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화
“왔냐? 한차수 씨는 좀 어떻대?”
천령길드 회의실, 공략대와 이야기를 나누던 이진렬이 물었다. 정이흔은 말 없는 미소와 함께 자료를 건네받았다.
그는 이제 막 의료 센터에서 한차수를 만난 뒤 돌아온 참이었다. 저녁 늦은 시간이지만 그의 일정은 언제나처럼 가득 차 있었다.
“나중에.”
붉은 눈동자가 길드원들을 흘끗 바라보더니 제자리로 돌아갔다. 사람들이 빠진 뒤에 이야기하자는 말이었다.
이진렬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그러거나 말거나, 정이흔은 빠르게 자료를 훑으며 길드원에게 물었다.
“3급으로 추정된 게이트가 갑자기 1급으로 바뀌었다고요.”
“네. 선발대가 들어가고 몇 분 지나지 않아 갑자기 등급이 올랐다고 합니다. 다행히 보스를 해치워야만 게이트가 다시 열리는 방식이 아니라 전력 손실 없이 모두 복귀했습니다.”
“처음부터 측정이 잘못된 거 아냐?”
머리 짧은 헌터 하나가 툴툴대며 팔짱을 꼈다. 갑자기 불려 나와 기분이 상한 듯 보였다.
“던전 안전부 녀석들 일 제대로 안 하는 건 다 알잖아. 이번에도 그 녀석들이 농땡이 피우다 측정 개판으로 한 거겠지, 뭐.”
“반박하기 어려운 말이군요. 하지만 결과적으로 1급 게이트를 손에 넣은 건 호재입니다. 1시간 뒤에 다시 소집할 테니 준비하고 계세요.”
정이흔이 자료를 테이블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공략대원들은 각자 고개를 끄덕이거나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기, 길드장님.”
청량한 기운을 풍기는 헌터 한 명이 머뭇거리며 다가오더니 그에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그… 괜찮으시면 그분한테 이걸 좀 전해 드리고 싶어서요.”
정이흔의 눈이 자그마한 병에 가닿았다. 상대는 쑥스러운 듯 유리병을 그에게 내밀고는 도망쳤다.
“…….”
“한차수 씨 여전히 인기 좋네. 하긴 길드의 대들보나 다름없는 공략대를 살렸으니 영웅 취급받아도 할 말 없기는 하지.”
이진렬이 뒤에서 그의 손을 들여다보며 말했다. 툭, 유리병이 탁자 위에 놓였다. 털썩 자리에 앉는 정이흔을 향해 이진렬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뭐야, 센터에서 무슨 일 있었어? 왜 그렇게 죽상이야?”
“잠깐 손 좀 줘 봐.”
이진렬은 눈썹을 치켜올리면서도 순순히 손을 내줬다. 그리고 곧바로 내쳐졌다.
“…이 버르장머리 없는 길드장 놈이.”
뭐 하는 짓이야? 이진렬의 물음에 정이흔은 한숨 같은 웃음으로 답했다. 손깍지 위에 턱을 받치며 그가 말했다.
“한차수 씨 말이야, 어쩌면 숨겨진 능력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어.”
붉은 눈동자가 느른하게 주위를 훑었다. 이진렬의 기색이 달라졌다.
“뭐?”
“그게 아니면 새로운 능력을 얻은 거라든가.”
“야,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제대로 말해.”
이진렬이 의자를 당겨 앉으며 물었다. 장난기 어린 얼굴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
진지한 음성으로 물었다. 정이흔은 잠시간 대답이 없다가 천천히 말을 꺼냈다.
“그 사람하고 몸이 닿으면 들끓던 기운이 가라앉아.”
정확히 말하자면 한차수가 의료 센터에 들어간 뒤, 접촉 치료를 받으면서부터 생긴 일이었다.
그때 이후로 한차수와 본의 아니게 몸이 닿을 때마다 화기가 가라앉는 걸 경험했다.
