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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67화 (67/113)

67화

눈에 아주 익은 얼굴은 아니다. 하지만 분명 비슷한 이목구비를 어디선가 봤다.

‘바로 기억이 나지 않는 걸로 봐서 최근 며칠 사이에 만난 인물은 아니야.’

프리올의 간부이자 해태의 연락관, 권서홍은 한차수를 재빠르게 훑었다.

한차수는 환자복을 입고 있음에도 제법 말쑥한 외모였다.

아몬드 모양의 눈매와 침착한 회색 눈동자. 콧날은 전해 들은 성품처럼 곧았고 턱 선은 그간의 고생을 대변하듯 날카로웠다.

건강을 회복하고 살이 좀 더 오른다면 누구나 한 번쯤 돌아볼 직한 청년이라고 권서홍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살펴도 특별하게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다.

‘연합의 간부 녀석들은 확실히 아니고.’

프리올은 자유주의 연합과 각성자 관리국의 중간자를 자처하는 회색 지대. 하지만 그들의 뿌리는 어디까지나 연합이었다.

프리올의 탄생 자체가 해태의 손에서 이루어졌으니까.

때문에 권서홍은 해태를 비롯해 연합 내 길드 유력 인사들의 얼굴을 대부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 중 한차수와 연결 지을 만한 인사는 없었다.

‘그럼 도대체 어디서 봤을까.’

바로 떠오르지 않을 만큼 교류가 밀접하지 않은 사람. 하지만 익숙함은 잡아챌 만큼 최근에 얼굴을 봤을 법한 존재.

‘설마 지난번 교류회에서 본 사람 중에 있으려나?’

교류회에는 연합 외 다른 집단도 참여한다. 이를테면 해외에 적을 두고 있는 단체라든지….

권서홍의 눈동자에 반짝, 이채가 스몄다.

“한차수 씨, 혹시….”

그때였다.

스윽.

문짝만 한 뭔가가 양쪽에서 시야를 가렸다.

“눈동자가 불손하네.”

“사적인 질문은 지양해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허어?”

한차수의 곁에 서 있던 두 남자가 순식간에 앞을 가로막은 것이다. 장승처럼 버티고 선 두 남자를 보며 권서홍이 눈살을 찌푸렸다.

“저 수작 건 거 아닙니다만.”

“아니어야 할걸?”

금명결이 나른히 웃으며 한차수의 어깨를 한 손으로 끌어안았다.

“내가 요새 공들이고 있거든.”

“오.”

“스카우트 제의를 말하는 겁니다.”

감탄사를 흘리는 권서홍의 귓가에 단호한 목소리가 들렸다. 한차수였다. 그는 짜증스러운 눈으로 금명결을 바라보았다.

“엑실리스 길드 마스터께서 요새 자꾸 제게 길드 이적을 권유하셔서요.”

권서홍의 눈이 커다래졌다.

‘S급들이 엄청나게 싸고돈다더니 틀린 말이 아니었네.’

백담에 이어 정이흔, 거기다 금명결까지. 도대체 한차수라는 이에게 무슨 특별한 게 있길래 이러는 걸까.

그를 바라보는 권서홍의 눈빛이 깊어질 때였다.

“눈 조심하라니까.”

휙 하고 가벼운 뭔가가 눈앞을 스쳤다. 권서홍은 가볍게 그것을 낚아챘다.

해태에서 지급하는 패였다.

금명결이 누군가의 허리춤에서 잡아 뜯은 게 분명했다.

“그건 알아서 주인 갖다 주고.”

“나 참… 제가 어디 가서 이런 대접 받을 사람은 아닌데.”

심부름꾼 대하는 듯한 태도에 권서홍이 미간을 찌푸렸다.

“프리올이니까 그나마 이런 대접을 받는 거지.”

금명결이 나른하게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해태였으면 여기에 발 들이자마자 진작에 팔 하나 정도는 날아갔어.”

