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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72화 (72/113)

72화

시스템에 돌입하고 한차수는 오랜만에 아무 생각 없이 몸을 썼다. 그게 무슨 말이냐 하면.

[ 경고! ]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 페널티가 랜덤으로 정해집니다. ]

[ 상태 이상 ‘이명’에 걸렸습니다! ]

어쩌라고.

기태연과의 트레이닝이 생각보다 즐거워 페널티 따위는 가볍게 무시했다는 말이었다.

끼이이잉—!

머리를 울리는 이명에 이를 악문 한차수가 바닥을 박찼다.

통각 동조율이 20%밖에 안 돼서 괜찮을 줄 알았더니 페널티는 원래대로 적용되는 듯했다.

후우욱!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밀려오는 바람. 그와 동시에 머리 위로 뭔가 떨어져 내렸다.

“큭…!”

몸을 굴려 무릎을 세우기가 무섭게 고막을 꿰뚫는 목소리.

“어깨가 좀 굳어 있긴 하지만 제법입니다, 한차수 헌터.”

둔탁한 충격이 오른쪽 어깨를 강타했다. 젠장, 아까 전에는 허벅지더니. 한차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트레이닝 겸 치료라는 걸 톡톡히 맛보게 해 줄 생각인 걸까. 기태연에겐 자비가 없었다.

일격을 맞은 자리로 거센 물길처럼 거침없는 힘이 파고들었다. 기태연을 닮아 차갑고 성마른 기운. 그것은 혈관을 맹렬하게 내달리고선 순식간에 빠져나갔다.

“하….”

아직도 익숙지 않은 감각이었다. 그래도 불쾌하지는 않았다.

계속 일방적으로 얻어맞고 있지만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으니까.

트레이닝 시스템이 기태연의 근력과 힘을 자신과 동일한 수준으로 맞춰 준 덕이었다.

반면 기태연의 통각 동조율은 200%였다. 맞으면 배로 아프다는 뜻이었다. 아마 개발실의 수작 같은데…. 딱히 의미는 없었다.

기태연이 제 손에 잡혀 주지를 않았으니까.

“후우….”

“언제까지 그러고 있으려고.”

무너진 자세를 추스르며 타이밍을 노리는데 가까이서 기척이 느껴졌다. 오른편에서 느껴지는 바람.

곁눈에 빛살 같은 궤적이 잡혔다. 시야 끄트머리에 보이는 검은 무언가. 한차수의 눈에 벼락이 쳤다.

기태연이 여유로운 얼굴로 그를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강자다운 태도였다.

하지만.

‘옆이 비었어.’

상대는 자신을 내리친 팔을 회수하지 않았다. 팔꿈치가 뒤로 한껏 빠진 게 보였다.

‘지금!’

기회를 포착한 한차수는 재빠르게 오른발을 땅에 박았다. 무너진 자세를 역으로 이용해 상대의 빈틈을 노리는 것이다.

아래에서 위로, 직선이 아니라 대각선으로 올려치듯이.

손에 쥔 건 칼이 아니라 삼단봉이었지만 괜찮았다. 회전력이 더해지면 파괴력은 그에 못지않으리라.

한차수가 손아귀에 단단히 힘을 준 순간이었다.

탕!

“어쭈.”

“쯧.”

아쉬움에 저도 모르게 혀를 차버렸다. 손끝에서 느껴지는 거센 반발력. 수를 읽힌 것이다.

때를 놓치지 않고 페널티가 날아들었다.

[ 경고! ]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 페널티가 랜덤으로 정해집니다. ]

[ 상태 이상 ‘경련’에 걸렸습니다! ]

“큭…!”

한차수는 그대로 사지에 힘을 주며 버텼다.

‘이럴 줄 알고 포션을 챙겨 왔지.’

덜덜 떨리는 손으로 신체 강화 포션 열 통을 비웠다. 체력 포션은 덤이었다.

“하아….”

