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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66화 (66/113)

66화

이번에도 손목이 잡히는가 했는데, 금명결은 텅 빈 컵을 가져갈 뿐이었다. 한차수는 무의식중에 몸을 빼려다 멈칫했다.

“뭐 하는 거지?”

“아… 아닙니다. 그리고 대접은 괜찮습니다. 그 정도로 거창한 일도 아니었고.”

“그래도 내 마음이 편치 않아.”

금명결이 눈에 띄게 풀죽은 얼굴로 말을 이었다.

“한차수 씨, 혹시 날 미워하는 건 아니지? 그게 아니면 왜 날 물건만 받고 입 싹 씻는 놈으로 만들려고 해.”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냥 이렇게 절 걱정해서 찾아와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따름입니다.”

“아, 물질적인 것보다는 자주 만나는 걸 더 선호하는 편인건가? 흠… 알았어. 한차수 씨를 위해서 특별히 노력해 보지.”

금명결의 의미심장한 웃음에 한차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거절하려다 어쩐지 더 귀찮아진 것 같은데.

“마음대로 하시죠.”

잠적하기 전까지 몇 번 인사나 나누면 되겠지. 한차수는 대충 대답하고 의료진 사이로 걸음을 옮겼다.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그를 둘러쌌다.

“이제 그만 돌아가시죠, 엑실리스 마스터?”

“이만하면 저희 한차수 씨가 충분히 놀아드린 것 같은데요.”

“이것 참, 한 번에 쓸어버릴 수도 없고.”

느긋한 미소와 함께 중얼거린 금명결이 한차수를 향해 시선을 돌리며 말을 이었다.

“아, 당신한테 한 말은 아니야. 내가 어떻게 한차수 씨를 건드리겠어?”

알겠으니까 제발 집에 가라. 의료진들 내뱉는 욕설 속에서 한차수는 피곤하다는 듯 읊조렸다.

“그만 돌아가시죠.”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너무하는군. 여기 들어오는 데만 해도 세 시간이나 걸린다고.”

또 올 거라며. 한차수가 미간을 찌푸리던 때였다.

“실장님을 불러올까요?”

안경을 쓴 사내가 곁으로 붙으며 물었다. 윗사람의 허락을 구하는 것처럼 신중한 눈빛이었다.

“엑실리스 길드 마스터가 불편하신 것 아니었습니까?”

“거기, 다 들리는데.”

사람들 너머로 금명결이 기가 차다는 듯 중얼거렸다. 하지만 사내는 신경도 쓰지 않았다. 대단한 배포였다.

“여기서 가장 가까운 건 안보실이지만 이 시간이면 사무실을 비웠을 테니…. 말씀만 하시면 제가 바로 연구동에 다녀오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안보실이라는 말에 흠칫한 한차수는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기태연은 트레이닝 시스템의 마지막 정비를 위해 애쓰고 있었다. 그를 방해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그런 폐를 끼칠 수야 없죠.”

“…달라지셨군요.”

“예?”

“아닙니다. 그럼 이대로 병실로 돌아가실 건가요?”

“그러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습니다만….”

저 인간이 끝까지 질척이며 따라올 것 같았다. 한차수의 시선이 금명결에 닿은 걸 본 사내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의 입에서 고얀, 어쩌고 하는 말이 흘러나왔다. 상당히 파격적인 언사였으나 한차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자신을 향한 의료진의 과도한 보호를 자각한 뒤였다.

“엑실리스 길드 마스터, 분명 방문 시간이 제한되어 있을 텐데요.”

“그런 게 있었나?”

금명결이 어깨를 으쓱이며 웃은 순간이었다.

멀리서부터 물결치듯 사람들의 웅성임이 공기를 휩쓸었다.

“음?”

동시에 전투 인력인 게 확실한 각성자들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왔다. 그리고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한차수라는 사람을 만나러 왔소이만—-!”

대기를 찢어발기는 묵직한 음성이었다.

