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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61화 (61/113)

61화

얼어붙은 백담을 정이흔이 억지로 끌고 나가고 하루가 지났다. 나가면서도 뭐라고 말을 하려는 듯했지만 끝까지 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없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차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얼토당토않은 입양 권유를 다시는 못 꺼내게 한 것만으로 만족했으니까.

그 뒤로는 옥상 정원 나들이에서 얻은 깨달음을 충실히 따랐다.

병실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가지 않았다는 말이다.

“잠깐 나가서 햇빛이라도 쐬는 게 낫지 않을까요?”

“괜찮습니다.”

의료진이 호들갑을 떨었다. 아무래도 어제 고아니 뭐니 말을 했던 게 크게 다가온 듯했다.

한차수로서는 머쓱한 일이었다. 그가 시선을 돌리는데 안경을 쓴 깡마른 사내가 곁으로 다가왔다.

“뭐 더 드시고 싶으신 건 없으시고요?”

“예?”

“의료 센터 음식이 아무리 맛있다지만 식단인 이상 거기서 거기니까요. 괜찮으시면 저희 간식 사는 김에 몇 개 더 사다 드릴게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한차수는 멈칫했다. 무척이나 매력적인 제안이었다. 그런데 직원을 이렇게 부려 먹어도 될까. 그의 낯에 고민이 어리는 순간이었다.

“사실 개발실에서 제발 부탁한다며 저희한테 빌다가 갔습니다.”

“아아.”

일이 돌아가는 바를 깨달았다. 자신이 쓰러지고 난 뒤 개발실은 무려 국장에게 호출당했다고 한다.

‘그리고 예산을 반 이상 깎였다고 했지.’

중요한 예산 외에 잡다한 개발에 들어가는 예산이 전부 날아갔다. 그동안 능력을 믿고 날뛴 것에 대한 대가였다.

‘딱히 나한테 잘 보여 봤자 날아간 예산이 돌아올 리가 없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해 불가능한 집단이었다. 그래도 알아서 갖다 바친다는데, 뭐. 자신이 억지로 빼앗은 것도 아니고, 상대에게 죄를 짓지도 않았다. 그렇다면 사소한 간식 정도야 받아도 괜찮을 것이다.

“그럼 부탁드리겠습니다.”

뭐가 됐든 많이 먹는 건 좋은 일이었다. 그 좋은 일에 즐거움까지 더하면 더 좋지.

한차수가 부탁하자 사내는 무언가 깊게 생각에 잠긴 얼굴을 하더니 안경을 치켜세웠다.

“생크림, 좋아하십니까?”

없어서 못 먹는다. 한차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내의 눈빛이 깊어졌다.

“근처에 새로 개업한 가게가 마침 생크림이 듬뿍 들어간 롤로 유명한 곳입니다. 종류별로 사다 드리죠.”

“감사합니다.”

정말 좋은 사내였다. 한차수는 의료진에게 깊은 감사를 표했다. 다들 괜찮다며 손을 내저었지만 안경 쓴 사내는 묵묵히 고개만 내저을 뿐이었다.

***

벌컥 문을 열며 기태연이 들어온 건 저녁나절의 일이었다.

“하… 얼굴 볼 시간이 없네.”

겨우 시간을 빼 들린 그가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며 해독제를 건넸다. 굳이 직접 건네지 않아도 될 걸 핑계 삼아 빠져나온 기색이 역력했다.

“많이 바쁘신가 봅니다.”

“덕분에 밤낮으로 구르고 있습니다.”

트레이닝 시스템은 이제 막바지에 이르렀다. 더 이상 댈 변명거리가 없던 개발실은 울며 겨자 먹기로 일하고 있다고 했다.

“곰팡이에 뇌리를 잠식당한 것들이 하필이면 절 실험 대상으로 정할지 몰랐는데 말입니다.”

씩 웃는 기태연에게서 언뜻 살기가 비쳤다.

“…그래서일지도 모르는 일 아닙니까.”

