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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64화 (64/113)

64화

가상현실 트레이닝 시스템 룸. 줄여서 트레이닝 룸이라 불리는 훈련장.

“후….”

벽에 기대어 앉은 남자의 어깨 위로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슥, 검은 머리칼을 쓸어 올리자 떨어지는 땀방울들.

한바탕 격전을 치른 듯 터져 나오는 숨이 거칠다.

각성자 관리국 위기관리실 실장, 기태연이었다.

‘훈련용으로도 제법 쓸 만한걸.’

개발실 놈들이 꽤 괜찮은 걸 만들어 냈다. 몬스터의 잔해가 사라지는 걸 확인한 그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15미터 위. 시스템 제어 룸에 얼핏 익숙한 기운이 느껴진 탓이다.

‘한차수로군.’

자신과 비슷하되 비슷하지 않은 기운. 이는 피가 남긴 잔여물이 아직 잔존하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게 많이 빼내고도 아직 한참이나 남았다니. 기태연은 미간을 찌푸렸다. 권속을 가지게 된 지 너무 오래되어 원래도 이랬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전에도 이렇게 권속의 기운을 강하게 느꼈었는지도 모르겠고….’

권속이 된 녀석마다 족족 죽어 나가서 기억할 만한 게 많지도 않았다.

“그래도 조금 아쉽긴 하군.”

제 기운을 나눠 가진 존재가 이렇게 오래 살아 있는 건 처음이었다. 그래서인지 곧 있으면 사라진다는 생각을 하니 이상한 마음이 들었다. 덕분에 안보실을 여러 차례 박살 낼 수 있어 기특한 면도 있고.

그래도 한차수를 위해서는 놓아 주는 게 옳았다.

‘뼈대가 가는 편은 아니었으니 트레이닝에도 잘 버티겠지.’

기태연은 손을 쥐었다 폈다. 본의 아니게 한차수의 침대를 빼앗은 날. 가까이서 보게 된 한차수의 몸은 환자치고 꽤 괜찮은 편이었다.

병원 신세를 꽤 오래 진 걸로 아는데 근육이 많이 빠지지도 않았고 봐줄 만했다.

그럼 어디를 어떻게 얼마큼씩 만져 줄까나.

사람의 몸에 존재하는 혈도를 떠올리며 기태연은 단말기에 대고 물었다.

“한차수 헌터 도착했나?”

짧은 통신음이 울리고, 곧 긍정의 답이 도착했다.

“그리로 갈 테니 기다리라고 해.”

-알겠습니다!

씩씩한 대답과 함께 통신이 끊겼다. 기태연은 바닥 한구석에 널브러진 옷가지를 챙겨 들었다.

치직-

텅 빈 트레이닝 룸. 사라져 가던 잔해가 불현듯 흔들렸다.

***

한차수가 도착했다는 말을 듣자마자 개발실 전원이 그를 맞이하기 위해 나왔다.

“어, 어서 오세요!”

“환영합니다, 한차수 헌터! 이쪽으로 오세요, 편히 앉으세요!”

격렬하다 못해 통곡에 가까운 환영 인사. 반이나 날아간 예산의 충격이 그리도 컸던 걸까. 한차수를 반기는 이들의 낯은 초췌하다 못해 폐인에 가까웠다.

“저번에는 저희가 정말 말도 안 되는 짓을 저질렀습니다. 사실 그러려던 게 아닌데….”

“이번에 새로 만든 신상 음료수인데, 이야기하는 동안 드세요.”

“그거 말고 이걸로 드려!”

아니다. 이들은 폐인이 아니라 광인이었다. 번들거리는 눈이 한차수를 잡아먹을 듯 바라보았다.

제각각의 색으로 빛나는 눈마다 열광이 서려 있었다. 한차수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

‘이 녀석들 왜 이래?’

뭘 잘못 먹었나. 한차수는 자연스레 그들이 건넨 음료수를 멀찍이 밀었다. 카라멜 포도맛이라는 스티커가 붙은 음료였다.

그때, 등 뒤에서 코웃음 치는 소리가 들렸다. 의료 센터 직원들이었다.

“이제 와서 잘 보여 봤자 날아간 돈이 돌아온대? 웃기고 앉았네, 정말.”

“그러게나 말이야. 우리 한차수 헌터는 그날 잃은 건강을 아직도 회복하지 못했는데.”

“말이 심하다, 유수진?”

“앗, 그게 들려? 미안. 머리에 든 게 개발이랑 돈밖에 없어서 귓구멍도 그런 줄 알았지.”

“허…!”

파지직. 불똥 튀기는 눈싸움이 이어졌다. 개발실과 의료 센터 직원 사이에 끼어, 한차수는 한숨을 흘렸다.

개발실은 아직도 자신에게 잘 보여 위기를 모면하겠다는 마음을 버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다들 좀 비키지.”

느른한 목소리가 일시에 싸움을 종식시켰다. 칼로 잘라 내듯 단숨에 갈라지는 인파.

“꼭 사람이 말로 해야 아나.”

쯧쯧, 혀를 차던 사내가 훅 고개를 틀었다. 보란 듯 서늘한 기운을 흘리는 푸른 눈의 사내.

기태연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살뜰하게 챙겨 입었네요, 한차수 헌터.”

위아래를 훑는 시선에 한차수는 순간 움찔했다.

‘뭐지?’

아주 잠깐 심장 부근이 세게 요동쳤다. 그러나 이내 환통처럼 사라져 버렸다.

그 사이 가까이 다가온 기태연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챙겨 입었다는 듯이 말이다.