금명결이 제 왼쪽 팔을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웃었다.

“그 패 주인처럼.”

깜찍한 도발에 권서홍은 기가 차다는 듯 허, 소리를 냈다. 그러나 벌컥 화를 내거나 따져 묻지는 않았다.

애초에 일을 벌였을 때부터 그 정도 부상을 입을 건 상정했으니까.

한차수가 짐작했듯, 해태는 단순히 감사 인사를 위해 소동을 벌인 게 아니었다.

자유연합 소속 길드장들을 번갈아 가며 소환한 관리국의 무례하기 짝이 없는 처사. 해태는 그에 대한 강력한 의사 표시가 필요하다 판단했다.

“언제까지 우리가 자기네들한테 끌려다닐 거라 생각하는지 모르겠군.”

“어울려 주는 건 그만하고 이쯤에서 그만하라고 경고라도 보내야겠어. 안 그러면 정신 차릴 놈이 아니야, 이번 대 본부장이라는 녀석은.”

그렇게 해태는 오랜만에 각성자 관리국의 위신을 박살 내러 행차하기로 했다.

한차수에 대한 감사는 그에 대한 명분이었다.

각성자 관리국에서 방문 목적을 따져 물었을 때 갖다 댈 만한 구실 말이다.

‘금명결이 바로 튀어나올 줄은 몰랐지만 그래도 꽤나 괜찮은 성과를 올렸어.’

관리국의 결계를 반쯤 뚫은 걸로 모자라 뒤늦게 달려온 안보실장을 거동 불가능한 상태로 만들었다. 느지막이 출근하던 본부장을 가로수 꼭대기에 매달아 놓은 건 덤이었다.

각성자 관리국의 오만한 압제에 이를 갈고 있던 연합 사람들이 만족할 만한 성과였다.

이제 남은 건 명분이었던 한차수에 대한 선물 전달뿐이었다.

권서홍은 그린 듯한 웃음을 보이며 손가락을 튕겼다.

“여기서 더 이야기해 봤자 좋은 소리는 못 듣겠네요. 그럼 슬슬 본론으로 들어갈까요? 자, 가지고 들어오세요.”

관리국 정문에서 행패를 부리다 못해 본부장에게 끝내주는 능욕을 선사한 해태.

각성자 관리국의 영원한 라이벌이자 사이 나쁜 형제나 다름없는 그들의 선물이 줄줄이 들어왔다.

“저희 장인들이 손수 공들여 만든 포션과 영약들입니다.”

여기저기서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귀한 아이템들이었다.

권서홍은 뿌듯한 얼굴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부디 전부 받으시고 빠른 시일 내에 쾌차하시길 바랍니다. 아, 퇴원하시고 나서 나중에 차라도 한잔 같이하면 더욱 좋고요.”

해태의 배포는 참으로 크고 넓었다.

***

프리올이 돌아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금명결도 돌아갔다. 당장 돌아오지 않으면 사직서를 내겠다는 비서의 살벌한 통화를 받은 뒤였다.

“또 봐.”

생각보다 깔끔한 퇴장에 안심한 것도 잠시.

병실에 남은 한차수는 곤란함에 턱을 쓸었다.

“허억, 이거 진짜 명선이 만든 포션인가 봐. 봐봐, 밑에 낙인이 찍혀 있어.”

“어떻게 약에서 이런 향기가 나지? 지금 막 풀잎을 꺾은 것 같잖아.”

“그래 봤자 왈패 새끼들 뒤나 봐주는 비렁뱅이들이 만든 포션인데 뭐가 그리 대단…. 잠깐만. 이 대리, 그거 설마 청속환인가?”

사람들이 고급스러운 궤짝들 앞에서 정신을 못 차렸다.

‘갖다 버리고 싶다…. 하지만 그랬다간 해태가 나서서 날 죽이려 들겠지.’

