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화
정이흔은 정에 굶주린 아이처럼 굴었다. 그래서였다. 한차수가 그를 떼어 놓지 못한 건.
“한차수 씨가 우리 길드원이라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정말… 어떻게 당신 같은 사람이 우리 길드에 와 준 건지. 말로 다할 수 없습니다.”
있는 힘껏 껴안는 팔과 귓가에 속삭이는 다정한 음성.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간절하기까지 한 태도에 한차수는 쉽사리 그를 밀어낼 수 없었다.
등을 마주 안은 손이 어색한 온기에 움찔거렸다.
‘설마 선물 때문에 이러는 건가.’
제 돈을 주고 사서 보낸 것도 아닌데 이렇게 기뻐하니 괜스레 마음이 불편했다. 마치 아이를 속이는 음흉한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저, 길드장님.”
“고맙습니다, 한차수 씨. 정말로 고마워요.”
정이흔은 반쯤 정신이 나가있는 듯했다. 몇 번이고 불러도 그는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하아….”
오히려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줄 뿐이었다.
“윽.”
몸이 거의 짓뭉개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한 힘. 한차수는 반쯤 포기한 얼굴로 그의 등을 토닥였다.
‘덩치 큰 어린애는 여기도 있었군.’
해 본 적 없던 일도 아니라 그는 능숙하게 정이흔을 달랬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뜨거운 숨결에 슬슬 목덜미가 간지러워지는데 문이 열렸다.
“한차수 씨, 체력보충제 드실 시간입….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이제껏 들어본 것 중에 가장 싸늘한 음성이었다. 한차수가 놀란 눈으로 서정민을 바라보았다.
안경 너머로 보이는 눈동자가 압정처럼 뾰족했다. S급이 무섭지도 않은 건지 그는 단번에 달려와 정이흔의 어깨를 꽉 쥐었다.
“천령 길드장님.”
“아.”
“쫓겨나고 싶으신 게 아니라면 그쯤 하시죠.”
한차수는 그제야 겨우 정이흔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미안합니다. 이럴 생각은 없었는데.”
정이흔이 쑥스러운 듯 고개를 떨구며 읊조렸다.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있죠.”
말하면서도 한차수는 얼떨떨한 얼굴이었다. 붉게 달아오른 정이흔의 뺨이 자꾸만 시선을 잡아챘다.
‘젠장.’
쑥스러워하지 말라고, 내가 더 심란하니까.
‘이젠 어린애도 아닌데.’
뺨 한 번 비볐다고 동요하다니. 자신도 아직 멀었다.
입 속으로 작게 욕설을 내뱉은 그는 서정민이 갖다 준 사탕을 세게 깨물었다. 그는 사탕을 꼭 먹으라는 당부와 함께 정이흔을 마지막으로 노려보고 자리를 떠난 참이었다.
으득.
상큼한 향기와 새콤한 시럽이 입 안을 가득 메웠다. 당분이 들어가서일까. 약간이지만 몸에 활기가 돌았다. 어째선지 용기도 좀 나는 것 같고.
“선물이 도움이 된 것 같아 기쁘네요. 모쪼록 잘 사용해 주셨으면 합니다.”
한차수는 전에 없이 솔직한 음성으로 말했다. 매달리는 듯한 정이흔의 행동에 그가 돌보던 이들이 떠오른 탓이다.
그걸 알 리 없는 정이흔은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이었다.
흠흠. 목을 가다듬은 그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럼요. 그렇지 않아도 길드원들이 한차수 씨한테 정말 고맙다고, 잘 쓰겠다고 전해 달라고 했습니다.”
한차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이흔은 감사함이 철철 넘쳐흐르는 눈빛으로 이어 말했다.
“다들 고마워했지만 특히 공략대원들이 무척 감동받은 얼굴이었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요새 포션이 부족하던 참이었으니까요. 한숨 돌린 거죠.”
정이흔의 말에 한차수의 몸이 살짝 굳었다.
‘…잠깐, 요새 포션이 부족하다고?’
설마 내가 창고를 다 거덜 내서 그렇게 된 건가. 갑자기 목 뒤의 솜털이 바짝 돋고 등골이 서늘해졌다.
아무리 돈 많고 위세 좋은 대형 길드라 하나 없는 걸 만들어 낼 수는 없는 노릇. 상급 포션을 만드는 데 필요한 시약과 원재료의 공급에는 한계가 있다.
만약 자신이 시약들을 쓸어 가는 바람에 포션 제작에 차질이 생겼다면….
‘어쩐지 정이흔이 별것도 아닌 걸로 흥분했다 했어.’
꽈악. 마령석을 붙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정서흔을 살렸을 때도 달려들어 껴안은 적 없던 그였다. 그런데 고작 포션 몇백 개 갖다 줬다고 얼싸안고 뺨을 비비다니.
분명 길드 내 포션 수급에 큰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하지만 섣불리 확신할 수는 없는 노릇. 한차수는 은근슬쩍 정이흔을 떠보기로 했다.
“제가 서리거인 던전에 들어간다면서 시약을 그렇게 많이 챙기지만 않았어도 포션이 부족해질 일은 없었을 텐데…. 죄송합니다.”
정이흔이 놀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눈치였다.
“무슨 말을 하는 겁니까? 한차수 씨는 아무 잘못도 없습니다.”