***

오늘도 변함없이 시끄럽고 무난한 하루여야 했다고 관리국 정문 경비는 생각했다.

비록 다섯 시간 동안 시비 걸린 횟수만 두 손을 넘고, 매일같이 담벼락을 기어오르려는 놈들을 잡아야 했지만 그 정도는 견딜 수 있었다.

지금 이 상황에 비한다면!

“돌아가십시오!”

“왜 경계하는지 모르겠군. 분명 사람을 만나러 왔을 뿐이라고 했는데?”

거대한 물체를 둘러싸고 하나둘씩 땅에 발을 딛는 긴 소맷자락의 인형들. 하나같이 비범한 용모였지만 허리춤에 달린 패만은 같았다.

[해태]

자유주의 연합의 실질적인 수장이자 각성자 관리국의 라이벌.

해태가 등장했다.

‘설마 전쟁을 벌이러 온 건가?’

해태와 관리국 사이에서 벌어진 크고 작은 혈겁. 그것들은 하나같이 오래된 이야기였다. 평화 협정이 맺어진 이후 일어난 적 없는 일.

하지만 이제 와서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특히나 본부장이 자유주의 연합을 들쑤시고 있는 지금은…!’

경비의 눈이 경직되었다. 꽈악. 손에 들린 비수가 그의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그때였다.

저벅.

머리카락을 하나로 길게 땋은 이가 발을 내디뎠다. 긴장감이 바닥에서부터 혈관을 타고 올라왔다.

‘비상 버튼은 눌렀어. 지금쯤 관리국 내 전투 인력들한테 호출이 갔을 거야.’

게다가 이쪽은 CCTV도 있다고. 경비가 곧 달려올 동료들을 생각하며 비수를 굳건히 틀어쥘 때였다.

등 뒤에서 강대한 기운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쌔액-!

그리고 화살처럼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날카로운 궤적.

타닥.

거미줄처럼 엮인 묵빛 실 가닥 위. 검은 코트 자락을 흩날리며 한 사내가 내려앉았다.

“어떤 새끼들이 내 사람 이름을 함부로 불러 젖히나 했더니…. 덩치 큰 녀석들이 떼로 몰려왔군.”

태양 같은 눈동자가 햇빛 아래 명멸했다.

***

한차수는 병실로 급히 피신했다. 정말로 ‘피신’이라는 단어가 알맞은 분위기였다.

복도를 지나가는 내내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목소리가 산발적으로 터져 나왔다.

“해태가 왔다고? 그 녀석들이 여기는 왜 와?”

“몰라요. 이카로스면 몰라도 윗선에서 그 녀석들을 직접 부르지는 않았을 텐데.”

“그래도 정문에서 멈췄다는 걸 보면 전쟁하자는 건 아닌가 봐요. 그나마 다행인가.”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등록도 안 하는 왈패 놈들이 뭐라도 되는 것마냥 구는 것도 꼴보기 싫은데 여기가 어디라고….”

소란은 곧 종식되었다. 스피커를 통해 비상 상황이 해제되었으니 제자리로 돌아가라는 방송이 울려 퍼졌다.

“아무래도 찝찝한데.”

“해태가 괜한 일로 움직이는 곳이 아니잖아요.”

한차수는 가만히 의료진의 대화를 귀담아들었다. 병실로 돌아오고도 그들은 떠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과할 정도로 그의 곁에 달라붙어 있었다.

특히나 안경 쓴 사내가 그러했다. 그는 다른 이들을 각각 창문과 문에 배치시킨 뒤 자신은 직접 한차수의 옆을 지켰다.

“한차수 씨.”

“아, 네.”

다른 이들의 대화를 엿듣던 한차수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투명한 유리알 너머 사내의 눈동자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해태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차수 씨를 찾아온 걸까요? 혹시 짐작 가시는 게 있습니까?”

아주 낮은 목소리였다. 다른 사람들 몰래 의중을 묻듯 속삭이는 음성.