한차수는 슬쩍 흘리듯 말하며 해독제 뚜껑을 열었다. 엮여 본 뒤로 절실하게 깨달았다. 개발실은 정말 웬만한 미친놈들이 아니었다.

기태연의 입매에 머문 웃음이 짙어졌다. 같은 경험을 공유한 이만이 보낼 수 있는 미소였다.

“한차수 헌터가 지금이라도 트레이닝 같은 건 너무 힘들다고 한마디라도 하면 모두가 행복해질 텐데.”

“죄송합니다. 그건 안 되겠습니다.”

딱 잘라 거절하는 모습에 기태연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입가엔 아직 미소가 매달린 채였다.

“뭐, 나도 그쪽이 더 편하니 됐습니다.”

한차수가 일찍이 원한 건 일방적인 대련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치료를 제대로 할 수 없다고 기태연이 주장했다.

‘내가 기운을 걷어 가야 하는 일인데 저쪽이 일방적으로 때린다 한들 제대로 될 리가 없지.’

따라서 기태연은 한차수에게 평범한 격투 훈련을 제안했다. 트레이닝 시스템 안에서는 수준을 비슷하게 맞출 수 있으니 가능한 일이었다.

‘훈련을 하면 건드릴 수 있는 부위가 넓어지지. 오히려 잘됐어.’

부득불 손만 잡고 있기도 지겹다고 생각하던 찰나였다.

그렇지 않아도 저번에 보니 껴안고 있을 때 기운을 거두기가 한층 수월하던데. 붙잡아 뒹굴다 보면 진도가 한층 더 빨라지리라. 한차수의 제안은 기태연에게도 호재였다.

해독제 맛이 꽤 역한지 오늘도 겨우 삼켜 낸 한차수가 물었다.

“가상 현실 시스템이라 들었는데 따로 장비를 착용해야 하는 건 아닙니까?”

“아, 뭘 생각하는지 알겠네. 그런 재미있는 걸 상상하고 있었군요. 아쉽게도 아닙니다.”

이미 수차례 구르고 온 장본인이 말했다.

“공간 자체가 하나의 이례적인 규칙을 따르는 형식이에요. 입력한 설정값대로 구현되는 가상 공간이라 그냥 가상 현실이라고 부르는 겁니다. 구식 체험 기기 같은 건 없어요.”

하품을 한 기태연이 해독제 병을 쓰레기통에 넣었다. 등 뒤에서 한차수가 흠, 하고 숨소리를 내는 게 들렸다.

“가 보면 알게 될 겁니다. 그래서… 오늘은 어떻습니까?”

“아무렇지도 않습니다. 특별히 몸 어딘가가 흐릿해지거나 한 곳도 없고요.”

“다행이네요. 목욕은 잘했고?”

“…….”

한차수는 기태연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이쯤 되면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난번에 욕실에서 정신을 잃은 건 사고였습니다.”

“누가 뭐랬나.”

“자꾸 물어보셔서 확인 차 말씀드린 겁니다.”

어린아이도 아니고 번번이 목욕은 잘했나 확인이나 받다니. 한차수는 새삼 제 처지가 어이없어 고개를 내저었다.

하긴 다른 이들에게는 트라우마에 시달리는 불쌍한 생산계로 비춰지고 있었다. 차라리 툭하면 욕실에서 정신을 잃는 사람이 더 나을지도 몰랐다.

적어도 후자는 말로만 그치지만, 전자는.

“한차수 씨.”

이렇게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자신을 확인하려 드니까.

“길드장님.”

“오늘은 내가 늦었습니다. 미안해요.”

놀라서 부른 건데 책망하는 줄 알았나 보다. 다급히 들어오며 코트를 벗어젖히는 모양새에 한차수는 심란해졌다.

“기 실장님도 계셨군요.”

“그렇지 않아도 슬슬 돌아갈 생각이었습니다. 그럼 이만.”

잡아먹을 듯 눈을 빛내는 정이흔에 기태연이 재빨리 사라졌다. 한차수는 눈살을 찌푸린 채 닫히는 문을 응시했다.