“하지만 제가 중요 시약을 챙겨 간 건 사실이니까요.”
“한차수 씨.”
정이흔이 단호한 얼굴로 그의 팔목을 꽉 움켜쥐었다. 살갗이 맞닿은 자리가 뜨거웠다.
“당신 덕분에 살아난 목숨이 몇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
“누구도 한차수 씨를 탓하지 않습니다. 세상에 사람 목숨보다 중요한 게 어디 있을까요. 그들은 한차수 씨한테 목숨을 빚졌습니다. 그러니 사과하지 마세요. 제발요. 이렇게 부탁합니다.”
절절한 음성이 병실을 가득 메우고, 한차수는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정이흔이 다시금 그의 등에 팔을 둘렀다.
정이흔의 품속에서 그는 생각했다.
‘이 자식… 말은 그럴듯하게 해도 결국 내가 시약을 몽땅 챙겨 간 게 문제긴 했다는 거잖아?’
정이흔의 말은 무척이나 다정했지만 핵심은 건드리지 않았다.
덕분에 한차수는 확신했다. 자신이 가져간 시약과 재료 때문에 포션 공급에 차질이 생긴 것이다.
거기까지 생각하자 등줄기를 타고 소름이 돋았다.
‘해태의 물약을 천령 길드로 보내길 잘했군.’
서리거인 던전에서 살려 낸 공략대원이 많아 봤자 얼마나 되겠는가. 국내 10위권에 드는 대형 길드인 천령 소속 헌터는 두 손으로 셀 수도 없었다.
하마터면 얼굴도 모르는 이들에게 두고두고 원한을 살 뻔한 것이다.
‘하…. 진짜 살기 힘드네.’
척추를 따라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해태에 감사 인사를 올린 것도 잠시. 한차수는 정이흔이 단순히 감사 인사차 들른 게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격렬한 포옹이 끝나고 돌아가기는커녕 태연스레 자리에 다시 앉았기 때문이다.
한차수가 가만히 그의 숨결이 닿았던 자리를 쓸어내리는데,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렸다.
“아무래도 제가 물건을 잘못 가져온 모양입니다.”
정이흔은 어느새 마령석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쯤 되면 진작 태어났어야 했는데, 아무 소식이 없으니 의심이 드는 모양이었다.
“이럴 리가 없는데….”
낮은 목소리가 실망을 품고 흩어졌다. 마령석을 바라보는 눈이 제법 차가웠다.
한차수는 지레 찔려 헛기침을 했다.
‘너무 내버려 뒀나?’
정이흔과 함께 있는 때가 아니면 마령석을 쓰다듬어 주기는커녕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언제 갑자기 마령이 깨어날지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이흔이 마령석을 덥석 빼앗아 들었다.
‘회수해 가는 건가?’
한차수의 눈에 희망이 반짝였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금세 물거품처럼 사라졌다.
“제대로 된 걸로 다시 가져오겠습니다.”
“예?”
“생각해 보니 마령보다는 정령이 더 나을 것 같군요. 보통 부화하는 속도가 그쪽이 더 빠르다고 했으니…. 한차수 씨가 퇴원하기 전까지 부화할 수 있는 정령석으로 골라서 가져오겠습니다.”
여차하면 아예 여러 개를 가져오겠다며 정이흔이 덧붙였다.
정말 끔찍한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하는 놈이었다. 한차수는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붙들었다.
“저는 그 녀석이 좋습니다.”
“예?”
“아직 태어나지 않았다고는 하나 이미 제 손을 탄 녀석이 아닙니까.”
“하지만….”
정이흔이 갈등하는 눈으로 마령석과 그를 번갈아 보았다.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다. 한차수는 마령석을 든 그의 손을 제 손으로 감싸 안았다.
정이흔이 마령석을 가지고 도망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손을 결박당한 정이흔이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길드원들이, 그리고 길드장님이 제게 준 선물이나 다름없는 아이입니다. 그런 아이를 고작 일찍 부화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갖다 버리라뇨.”
“…….”
“재고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붉은 눈동자에 파문이 일었다. 정이흔은 잠시간 말을 잇지 못했다. 한차수는 때를 놓치지 않고 그의 손에서 마령석을 빼앗아 들었다.
아주 잠깐, 마령석의 빛이 일렁였다.
하지만 너무나 희미했고, 또한 두 사람 모두 서로에게 집중한 탓에 누구도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전 이 녀석이면 충분합니다.”
“하아….”
“정말입니다.”
정이흔은 할 말이 많은 얼굴로 그를 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고분고분 제 말을 따르는 남자에 한차수는 미소 지었다.
비록 이어지는 말에는 인상을 쓰고 말았지만.
“이전에 말했던 아이템들과 유백 병원에서 마시던 약을 가져왔습니다. 두고 갈 테니 챙겨 드세요.”
“그 쓴 약 말입니까?”
“몸에 좋은 게 입에도 쓴 법이죠.”
정이흔의 시선이 남은 사탕에 닿았다. 이윽고 작별 인사와 함께 그가 허리를 숙였다.
“또 오겠습니다.”
오늘 하루만 도대체 몇 번이나 안기는 건지.
‘해태의 선물을 보내 준 게 정말 미치도록 고마운 모양이야.’
단단한 품이 이제는 익숙해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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