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화
“안녕히 가십시오.”
언제나처럼 곧은 목소리가 등 뒤로 울려 퍼졌다. 정이흔은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움직여 병실을 나섰다.
‘이러면 안 되는데.’
짧은 접촉에 자꾸만 아쉬움이 남았다. 생각지도 못했던 제 안의 욕심에 정이흔은 속으로 혀를 찼다.
그때였다.
“지금 가세요? 한차수 씨는 만나고 가시는 거죠?”
“아.”
차트를 들고 지나가던 이가 불현듯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경 쓴 사내와 함께 한차수의 곁을 항상 지키는 의료진이었다.
정이흔은 상대와 시선을 맞추고선 고개를 끄덕였다.
“예. 더 있다간 괜히 피곤하게 만드는 것 같아 일찍 나오는 길입니다.”
“하긴 오늘따라 시끄러운 일이 많기는 했죠. 해태니 뭐니…. 한차수 씨도 정신없었을 거예요.”
한차수를 걱정하는 듯, 고집스러운 눈매가 아래로 살짝 처졌다. 정이흔은 흥미로운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한차수에 대한 의료 센터 직원들의 태도는 봐도 봐도 인상적이었다. 그에게 목숨을 구해진 것도 아니면서 마치 은인을 대하듯 굴었으니까.
‘그중에서도 금명결을 쫓아내는 모습이 가장 인상적이었지.’
옥상 정원에서 쓰러진 한차수가 병실로 옮겨지는 과정의 일이었다.
그날, 소식을 받고 도착한 정이흔은 금명결이 쫓겨나는 광경을 실시간으로 목격했다.
사유는 한차수에게 어떤 악영향을 줄지 모른다는 의료진 측의 주장이었다.
“한차수 헌터는 이미 한 번 회복 불가 저주에 걸렸던 몸입니다.”
그런 그에게 괴상한 기운을 흩뿌리고 다니는 저주술사가 어떤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며, 안경 낀 사내는 강력하게 그의 추방을 주장했다.
“내가 곁에 있으면 저주가 다시 터질지도 모른다고? 지금 장난하나?”
금명결은 말도 안 되는 트집이라며 항의했다. 억울할 만한 일이었다. 역병도 아니고 곁에 있는다고 없어진 저주가 다시 터질지 모른다니.
하지만 센터장은 제 사람들의 편을 들었다.
“환자의 안전을 위한 조치입니다. 만에 하나라는 가능성을 무시하고 환자를 위험에 빠트리고 싶습니까?”
“하….”
모든 게 한차수를 위한 것이라는 말에 금명결은 결국 물러나야만 했다.
하지만… 글쎄. 의료센터장이 그렇게 단순한 선의만으로 움직일 수 있는 자리일까.
정이흔은 호의 가득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의료진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습관적인 행동이었다.
“그럼 얼마 남지 않았지만 잘 부탁드립니다.”
그대로 떠나려 하자 의료진의 눈이 살짝 커졌다. 주위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그녀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저, 가시기 전에 뭐 좀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시죠.”
이어지는 속삭임은 집중하고 들어야 할 만큼 낮고 희미했다.
“길드장님이 오늘 가져오신 포션이 제작자 노이르의 물건이라는 말이 돌던데….”
“아아.”
정이흔이 난감한 듯 웃었다. 살짝 찌푸린 눈이 주변을 훑었다.
‘소문 한번 빠르군.’
상대는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의료진이 와, 하고 감탄사를 내뱉었다. 두 눈이 탐구열에 반짝였다.
“말도 안 돼. 진짜일 줄 몰랐어요.”
“센터 내에 소문이 났습니까?”
정이흔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의료진이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저었다. 한껏 낮춘 목소리로 그녀가 말했다.
“걱정하실 정도는 아니에요. 그냥 사람들끼리 심심할 때 화제 삼아 꺼내는 식? 믿는 사람도 거의 없을걸요.”
방랑자 노이르. 그는 길드에 소속되지 않고 세상을 돌아다니며 희귀한 재료를 수집한다는 S급 포션 제작자였다.
심지어 친분 없는 이에게는 물건을 팔지않다는 원칙을 끝까지 고수. 아무리 돈이 많은 이라도 그의 포션을 얻지 못해 쩔쩔매고는 했다.
‘그런 귀한 물건을 아무 대가 없이 턱턱 안겨 주다니.’
한차수가 의인이라면 정이흔은 다시없을 선인이라고, 의료진은 생각했다.
생명의 은인이고 뭐고 필요 없으면 던전 안에 내버리고 가는 게 그들이 사는 세상이지 않나. 한차수처럼 의로운 사람을 알아보고 귀하게 여기는 이는 얼마 없었다.
‘정민 씨는 그래서 더 수상하다고 했지만…. 하나뿐인 동생을 살려줬는데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거 아닌가?’
요즘 따라 더욱 한차수의 곁을 떠나려 들지 않는 서정민은 정이흔을 미심쩍게 여겼다. 아니, 사실 서정민은 한차수에게 치근덕대는 모든 S급들을 고깝게 봤다.
‘하지만 다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잖아. 특히나 정이흔은….’
그의 가정사에 대해 알고 있는 의료진은 정이흔의 편이었다.
천령 길드장이 부모를 여읜 건 그의 나이 20살. 다행히 법적 성인인 나이에 각성해 고아원에 갈 처지는 면했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인 건 명백했다.
그 후로는 뻔한 이야기였다.
20살짜리 S급 헌터를 노리는 이들은 많았다. 정이흔은 부모가 물려준 길드를 지키고 동생을 키우며 살아남고자 애썼다.