한결 살 만해지자 맞은편에 선 기태연이 보였다.

“제법 하는데요, 한차수 헌터?”

다섯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기태연이 가볍게 웃었다. 햇볕을 받은 수면처럼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그 안에 담긴 순수한 열기에 한차수는 저도 모르게 피식 웃었다.

‘혼자만 즐긴 줄 알았는데 아니었군.’

다행이다. 아직도 파르르 떨리는 팔을 틀어쥐며 한차수가 말했다.

“실장님이 봐주시는 덕분입니다.”

“맞는 말이긴 한데…. 부하한테도 들어 본 적이 없는 말이라서 그런가. 좀 어색하네요.”

한차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기태연이 어색해하거나 말거나, 그는 한창 들뜬 상태였다.

‘이 세상에 빙의한 뒤로 가장 기분 좋은 날이군.’

손바닥에서 느껴지는 아릿한 통증. 살갗으로 느끼는 상대의 적의.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과 긴장으로 단단해진 근육.

이 생생한 감각을, 본능을 일깨우는 자극을 얼마나 그리워했던가.

“후우….”

한차수는 제자리에 서서 손을 쥐었다 폈다. 달아오른 피가 온몸으로 퍼지는 게 느껴졌다. 머리를 달군 열기가 발끝까지 간지럽혔다.

살아 있음을 이보다 확실하게 느낄 수 있는 순간은 없으리라.

“잠깐 쉬겠습니까?”

“그러죠.”

고개를 끄덕이자 뭔가가 휙 날아왔다. 이온 음료였다.

“앉읍시다.”

분명 다섯 걸음 이상 떨어져 있었건만, 어느새 그의 목소리가 귓가에서 들렸다. 음료수 캔의 차가움을 즐기던 한차수는 슬쩍 고개를 돌렸다.

기태연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기척을 느끼지도 못했다.

‘방금 전에는 나한테 맞춰 준 거였군.’

하긴, 능력을 봉인하고 자신에게 맞춰 능력치까지 조절했다고는 하나 그는 S급이었다.

몸에 새겨진 전투 감각과 본능에 가까운 실력을 감출 수 없다는 뜻이었다.

‘대련 상대로 아주 적합해.’

길드를 퇴사하고 잠적한 뒤에 이런 상대를 찾는 건 힘들겠지.

복숭아 맛 이온 음료를 단번에 비워 내며 한차수는 아쉬워했다.

때마침 기태연도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생산계치고는 몸놀림이 제법이야. 전투 계열이 아닌 게 아쉽군.’

명백한 호기심을 담은 눈이 한차수를 응시했다.

트레이닝 시스템에 돌입한 지 대략 15분. 아무리 능력치를 동일한 수준으로 설정했다고는 하나 이 정도의 접전은 예상치 못했다.

‘대형 길드에서는 사무직도 분기별로 모의 훈련에 참가시킨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천령 길드도 그중 하나인지는 잘 모르겠다. 길드 분위기가 강제적이지 않은 걸로 봐서는 아닐 가능성이 크고.

‘그럼 정말 타고났다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아쉬운 인재를 놓친 거나 다름없었다.

공격을 받았음에도 놀라지 않는 침착함. 자세가 무너져도 당황하지 않고 바로 대응에 나서는 빠른 상황 판단 능력.

거기다 더해 쉽게 꺼지지 않는 투지까지.

제 밑으로 들어왔으면 하는 부하 직원의 요소를 빠짐없이 갖추고 있지 않은가.

“아, 아프지만 않았어도….”

“예?”

“혼잣말입니다, 혼잣말.”

한차수 정도의 재능이면 실장 자리를 넘기기에 딱인데. 어떻게 안 되려나.

아쉬움을 뒤로하고 기태연은 한차수의 어깨를 가볍게 짚었다.

며칠 전과 달리 그에게선 제 기운이 거의 묻어 나오지 않고 있었다.