자신들의 성의를 무시하고 장인들의 명예를 모욕했다면서 오늘 관리국을 박살 내러 온 것처럼 나타날 게 뻔했다.

“그래서 저걸 다 어쩐다.”

한차수는 미간을 모았다. 궤짝의 수는 도합 열 두 개. 이래서야 인벤토리는커녕 집에도 가져다 놓을 수 없는 양이었다.

하루 날 잡고 다 먹어 버려야 하나?

그가 진지하게 약의 가짓수를 세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생각나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안경 쓴 사내, 서정민이 다가와 그에게 말을 건넸다.

“프리올 간부가 말한 사람이 혹시 한차수 씨의 가족일 수도 있지 않을까요?”

“예?”

“한차수 씨에게 어디서 본 적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하지 않았습니까.”

낮은 목소리는 진지했다. 표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만약 한차수 씨의 가족이 살아 있고, 그들 중에 각성자가 있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관리국보다 각성자들에 대해 많이 아는 게 프리올이라고 다들 말하곤 하니까요.”

이어지는 말에 한차수의 눈빛이 가라앉았다. 그에게 가족은 애초에 백담을 쫓아내기 위한 면피용 구실이었을 뿐. 정말로 그들을 찾을 생각은 없었다.

전산상에 자신 외 가족이 없다는 걸 확인한 건 둘째 치고, 그가 진짜 한차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정말로 한차수의 가족이 존재한다 한들 그들을 찾는 건 내 몫이 아니야.’

가족이 있다고 해도 그들이 한차수를 반길거라는 보장도 없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러니 차라리 만나지 않는 게 나았다. 서로를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서정민은 그렇지 않은 모양이었다. 의료 센터에 있을 때 가족을 찾아보자고 열심히 자신을 설득했다.

“퇴원하신 뒤에 찾는 것보다 한시라도 빨리 움직이는 게 낫지 않을까요? 원하신다면 제가 프리올 쪽에 한번 언질을 넣어 보겠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한차수 씨.”

서정민이 심각한 얼굴로 그를 불렀다.

“이런 말까지는 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만, 어쩔 수가 없군요. 사실 그날 이후 저희 모두 한차수 씨를 걱정하느라 밤을 새우다시피 했습니다.”

이게 무슨 소리야. 눈을 휘둥그레 뜨는 한차수를 향해 서정민이 말했다.

부드럽고 은근하게, 마음을 요동치게 만드는 어조였다.

“한차수 씨의 가족을 찾았다 칩시다. 그런데 그들이 만약 흉악한 범죄자거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이유로 한차수 씨를 버린 거라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한차수는 서정민의 집요한 시선을 느꼈다. 자신의 반응을 하나라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고집스러운 얼굴.

‘과보호도 이런 과보호가 없네.’

한차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전 괜찮습니다.”

“……!”

“그분들에게는 그분들 나름대로 이유가 있겠죠. 저는 그저… 저와 피를 나눈 사람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 숨 쉬고 있다는 걸 확인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러니 제 걱정은 하지 마세요.”

애초에 만나지도 않을 거라니까. 한차수는 한가롭게 생각하며 서정민을 지나쳤다.

“허….”

멀어져 가는 한차수를 보며 서정민은 탄식했다.

‘정말로 기억 상실이 확실한 건가.’

지난번에 보고를 올린 뒤 그는 한차수를 유의 깊게 관찰하고 있었다. 혹시나 그가 기억을 잃은 척 연기를 하는 중일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저건 사람이 바뀐 게 아니고서야 할 수 없는 말이야.’

서정민이 아는 한차수는 저런 말을 하느니 가족을 찾아내 제 손으로 죽일 놈이었다. 그래서였다. 되려 한차수가 정말로 기억을 완전히 잃어버렸다고 확신한 건.

그럼 이제 어떻게 진실을 알리느냐가 문제인데.

한차수의 등을 바라보는 서정민의 시선이 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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