한차수는 천천히 두 눈을 깜빡였다. 글쎄다.

그가 해태에 대해 아는 건 많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거의 없다 해도 무방했다.

‘원작에서 해태가 언제 처음 등장했더라.’

소설 초반부는 정이흔의 독주나 마찬가지였다. 동생의 죽음으로 미쳐 버린 주인공. 그는 자신을 가로막는 모든 걸 부수고, 죽이고, 끊임없이 태워 나갔다.

어떻게 봐도 선한 행동이라 정의 내릴 수 없는 행보였다. 정이흔의 잔인한 손속은 필연적으로 관리국과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그 과정에서 자유주의 연합 소속 길드들은 곁다리로만 등장했다.

사실 따지자면 흑화한 주인공의 기치는 자유주의에 가깝다고 해도 될 정도였다. 그러니 그들도 굳이 나서서 먼저 정이흔을 건드리지는 않았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가요….”

그러나 의문은 예상보다 빨리 풀렸다.

해태의 심부름꾼이 찾아왔기 때문이다.

***

“처음 뵙겠습니다. 프리올의 권서홍이라고 합니다.”

끝으로 갈수록 붉게 물든 머리카락이 인상적이었다. 깔끔하게 소개를 마친 권서홍은 씩 웃으며 자신이 찾아온 이유를 밝혔다.

“해태 측의 선물을 전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프리올은 자유주의 연합과 관리국의 중간 다리 역할을 하는 길드.

사실 말만 중립이지 해태 측에서 관리국과의 공모를 위해 따로 만들어 놓은 지부나 다름없었다.

한차수는 권서홍이 내미는 손을 대충 잡아 흔들고는 바로 본론부터 꺼냈다.

“부담스럽군요. 저는 해태에게 선물을 받을 만한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래, 그러니까 꺼져 줬으면 좋겠다는데.”

어느새 제 곁을 지키고 선 금명결이 웃는 얼굴로 빈정거렸다. 한차수의 팔꿈치가 그의 허리를 찔렀다.

‘가만히 계시죠.’

한차수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해태를 쫓아낸 건 쫓아낸 거고. 이들에게 따로 미운털이 박히고 싶지는 않았다.

다행히 권서홍은 개의치 않는 얼굴이었다. 하긴 보통 뻔뻔하지 않으면 두 세력 사이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테다.

“선물 받을 일이 없다뇨. 한차수 씨가 어떤 일을 하셨는지 저희가 다 아는걸요.”

“제가 뭘 했다고….”

“백담, 그 긴머리 미친놈이 각성자들을 이상한 방법으로 고문하겠다는 걸 한차수 씨가 손수 말리셨다면서요.”

아, 한차수의 입에서 탄성이 터졌다.

‘트레이닝 시스템으로 고문하려던 걸 말하는 거로군.’

범인들이 미등록 각성자였다는 걸 잊고 있었다.

‘그런데 겨우 그걸로 직접 선물까지 보낸다고?’

처사가 과한데. 경계심이 슬그머니 올라오던 참이었다.

“그나저나 소문대로 정말 겸손하시네요.”

활짝 웃는 권서홍의 두 눈이 반짝였다. 병실에 들어서자마자 의료진을 싸늘한 눈으로 훑어보던 이는 온데간데없었다.

“나중에 해태분들과 직접 만나시는 건 어떠신가요? 이번에는 안타깝게도 고지식한 공무원들이 훼방을 놓아서 제가 또 심부름꾼을 자처해야 했지만….”

“그건 안 될 것 같습니다.”

“역시 그렇죠?”

한숨을 내쉬는 모습이 퍽 잔망스러웠다. 고개를 내젓는 몸짓에 맞춰 머리카락이 흔들렸다.

그러다 돌연, 권서홍이 그를 직시하며 물었다.

“그런데 혹시 형제 없으세요?”

분명히 어디서 본 얼굴인데. 읊조리는 음성이 귓가를 스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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