‘효과가 있긴 하군.’

온몸 구석구석 기운을 강하게 밀어 넣고 회수하기를 수차례. 그때마다 제 피가 남긴 잔여물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이제 남은 건 거의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

왜인지 모를 아쉬움에 인상을 찌푸리는 순간이었다.

후우욱-!

돌연 허공에서 무언가가 빠른 속도로 떨어져 내렸다.

“음?”

“저건 또 뭔….”

처음에는 파란 점인 줄 알았다. 그다음에는 넙적한 공책. 그러다 문득 저게 뭔지 알아차렸다.

“매트리스?”

“정확히 실장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 같습니다만.”

“감히 누굴 골로 보내겠다고.”

기가 차다는 듯한 웃음과 함께 기태연이 몸을 일으켰다. 손에는 어느새 삼단봉이 들려 있었다.

한차수가 뒤늦게 제 무기를 빼앗겼다는 걸 깨달은 찰나.

퍼어어억-!

삼단봉이 섬광 같은 빛을 흩뿌리며 매트리스의 옆구리를 정확하게 가격했다.

“홈런이지.”

그의 말대로 매트리스는 완벽한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갔다. 그러고도 모자라 바닥에서 다섯 바퀴를 구르고 나서야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손목에 찬 밴드에서 목소리들이 터져 나왔다.

-아니 그걸 왜 날려 보내세요? 한차수 씨 앉으라고 보낸 건데!

-한차수 씨 화이팅! 기 실장을 나락으로 보내 버려요!

-넌 뭔데 부탁이야? 아이템 궤도 설정한 거 너 아니야? 양심 어디 갔어?

-아 좀 봐줘라, 나도 이런 소소한 즐거움은 있어야지!

-한차수 헌터, 혹시 회복 포션 필요하시면 머리 위로 동그라미이이!

귓가를 쩌렁쩌렁 울려 대는 소리에 한차수는 단번에 통신을 끊었다. 얼얼한 귓가를 감싸는데 놀리는 듯한 목소리가 들렸다.

“엉덩이 시린 것도 걱정해 주고, 이야. 의료 센터 애들이 아주 지극정성이네요. 지극정성이야.”

“…제가 자주 아파서 그런 겁니다.”

“한차수 헌터 환자인 거 몰라서 하는 말 아닙니다.”

에너지바를 건넨 기태연이 매트리스를 슬쩍 건너다보며 말했다.

“힘들면 모셔다 드릴 수도 있고.”

“됐습니다.”

“얼굴이 아직도 창백한데요? 입술도 떨리는 것 같고.”

서늘한 손이 입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턱에 먼지가 묻어서 떼 준 거니까 그런 눈으로 보지 맙시다. 자, 팔은 이쪽으로 주시고.”

어서 기대라는 듯 기태연이 손을 뻗었다. 한차수는 인상을 찌푸렸다.

여기서 기태연한테 도움을 받으면 의료진이 뭐라고 생각할지 뻔했다. 아프면 어서 빨리 나오라고 난리를 치겠지.

“그 정도로 힘들지는 않습니다.”

한차수는 단호히 거절한 뒤 포션을 들이켰다. 의료진에게 보이지 않을 위치였다.

그때였다.

“…!”

살갗을 저미는 날카로운 살의. 등골에 오싹 소름이 돋고 무기를 틀어쥔 손등에 핏줄이 솟는다.

‘갑자기 무슨.’

설마 제어실에서 고위 등급 몬스터를 출현시켰나?

하지만 개발실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럴 리가 없다. 기태연한테 죽고 싶은 게 아니라면….

다음 순간, 한차수는 자신을 향해 팔을 뻗는 기태연을 발견했다.

“숙여!”

삐이이이이——!

동시에 귓가를 울리는 끔찍한 경고음.

그리고 세계가 격변했다.

새하얀 공간이 찢어지며 아래에서부터 검은 기류가 치솟아 오른 건 한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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