한차수가 묘한 표정을 짓는 사이 기태연은 맞은편에 털썩 앉았다. 소파가 크게 출렁이며 삐걱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럼 예정대로 오늘 트레이닝 시스템이 어떻게 이뤄지는지 견학하고 예비 테스트를 진행한 다음, 날짜 잡고 실전에 들어가죠. 혹시 모를 사태를 대비하기 위해 의료진은 상시 대기할 거고….”

살얼음이 낀 듯 서늘한 눈이 의료진을 훑었다. 한차수는 제 바로 뒤에 있던 안경 쓴 사내가 흠칫 몸을 떠는 걸 느꼈다.

“개발실은 당연히 죽고 싶지 않으면 성실히 임할 겁니다. 한차수 씨는 마음 편히 몸만 오면 돼요.”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음?”

“개발실장님께서는 어디 계십니까?”

한차수는 나름대로 사죄의 말을 준비해 왔다. 아무리 제정신이 아니었다고 한들, 그의 머리채를 휘어잡은 건 맞지 않나.

‘후환을 남겨 둘 수는 없지.’

트레이닝 시스템은 개발실의 영역이다. 며칠 동안 그들과 얼굴을 마주쳐야 하는데 불편한 점을 남겨 두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방 안 어딜 살펴도 개발실장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아아.”

탄성을 터트린 기태연은 영 심드렁한 낯이었다. 어깨를 주무르던 그가 귀찮은 음성으로 말했다.

“쫓겨났습니다.”

“예?”

놀란 한차수와 달리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어디 보자, 지금쯤이면 제3본부에 도착했겠네요.”

슬쩍 시간을 확인하며 그가 말을 이었다.

“개발실장 임청문은 사사로운 목적으로 관리국의 재산을 이용, 소속 직원을 해하려 한 혐의로 감봉과 함께 한 달 동안 제1본부 출입이 금지됐습니다. 그렇다고 한 달 동안 놀게 해 주겠다는 말이냐? 우리 국장님께서 그럴 리가 없죠.”

기태연은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남의 불행이 즐거워 미치겠다는 얼굴이었다.

“녀석은 한 달 동안 남은 열두 개 본부의 개발실을 전부 방문하고 그동안의 개발 진척 상황에 대해 보고서를 써야 합니다. 일도 하고 전국 유람도 하고 아주 보람찬 여행인 셈이죠.”

“…….”

“이게 다 한차수 씨 덕분입니다.”

머리를 쓸어 올리며 눈을 빛내는 사내의 목소리가 유쾌했다. 지긋지긋한 종양을 떼어 버린 사람처럼 해방감에 가득 찬 표정이었다.

한차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이미 내 손을 떠난 영역이었군.’

개발실 직원들이 왜 제게 그리도 호의적이었는지 재차 깨달았다. 수장의 목이 날아갔으니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었던 것이다.

참 안타까운 일이었다.

‘나는 딱히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는데.’

게다가 뭔가를 해 주려고 해도.

“잘됐네.”

“임 실장님은 머리에 바람 좀 넣을 필요가 있었어. 이참에 아예 오래 여행하다 오셨으면 좋겠다.”

등 뒤에 포진한 의료 센터 직원들이 그 꼴을 가만히 놔둘 리가 없다. 그들은 개발실이 센터 옥상을 점거해 인질극을 벌이려 한 뒤로 개발실을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었다.

‘여기서 더 성질을 자극할 수는 없지.’

점점 들끓는 공기를 느낀 한차수는 일부러 잔기침을 뱉었다. 의료진이 화들짝 놀라 어수선을 떨었다.

“괜찮으세요? 잠깐만 이쪽 좀 봐 주세요. 흠, 열은 없는데. 역시 에어컨 바람이 너무 차가워서 그런가.”

“공기가 더러워서 그런 거야. 저것 봐, 구석에 저렇게 먼지가 풀풀 날아다니는데 기침을 안 하고 배겨?”

“걱정 마세요, 팀장님. 제가 공기 청정기를 챙겨 왔습니다.”

“거참 아무리 봐도 적응이 안 되네.”

기태연이 맞은편에서 희한하다는 듯 속삭였다. 한차수는 헛기침을 하며 소란을 잠재웠다. 조금 부끄러웠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의료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데는 이게 최선의 방법이었으니까.

“크흠…. 실장님 그럼 견학을 부탁드려도 될까요.”

겨우 개발실과 의료진의 신경전을 무마시킨 한차수가 말했다. 기태연이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까딱였다.

“그러죠. 거기 부실장, 세팅 값 조절해.”

“여기는 위기관리실이 아니거든요, 기태연 실장님?”

“그리고 너는 개발실장이 아니라 부실장이지. 지금 나한테 말대꾸하는 건가?”

팅!

금속성의 소리가 울렸다. 기태연의 손에서 난 소리였다.

개틀링 건 탄환을 손으로 튕긴 그가 눈을 내리뜨며 말했다.

“번잡스럽게 굴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해. 네 자식이 패륜을 저지르기 전에.”

탄환을 몸에 처박아 버리기 전에 일하라는 말에 개발실 직원은 일제히 몸을 돌렸다.

기태연이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한차수는 새삼 그의 성질머리에 감탄했다.

“준비될 동안 우리는 수다나 떨죠.”

서랍을 마구잡이로 털어 대며 기태연이 말했다. 개발실 직원이 숨겨 놓은 과자가 탁자 가득 쌓였다.

“먹어요, 한차수 헌터. 많이 먹어야 열심히 운동하지.”

“…감사합니다.”

기태연을 바라보는 한차수의 눈에 온기가 깃들었다. 그는 사양하지 않고 과자를 봉지째 집었다.

“초콜릿 코팅된 걸로 먹어요. 이게 더 열량이 높으니까.”

어느새 곁에 앉은 기태연이 그에게 과자를 추천해 주었다. 한차수는 그의 호의를 거절하지 않았다.

쯧, 하고 등 뒤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린 것도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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