추측컨대 아마도 그에게는 타인의 기운을 흡수하고,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이 있을지도 몰랐다.
‘기태연에게서 집중 치료를 받고 있다고 하니 충분히 가능한 일이야.’
한편, 이진렬은 믿을 수가 없다는 얼굴이었다. 그런 그에게 보다 자세한 설명을 위해 정이흔이 팔을 걷었다.
“여기, 봐 봐.”
이진렬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정이흔의 팔을 붙잡았다. 걷어 올린 소매 아래로 굵은 팔목이 보였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곳엔 자그마한 검은 얼룩이 화상처럼 남아 있었다.
정이흔이 가진 불꽃, 무화武火의 흔적이었다.
“말도 안 돼. 저번에는 손톱만 한 것도 없어지는 데 일주일 이상 걸렸잖아.”
“이제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하, 아니.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네.”
단단한 팔뚝을 매만지며 이진렬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정이흔은 S급 중에서 특히나 능력이 뛰어난 편이었다. 강한 힘과 그에 못지않은 제어력. 보통 두 가지를 모두 가지기는 힘들어서, 그는 어린 나이에도 길드장으로서 존경받았다.
하지만 한계치에 다다르곤 하면 몸에 검게 그을린 흔적이 남았다. 마치 여기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면 온몸을 잿더미로 만들겠다는 듯한 강력한 경고.
그게 바로 무화의 흔적이었다.
“통증도 안 느껴져?”
이진렬이 나지막이 물었다. 정이흔이 고개를 끄덕였다.
“하….”
이진렬이 재차 경탄의 신음을 흘렸다.
“한차수 씨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냐?”
무화의 흔적은 끔찍한 작열통을 동반했다. 이진렬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다.
단단한 등을 새까맣게 뒤덮은 무화의 흔적. 불규칙 게이트를 겨우 빠져나온 뒤, 홀로 돌아가던 정이흔의 목덜미에서 그걸 발견했을 때 얼마나 놀랐던지.
그날 정이흔은 이진렬에게 흔적에 대해 함구하길 청했다. 이진렬은 당연히 침묵을 약속했다.
그에게 정이흔은 소중한 친구이자 수많은 사선을 함께한 전우이므로.
그러니 도무지 믿기지가 않는 것이다. 수많은 약과 아이템으로도 지울 수 없던 무화의 흔적. 그걸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단번에 지워 냈다고?
“야.”
“음?”
“한차수 씨 잡아.”
지난 날, 굳이 종신 계약까지 해야겠냐며 탐탁지 않아 했던 이진렬은 없었다.
“연봉 10배? 어림도 없지. 20배든 30배든 원하는 대로 맞춰 드려야지. 한차수 씨는 이제 천령 길드의 보배다, 보배. 절대로 다른 데 못 가게 꽉 잡아, 알아들었어?”
이진렬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
어째선지 목덜미가 서늘하다. 한차수는 오소소 돋아난 소름을 문지르며 눈썹을 모았다.
‘에어컨 바람 때문인가.’
건물에 들어설 때부터 냉기가 등골을 파고들긴 했다. 한차수는 천천히 주변을 훑었다. 문틈 사이로 자신을 지켜보던 눈들이 쏜살같이 사라지는 게 보였다.
‘나 참.’
이곳은 지원개발실을 비롯한 관리국 산하 여러 연구 단체가 사용하는 연구동.
병실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겠다는 다짐이 깨진 건 트레이닝 시스템 때문이었다.
‘오늘은 견학. 내일부터 실전에 들어간다고 했지.’
기태연은 실전 몇 번이면 금세 상태 이상이 해제될 거라 말했다.
부디 그랬으면 좋겠군.
한차수가 무심코 팔을 문질렀다. 어제 정이흔이 강하게 끌어안은 탓에 멍이 들 뻔한 자리였다.
“많이 추우십니까?”
뒤따르던 의료진이 불쑥 물어왔다. 사내의 콧대에 얹힌 안경이 빛을 받아 반짝였다. 한차수는 걱정 말라는 듯 고개를 젓고는 말했다.
