사망 횟수가 열 번을 넘어가면 이야기가 달라지지만.
‘아무리 비용이 아깝다 한들 그 정도로 가망 없는 놈들을 계속 굴리지는 못하지.’
고로 보스 룸에 진입하기 전 사망 횟수를 열 번 채울 시, 공략은 실패로 판정. 참가자들은 던전에서 강제로 방출된다.
하지만 기태연은 끝까지 그 사실을 한차수에게 알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피가 남긴 힘을 거의 다 걷어 냈다지만… 정신도 회복했을지는 장담할 수 없어.’
한차수의 정신은 몹시 연약했다. 최근 들어 괜찮은 모습을 보이고 있지만 낙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이미 한 차례 자살 시도를 했던 전적이 있지 않은가.
그런 이에게 죽음의 경험을 새길 수는 없었다.
비록 그것이 현실이 아닌 가짜라 하여도.
***
한편, 트레이닝 룸 안에서 예기치 않은 이변이 발생했을 때. 한차수를 위해 제어실에 모여 있던 의료진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저게 뭐야?”
바닥을 뚫고 솟아오른 불길한 검은 기운. 그것은 마치 의지를 가진 것처럼 한차수를 향해 움직였다.
“안 돼-!”
“한차수 씨!”
의료진이 반사적으로 비명을 내지름과 동시에 기태연이 그를 감쌌다.
불길한 기운이 안개처럼 사방으로 흩어진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푸른 안개. 먹구름처럼 몸집을 불린 기운은 순식간에 트레이닝 룸을 가득 메웠다.
“미친.”
“방금 그거 뭐야, 도대체 뭐냐고!”
의료진은 바로 개발실 직원들에게 달려갔다.
앞서 트레이닝 시스템 가동 전, 그들은 시스템 진행 과정에 대한 교육을 받았다.
하지만 안전 수칙에도, 주의 사항에도 이런 상황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갑자기 바닥에서 솟아오른 안개가 한차수를 덮치다니?
‘뭔가 잘못된 게 틀림없다.’
의료진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다. 그에 대한 책임 소재 또한 분명했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똑바로 설명해.”
의료진들의 눈에서 형언할 수 없는 분노가 새어 나왔다.
“설명과 동시에 원상태로 돌리는 데까지 딱 1분 주겠어. 1분 안에 우리를 납득시키고 한차수 씨 데려와. 그렇지 않으면….”
의료진의 손에 들린 큼지막한 주사기가 섬뜩한 빛을 발했다.
“연구동은 오늘부로 개발실 공동묘지가 될 거다.”
“자, 잠깐만!”
자칫 잘못하면 단체로 생을 마감하게 될 위기에 개발실 부실장이 다급히 나섰다.
“위험한 거 아니야. 한차수 씨 멀쩡해! 진정 좀 해 봐!”
“변명부터 하다니, 죽어야 정신을 차리겠군.”
“악, 설명할게. 저건 뭐라고 해야 하나, 그, 그래. 불규칙 게이트 같은 거야. 던전 만들 때 나오는 이펙트 같은 거라고!”
“제대로 설명해.”
의료진의 입에서 싸늘한 대꾸가 튀어나왔다. 이어 서정민이 다급히 물었다.
“지금 던전이라고 했습니까? 한차수 씨가 던전에 휘말린 거라고요?”
“그, 그래요. 그동안 시스템 안에서 던전을 구현하느라 이것저것 많이 시험해 봤는데, 가끔 저렇게 검은 기운이 뿜어져 나올 때가 있더라고. 독 안개라거나 진짜 균열이 생긴 건 아니니까 다들 흥분 좀 가라앉혀.”
“그게 위험한 게 아니라면 위기관리실 실장님은 왜 한차수 씨를 감싼 겁니까?”
서정민이 추궁하듯 물었다.
그를 비롯한 의료진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안개가 솟구쳐 오르며 한차수를 덮치려던 순간, 그를 향해 몸을 날린 기태연을 말이다.