‘좀 더 있을 것이지.’

귀찮은 일에서 몸을 내빼는 속도 하나는 하늘이 내린 재주 급이었다.

곧 셔츠 한 장 차림의 사내가 시야를 가득 채웠다.

“이 아이는 아직도 깨어날 생각을 안 하네요.”

정이흔이 아쉬운 얼굴로 마령석을 쓰다듬고 있었다. 한차수는 뜨끔한 심정을 애써 숨겼다. 그가 억지로 품에 안겨 준 날 이후 근처에도 가지 않은 탓이었다.

“그냥 잠이 많은 것 아니겠습니까? 마령마다 성격이 다르다고 했으니 어쩌면 늑장 부리는 성격일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아쉬움 가득한 눈길이 마령석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저렇게 애달파할 거면 본인이 거두면 될 일을 왜 자신에게 줬는지 모르겠다. 아, 경매에서 당첨된 거라고 했던가.

한차수는 미간을 좁혔다.

‘그러고 보니 길드 내 자유 경매가 뭐지? 경매인데 낙찰이 아니라 당첨이라는 것도 희한해.’

원작에서는 나온 적 없는 내용이었다. 한차수는 은근슬쩍 마령석을 가져와 제 품에 안기려는 정이흔에게 물었다.

“길드장님, 혹시 자유 경매가 또 열립니까?”

“가지고 싶은 게 있습니까?”

물음에 물음으로 되받아치는 정이흔의 눈이 반짝였다. 화색이 만연한 얼굴에 한차수는 금세 그의 속을 짐작했다.

호구가 또 호구 짓을 하려는 것이다. 한차수는 들리지 않게 혀를 차고 말을 이었다.

“그냥 뭐가 나왔는지 알아두려는 것뿐입니다.”

“한차수 씨가 관심을 가질 만한 물건은 없을 것 같지만… 흠, 잠시만 기다리세요.”

정이흔이 휴대폰을 만지작거렸다. 한차수의 눈이 그를 유의 깊게 살폈다.

‘내가 관심 가질 만한 물건은 없을 것 같다고?’

그 말인즉슨 원작 한차수가 어떤 물건을 갖고자 경매에 참여했는지 알고 있다는 소리였다.

“흐음.”

한차수는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마령석을 내려다보았다.

‘내 추측이 틀리지 않다면 원작 한차수가 원하던 물건이 바로 이거인 것 같은데….’

도대체 왜 이런 손만 많이 가고 능력은 없는 걸 원했지? 의문이 머릿속을 채웠으나 답을 알 길은 없었다. 그래도 하나 명확해진 건 있었다.

역시 마령은 깨우지 않는 게 좋겠다.

한차수는 부드러운 이불로 마령석을 감싸 슬쩍 밀어냈다. 정이흔은 통화에 정신이 팔린 상태였다.

‘집에 돌아가면 마령석부터 창고에 넣어 둬야겠군.’

원작 한차수가 무엇 때문에 마령석을 원했는지 몰라도 그의 뜻에 어울려 주는 건 위험했다.

게다가 자신은 그렇지 않아도 해야 할 일이 많지 않은가.

[ 반경 10m 이내에 숙적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

[ 파악된 숙적의 숫자 : 1/4 ]

[ 스킬 반항(A)이 활성화됩니다. ]

지나간 시스템 메시지를 바라보는 한차수의 눈빛은 차분했다.

‘반항 스킬의 인식 반경은 10미터… 그리 넓지 않아. 옥상 정원에 올라왔던 이들 중에 숙적이라는 놈이 있는 건 확실해.’

다만 궁금한 건 이거였다.

‘숙적이라며 억지로 분노까지 치솟게 만들 정도인데, 왜 상대는 여태껏 나를 공격하지 않았지?’

한차수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한편, 정이흔은 통화를 하면서도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의 손이 당장이라도 한차수에게 닿고 싶은 듯 움찔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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