그렇게 악착같이 버텨 온 남자에게 동생이 가지는 의미란 다른 이들보다 더욱 클 것이다.
‘자식이나 다름없겠지. 아니, 그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는 않을 거야.’
의료진은 그와 비슷한 입장이었다. 대규모 게이트로 일가친척을 잃고 조카와 단둘이 살고 있으니까. 그녀는 정이흔에게 공감할 수밖에 없었다.
누군가 조카의 목숨을 구하고 대신 죽을 뻔했다면 아마 자신도 어떻게든 은혜를 갚으려 할 것이다.
“한차수 씨는 꼭 회복할 거예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한숨처럼 토해지는 목소리엔 진심이 담겨 있었다. 의료진은 가슴이 찡해 오는 걸 느꼈다.
“어서 빨리 건강을 되찾으면 좋겠군요. 저만 아니라 길드원들 모두 한차수 씨가 돌아오기를 목이 빠지게 기다리고 있는 터라….”
“그럴 만하죠. 아, 그, 여기서 얘기하는 게 좀 그러면 중간에 잘라 주세요. 저번에 의료 센터로 먹을거리 보낸 분들, 서리거인 던전 공략대원들 맞죠?”
정이흔은 말없이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의료진이 소리 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럴 줄 알았어요. 어쩐지 막 한차수 씨를 잘 부탁한다고 그러더라니까요.”
“다들 오랫동안 보지 못해서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거든요.”
“저라도 그랬을 거예요. 참… 이런 말 하면 안 되지만 한차수 씨는 너무 착해서 문제에요. 저도 한차수 씨가 센터 나간 뒤에 또 다른 일에 휘말릴까 하루 종일 걱정할 것 같다니까요.”
의료진의 한숨을 내뱉으며 한차수의 호구 같은 성품을 걱정했다. 정이흔이 묘한 웃음과 함께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그게 한차수 씨의 성격인 걸 어쩌겠습니까.”
한차수에 대한 판단은 잠정적 유보 상태였다. 아니, 사실은 의심을 내려놓지 못한 것이었다. 서흔이를 구하기 전의 그는 지금과 다른 모습이었으니까.
하지만 선입견은 곧 깨졌다.
한차수는 목숨이 경각에 달한 상황에서 백선을 위해 거리낌 없이 몸을 던졌다. 자신보다 건강하며 자가 회복이 가능한 힐러를 위해서 말이다.
첫 번째는 우연이라 해도 두 번째는 아니다. 정이흔은 천천히 머리를 쓸어 넘겼다.
‘위선이라도 괜찮아. 그걸 신념처럼 지키는 사람이면 선이나 다름없으니까.’
기만이라도 좋았다. 중요한 건 결과였다.
한차수는 이미 서리거인 던전에서 서흔이를 비롯한 많은 생명을 구했다. 대가 또한 욕심내지 않았다.
그로 인해 이진렬의 의심을 샀지만 백선을 구함으로써 그 또한 타파했다. 무화의 흔적을 지우는 능력이 있다는 걸 알고 이진렬은 금세 입장을 바꿨고.
‘얼른 건강해져야 할 텐데.’
물론 화기를 가라앉히는 능력 때문은 아니었다. 무의식중에 자꾸만 끌어안고 싶어질 만큼 매혹적이기는 했으나… 동생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정이흔이 한차수를 바라는 이유는 오직 정서흔을 위해서였다.
낯선 타인을 위해 거리낌 없이 희생하는 남자. 자신보다 강한 이를 두고도 선뜻 몸을 내던지는 사람.
만약 그런 사람이 제 동생에게 정을 붙인다면 어떻게 될까. 가족처럼, 부모처럼, 형제처럼 서흔이를 생각하게 된다면?
‘서흔이가 위험할 때 곁을 지켜 주겠지.’
정이흔은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걸 알고 있다. 그래서 자신이 떠난 뒤 동생의 곁을 지킬 사람을 원했다. 정직하고 진솔하며 욕심 없는, 한차수 같은 사람을.
그래서 억지인 걸 알면서 붙잡았다. 그가 제 동생 곁에 머물러 주기를 바랐다. 천령 길드에 남아 정을 붙이고 끝내 동생을 소중한 사람으로 받아 주길 원했다.
언젠가 그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말이다.
같은 시각.
의료 센터로부터 멀리 떨어진 도심 외곽, 나무로 둘러싸인 한적한 저택 창가에 누군가 기대어 있었다.
“도련님!”
창백한 낯의 청년을 본 이가 서둘러 그를 향해 다가왔다. 두꺼운 옷을 추스른 사내가 이크 소리를 내며 어깨를 좁혔다.
“어디 계신가 했더니 또…! 이럴 거면 차라리 그냥 말이라도 하고 가시던가요. 왜 자꾸 따돌리시는 겁니까?”
“그야 여기는 내 추억의 장소니까 그렇지.”
“예?”
“추억을 온전히 느끼려면 어쩔 수 없었어.”
잔잔한 미소와 함께 답한 청년이 물었다.
“그래서, 진척 사항은?”
“…기억을 잃은 게 확실한가 봅니다. 그게 아니면 아예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다고밖에 할 수 없다더군요.”
특별히 달라진 모습이 없었다고, 사내는 덧붙였다.
“아.”
보고를 받은 청년은 환히 웃었다.
“다행이다. 그러면 삼촌들도 더는 반대하지 않겠네.”
“바로 가실 겁니까?”
“기억이 없다며. 놀라게 할 수는 없지. 그리고 첫 만남에는 좋은 인상을 줘야 하니까… 준비를 잘해야겠어.”
창문을 돌아보는 청년의 낯이 햇살처럼 밝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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