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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71화 (71/113)

71화

각성자 관리국은 아침부터 분주했다.

“연구동 준비는?”

“끝났습니다. 경호는 위기관리실 일곱, 집중안보실 다섯 차출하는 걸로 정리됐고요.”

“그렇게 기 싸움을 하더니 결국 안보실에서 양보했나 보네.”

“뭐… 의료 센터 일도 있었으니까요. 아무래도 위기관리실한테는 한 수 접고 들어갈 수밖에 없겠죠.”

한차수의 트레이닝 시스템 돌입을 위한 사전 준비 때문이었다.

“드디어 준비가 끝났군. 나 참, 별것도 아닌 걸로 이렇게 질질 끌다니.”

직원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본래대로였다면 진작에 시작했어야 할 일이건만 본부장이 미적거리느라 늦어졌다.

혹시나 한차수에게 또 사고가 생겨 자신이 책임져야 할까 사린 탓이었다.

그러다 얼마 전, 본부장은 백담으로부터 살벌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당장 약속대로 이행하지 않으면 관리국을 좀비 소굴로 만들어 주겠다는 말에 그는 결국 두 손을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대로는 아무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는 게 당연한 일. 본부장은 바로 집중안보실과 위기관리실에 제 뜻을 전달했다.

“두 부처에서 협의하여 트레이닝 시스템 경호 인력을 선발할 것. 10명 이상, 15명 이하 뽑되 최고의 실력자들만 참여해야 한다.”

그렇지 않아도 항상 서로를 못마땅해하던 두 부처였다. 본부장의 공문은 도화선에 불을 붙인 거나 다름없었다.

“이거 누가 더 많은 인원을 보내는가로 어디가 더 실력자인지 가려지는 거 아냐?”

“당연히 전부 위기관리실에서 뽑혀야지. 허구한 날 국회의원 뒤에서 점잔 빼는 것밖에 못하는 안보실에 실력자는 무슨.”

그리하여 한차수가 여유롭게 지내는 동안, 위기관리실과 집중안보실의 맹렬한 물밑싸움이 벌어졌다.

“소중한 환자를 지키기는커녕 쓰러지게 하는 데 일조한 놈들이 이제 와서 어디다 발을 뻗어? 양심도 없냐?”

“너네 상사한테도 없는 걸 왜 우리한테 찾아?”

아니, 사실 대놓고 싸웠다 해도 할 말 없었다.

두 집단은 앞에서는 으르렁거리고 뒤에서는 수작을 부렸다. 물론 주로 안보실이 일방적으로 수작을 부리다 걸리는 형세였지만.

“너 지금 여기서 뭐 하냐?”

위기관리실은 하루에도 몇 번이나 짐꾼을 자처하며 연구동을 들락거리는 안보실 직원을 잡아냈다.

자기네들 딴에는 힘들어 보여서 도와준 것뿐이라지만 웃기지도 않는 소리였다.

안보실이 얼마나 바쁜지는 관리국의 모든 이가 알았다. 안팎으로 영향력을 확대하기 위해 별의별 일에도 동원되는데, 겨우 개발실 직원 짐 나르는 데 신경 쓸 여유가 있을 리 없었다.

“지금 안 가면 실장님 불러온다.”

“실장님은 너희만 있는 줄 아냐?!”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실장의 실력 차이는 현격했다. 심지어 근래에 안보실장이 위기관리실장에게 두 번이나 대패했으니, 기세 싸움에 밀리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한차수의 발언도 한몫했다.

어느 화창하고 평범한 오전.

한차수는 센터장의 협박 같은 권유로 상담 센터 뒤편의 산책로를 거닐고 있었다. 안보실 직원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은 건 그때였다.

“안녕하세요, 한차수 헌터. 안보실에서 왔습니다.”

안보실에서 한차수를 찾아온 이유는 당연히 하나였다. 위기관리실장인 기태연과 두터운 친분을 가진 한차수. 그로 하여금 일방적으로 위기관리실을 지지하지 못하게 하는 것 말이다.

그런데 일이 이상하게 흘러갔다.

안보실 직원들을 바라보는 한차수의 표정이 묘했다.

“제가 트레이닝을 받는 동안 경호를 서시게 되었다고요….”

“예, 그래서 말인데.”

“그렇군요.”

일이 잘 풀리나 싶었던 안보실 직원들은 다음 순간 얼어붙었다.

“그러면 안보실 직원분들께는 중간 경호를 부탁드리고 싶습니다. 근접 경호만큼 중요한 게 불안 요소를 제어하는 것 아닙니까.”

“네?”

“어차피 트레이닝 룸에 들어오지 못하는 건 위기관리실과 안보실 모두 동일하니 큰 문제는 아니라고 봅니다.”

사실 따지자면 맞는 말이기는 했다. 제어 공간은 시스템이 가동되는 동안 완벽히 격리되니까.

하지만 당황스러운 건 어쩔 수 없었다.

‘중간 경호라고? 그런 경호 용어는 어디서 주워듣고….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지.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생각보다 만만치 않은 성격인 듯하다. 하긴 수차례 퇴짜를 놓을 때부터 알았어야 했는데. 안보실 직원들은 저들끼리 눈빛을 주고받았다.

곧 안보실 직원 중 한 명이 따지는 듯한 투로 외쳤다.

“저희 실력을 믿지 못하시는 겁니까? 개개인의 기량으로 따지면 안보실이 더.”

한차수가 고개를 저어 상대의 말을 끊었다.

“오히려 안보실 직원분들의 실력을 더욱 믿기에 드리는 부탁입니다.”