“아, 그건… 흠, 이런 말 해도 되려나 모르겠는데. 한차수 헌터 정신 때문에 그럴걸?”
“뭐라고요?”
되묻는 목소리가 몹시 날카로웠다. 부실장은 잠시 미간을 찌푸렸다. 어디까지 설명해 줘야하냐는 듯 귀찮은 얼굴이었다.
“환각 심장에서 뽑아낸 힘이라서 그래. 정신이 약한 사람이 직격으로 맞으면 한동안 다들 이렇게… 되더라고.”
부실장이 손가락으로 머리 옆에 작은 원을 그렸다. 의료진들 사이에서 헛숨 삼키는 소리가 났다.
환각 심장의 힘으로 미칠 수도 있다는 뜻 아닌가.
“그때 미친 애들 데리고 나오느라 엄청 힘들었어.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시간 지나니까 또 추억이더라고. 그렇지 않… 음. 내가 너무 말이 많았나?”
어느새 의료진은 얼음장 같은 눈으로 부실장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말은 사전에 없었잖습니까.”
“일부러 숨긴 겁니까? 위험성을 알고도 한차수 헌터를 들여보낸 거예요?”
“아아니, 우리가 미쳤어?”
부실장이 정색했다.
“들어가기 전에 착용한 손목 기기에 정신적 충격을 완화하는 술식을 새겼어. 동조율 맞추기 위해서 먹은 포션에도 저항력을 높이는 약물이 들어갔고.”
“하….”
“걱정할 만한 일은 없을 테니 다들 흥분 좀 가라앉혀. 우리도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알아볼게.”
부실장은 손사래를 치며 대화를 마무리 지었다. 의료진은 아직도 불만에 찬 얼굴이었으나 어쩔 수 없었다.
트레이닝 시스템 제어는 어디까지나 개발실의 권한. 전문가인 그들의 도움이 있어야만 한차수가 무사한지 확인할 수 있었다.
‘괜히 들들 볶았다가 일을 그르칠 수는 없지.’
의료진은 체념하듯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되도록 빨리 그쪽하고 연락을 취해 주시죠. 그동안 우리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으니까요.”
“마음대로 해. 그렇게 걱정 안 해도 지금쯤이면 슬슬 던전 안에서 눈뜨고 있을 거야. 이쪽에서 먼저 연락 취하지 않아도 아마 긴급 탈출 요청이 미친 듯이 들어올걸?”
부실장이 팔랑팔랑 손을 흔들며 자리로 돌아갔다.
의료진은 일단 상황을 지켜보며 대응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반은 여기 남아서 상황 전달하고 반은 트레이닝 룸 앞에서 대기하자. 센터장님한테는 내가 직접 보고드릴 거고….”
그러나 서정민은 지켜만 보고 있을 생각이 없었다.
“전 따로 가동실 근처를 살피고 오겠습니다. 혹시 모를 일이니까요.”
시스템의 핵인 환각 심장이 있는 가동실은 트레이닝 룸 아래층에 위치해 있었다.
먼 길도 아니니 한 번쯤 확인해 보고 와도 괜찮으리라.
“…그래, 개발실만 바라보고 있을 수는 없지. 믿음직한 녀석들도 아니고. 그럼 나랑 같이 갈까?”
“아뇨. 괜찮습니다. 이럴 때 일하라고 온 사람들이 있으니까요.”
서정민이 출입문 쪽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를 따라 고개를 튼 이들의 입에서 작은 감탄사가 튀어나왔다.
기태연이 데려온 위기관리실 요원들.
인성은 모르겠으나 실력에 있어선 대형길드 간부진 못지않은 이들이 심각한 얼굴로 한데 모여 있었다.
거기다 더해 서정민에게는 마지막 한 수가 남아 있었다.
‘도련님한테도 말씀드려야겠군.’
메시지를 입력하는 서정민의 손이 바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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