“그냥 살짝 한기가 도는 정도입니다. 걱정하실 필요는 없어요.”
몸이 건강하지 않으니 체온을 제대로 유지할 수 없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가슴 부근이 이렇게 시린 경우는 처음인데… 역시 심장 근처를 찔린 게 큰 건가.’
마치 심장 안에서부터 얼음이 차오르는 기분이었다.
묵직한 무게감이 어깨 위로 내려앉은 건 그때였다.
“그러다 또 쓰러지면 센터장님께서 경기 일으키실 겁니다.”
두툼한 외투를 걸쳐 주며 사내가 말했다.
“한차수 씨의 건강은 최우선 사항이에요. 이해해 주시길 바랍니다.”
안경 아래 딱딱한 눈빛에 한차수는 혀를 찼다. 협상의 여지가 없다는 걸 느낀 탓이다.
뒤에서 다른 이들이 기다렸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맞아요, 연구동에서 쓰러졌다는 소식이 들어가면 이번에야말로 진짜 관리국 절반이 날아갈지도 몰라요.”
“그 정도까지는….”
“어휴, 정말이라니까요.”
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이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그게 아니면 왜 개발실에서 나서서 방어구를 갖다 바쳤겠어요. 걔들도 눈치라는 게 있지. 여기서 한 번 더 한차수 씨가 잘못됐다간 남은 예산 반절도 다 날아갈 거 같으니까 그러는 거 아니겠어요?”
“맞아요. 그 녀석들, 평소에는 보호구 좀 빌려 달라고 해도 죽어도 안 주면서 이럴 땐 진짜 여우같다니까.’
한차수는 입을 다물고 눈을 굴렸다.
‘이게 그렇게 얻기 힘든 거였군.’
그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제 복장을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는 관리국 소유의 A급 아이템으로 도배된 상태였다. 전부 개발실이 제발 입고 와 달라며 보낸 아이템들이었다.
다만 거기에 외투까지 더해지니 몸이 이만저만 무거운 게 아니었다.
‘그래… 아예 안 입는 것보다는 낫지.’
개발실이 보낸 아이템 중에는 정신력과 의지를 향상시키는 액세서리도 있었다.
연구동을 벗어나자마자 돌려줘야겠지만 그 잠깐일지라도 숙적을 경계해야 하는 한차수에겐 필요한 물건이었다.
‘다행히 근처에는 없는 모양인데….’
언제 어느 때 반항 스킬이 발동될지 모르니 유의하는 편이 좋았다. 한차수는 복도를 걷다 말고 걸음을 멈췄다.
“하나 말씀드릴 게 있습니다.”
“다리 아프세요?”
“마실 거 드릴까요?”
“제가 간식을 좀 챙겨 온 게 있습니다.”
“…….”
사방에서 몰아닥치는 사람들의 팔을 걷어 내며, 한차수가 말했다.
“제가 갑자기 난폭한 행동을 보이거나 불쾌한 말을 쏟아 내면 바로 제압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다른 분들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으니까요.”
“예?”
“지금 무슨… 헉.”
숨 삼키는 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눈동자마다 다양한 감정이 들어찼다. 동정, 연민, 안타까움…. 그러나 물기 짙은 감정은 한순간에 자취를 감췄다.
“저희만 믿으세요.”
전문가다운 냉철한 눈빛과 함께 손에서 무언가 번쩍였다. 안정제가 든 주사기였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단번에 재워 드리겠습니다.”
“예?”
“아, 한차수 씨 말고 다른 분들을요. 이를테면 기태연 실장이라든가?”
“…….”
“기태연 실장님이 화나서 한차수 씨한테 손이라도 올리면 큰일이잖아요. 그러니 저희가 처리하겠습니다.”
민폐를 끼치기 싫다고 했더니 민폐를 입을 만한 사람을 처리하겠단다.
한차수는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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