“아니, 그게.”

“옥상 정원에서의 활약 전해 들었습니다. 의료 센터장님의 부탁에 한걸음에 달려오셨다고요.”

“…….”

“의료 센터장님께서 여러분의 실력을 믿지 않으면 그런 부탁을 하지도 않으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제 말에 틀린 점이 있습니까?”

“음….”

안보실 사람들의 얼굴에 곤란함이 어렸다. 사실 그날 일은 서로에게 껄끄러운 사안이었다.

한차수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딱히 도움이 되지도 않았으니까.

그래서 일부러 언급하지 않았던 건데, 한차수가 먼저 화제로 삼을지는 몰랐다.

게다가 그걸 가지고 꼬투리를 잡기는커녕 칭찬의 수단으로 삼다니. 안보실 직원들의 눈빛이 복잡해졌다.

자신들의 뜻대로 일이 흘러가고 있지 않다는 걸 느꼈기 때문이다.

그들의 예상은 정확히 적중했다.

“아예 가까이 다가오지도 말라는 말은 아니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한… 10미터 거리면 괜찮을 것 같습니다. 그 안쪽으로는 위기관리실이 맡아 주실 테니까요.”

밀착 경호는 위기관리실이 맡고 그 이상은 집중안보실이 맡는다.

한차수는 깔끔하게 거리까지 지정해 주고선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보실 직원들은 다급해졌다.

“잠깐만요, 한차수 헌터. 다시 한번 생각해 줄 수는 없습니까? 2~3미터도 아니고 10미터라뇨. 그건 너무 먼….”

한차수에겐 나름대로 이유 있는 거리였지만 안보실이 알 리 없었다. 그들이 구차하게 한차수를 붙잡으려 할 때였다.

“아픈 사람 억지로 붙잡고 떼쓰는 건 한 번으로 만족하시죠.”

바람이라도 불면 날아갈세라. 한차수를 단단히 붙잡은 사내가 안보실 일동을 노려보았다. 안경 너머 날카로운 눈에 노기가 가득했다.

서정민이었다.

“한차수 씨가 당신네들 우는소리 받아 주라고 있는 사람도 아니고 뭐 하는 겁니까? 잘 보이고 싶었으면 진작에 왔어야지, 이제 와서 징징거리는 꼴 하고는.”

“말이 지나친 거 아닙니까?!”

“일부러 그날 옥상 정원으로 출동하지 않은 사람들만 추려서 데려온 걸 보면 그쪽도 나름 찔리는 게 있어서 그런 거 아닌가?”

안보실 직원들이 이를 꽉 깨물었다. 서정민의 혓바닥은 칼날처럼 그들을 난도질했다.

“기태연 실장이 한차수 씨를 위해 무릎 꿇을 동안 그쪽 실장은 벽에 처박혀 기절한 채로 혓바닥만 내밀고 있었다는 것도 쪽팔릴 만한 일이긴 한데… 진짜 쪽팔리는 건 이런 거지.”

“무슨.”

“위신 좀 세워 보겠다고 아픈 사람 붙드는 꼴이 참 보기 좋네.”

안보실 직원들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기태연의 빙결 능력에 당한 것처럼 꼼짝도 하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더 할 말 없나 보네요. 이만 가죠, 한차수 씨.”

“…그러죠.”

그렇게 한차수는 의료진에게 둘러싸여 자리를 떠났고 안보실 직원들은 패잔병처럼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리고 이야기를 전해 들은 안보실장은 펄쩍 뛰었다.

“중간 경호? 자기가 뭔데 우리한테 임무를 배당해?!”

상처입은 자존심은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기태연 곁에 있더니 나쁜 것만 물들었다며 안보실장은 이를 득득 갈았다.

그때, 누군가 기특한 아이디어를 던졌다.

“명단에 신입만 올리는 건 어떻습니까?”

그가 요즘 데리고 다니는 신입 직원이었다.

“각 부처에서 최고만을 선발하라고 하셨다면서요. 그렇게 하면 위기관리실의 베테랑과 안보실의 신입의 실력이 동등하다는 의미가 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너 이 녀석, 머리 꽤 쓰는구나!”

그렇지 않아도 본부장이 같은 날 외부 고위 인사가 들릴지 모른다며 언질을 준 참이었다. 이렇게 되면 실력 좋은 녀석들은 전부 고위 인사의 호위에 동원할 수 있으니 일석이조인 셈.

“좋아. 그렇게 하자. 나머지 네 명은 네가 통솔하고.”

“맡겨만 주시죠!”

그리하여 안보실장이 흐뭇해하고, 기태연은 비웃음을 금치 못한 경호 인력 명단이 완성된 다음 날.

“그럼 실전 돌입하겠습니다. 참가자를 제외한 인원은 모두 밖으로 나가 주십시오.”

“앞으로 3분간 시스템 적응으로 인해 울렁거림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만약 버티기 힘드시다면 바로 말씀해 주세요.”

고대하던 트레이닝 시스템의 서막이 밝았다.

한차수는 기태연과 마주 선 채 몸을 풀었다.

“오늘도 보호 장비 꼼꼼하게 챙겨 입고 왔네요, 한차수 헌터.”

“만에 하나라는 게 있으니까요.”

기태연이 그를 보며 피식 웃었다.

“생각보다 활동적이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한차수는 미처 알지 못했다.

치료 겸 몸 풀기로 생각했던 트레이닝 시스템이 어떤 결과를 불러일으킬지.

“그럼 슬슬 시작해 볼까요?”

그리고 누구를 만나게 될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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