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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60화 (60/113)

60화

“싫습니다.”

생각해 볼 것도 없이 한차수는 단칼에 거절했다.

“왜요? 한차수 씨한테 나쁠 거 없잖아요. 다시 태어나도 되기 힘든 게 내 동생이에요. 한 가족이 되면 내가 언제든 곁에서 치료도 해 줄 텐데.”

한차수의 입장에서는 정말 필요 없는 배려였다.

‘어차피 재생 스킬이 있는 한 죽지도 않을 텐데, 뭘.’

고작 그런 걸 위해 백담과 한 가족이 될 수는 없었다.

“전 지금으로도 충분합니다.”

재차 거절했으나 백담은 납득이 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그는 희한한 걸 보는 듯한 눈으로 한차수를 바라보았다.

“충분? 그건 충분이 아니라 체념이라고 불러야 할 텐데. 잘 생각해 봐요, 내가 지금 나 좋자고 이러겠어요? 아니라는 거 알면서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

팔짱을 낀 채, 백담은 눈썹을 치켜올렸다. 그는 탐탁지 않은 내색을 숨기지 않으며 생각했다.

‘아쉬울 거 하나 없는 제안인데 도대체 왜 이렇게 싫어하는 건지.’

하긴 언제는 한차수가 상식적으로 움직인 적이 있던가. 백담은 흘끗 시선을 돌려 정이흔을 일별했다.

천하의 정이흔마저 퇴짜를 놓은 한차수였다. 연봉 열 배도 싫다고 강짜 부리던 사내를 설득하려면 웬만한 걸로는 안 된다는 이야기였다.

그럼 애초에 나서질 말던가.

“쯧.”

따지고 보면 한차수가 시작한 일이었다.

‘그러길래 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그렇게 몸을 날려 대?’

정서흔의 곁다리로 제 동생을 구했을 때와는 사정이 달라졌다. 한차수는 분명한 그의 의지로 백선을 구했다. 자신이 동생을 지키지 못한 순간, 그의 목숨을 걸어서.

‘선이는 이제 이 녀석을 결코 잊지 못하겠지.’

그렇지 않아도 위협받고 있던 형의 자리다. 더 이상 한차수를 동생의 마음에서 지워 낼 수 없다면 차라리 제 아래 두는 게 나았다.

그게 백담의 결정이었다.

“하….”

“죄송하지만 앞으로도 제 마음이 바뀌는 일은 없을 겁니다.”

그냥 닥치고 있지 짜증나게 또 입을 나불거리고 지랄이다. 한차수를 바라보는 백담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여태껏 지켜보기만 하던 정이흔이 입을 연 건 그 순간이었다.

“그만하는 게 좋겠습니다.”

어디서 났는지 모를 담요를 가져온 사내가 한차수의 어깨에 그것을 둘렀다.

“일어난 지 얼마 안 된 사람을 상대로 시간을 너무 끌었어요.”

“아, 감사합니….”

그리고 품에 웬 칙칙한 수정 하나를 안겨 줬다. 백담은 곧 그게 협탁 위에 올려져 있던 물건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볼품없는 걸 왜 방석 위에 고이 올려놨나 했더니 마령석인가 보군.’

정령석은 보통 파스텔 톤의 빛깔을 띠니 마령석이 분명했다. 뭐, 정령석이든 마령석이든 별다를 건 없었다.

중요한 건 그것들이 보통 심적으로 지친 각성자를 위한 테라피로 쓰인다는 점이겠지.

어쩐지 생각보다 흔쾌히 내기에 응했다고 생각했다.

‘저 음흉한 인간이 아무 생각 없이 제 뜻을 꺾을 리가 없지.’

백담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이흔이 하는 꼴을 지켜봤다. 그는 무슨 알이라도 품게 하듯 한차수의 가슴에 마령석을 안겨 주고는 팔로 둘렀다.

“이렇게 하면 좀 더 일찍 나올 겁니다.”

“…그렇군요. 미처 몰랐습니다.”

“이제부터라도 자주 안아 주시면 되죠. 웬만한 충격에도 부서지지 않으니 잘 때도 곁에 두세요.”

“……예.”

“한차수 씨, 너무 대놓고 사람 차별하는 거 아니에요?”

자신이 못할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돌아보는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 모습에 안 그래도 뒤틀린 심사가 더욱 비틀렸다.

“너무 속이 상하네요. 나는 이대로 집에 돌아가 선이한테 한차수 씨가 우리 가족이 되는 걸 잔인하게 거절했다고 말해야 하는데, 정작 당사자는 아무렇지도 않게 하하호호 웃고 있으니….”

한차수는 말문이 막힌 얼굴이었다. 입술을 벙긋거리지도 못하고 두 눈을 부릅뜬 채 이쪽을 뚫어져라 보는 모습에 백담은 방긋 웃어 보였다.

“백담 헌터.”

정이흔이 언짢은 기색을 내보이며 그에게 한마디 하려던 순간이었다.

똑똑.

“실례합니다!”

때마침 의료진이 들어왔다.

“센터장님께서 한 번 더 확인하고 오라고 하셔서요. 죄송하지만 검진을 해도 될까요?”

“아, 예. 마음대로 하십시오.”

“감사합니다. 그럼 두 분은….”

“여기 있겠습니다.”

“설마 날 쫓아낼 생각은 아니죠, 우리 무능한 의료 센터 여러분?”

바늘처럼 꽂히는 시선을 만끽하며 백담은 자리를 옮겼다. 한차수가 앉아 있는 침대의 발치. 그와 정면으로 마주 볼 수 있는 자리였다.

“한차수 씨.”

“하아…. 예.”

사람들이 많으니 이거 하나는 좋군. 한차수는 그의 말을 무시하지 못하고 꼬박꼬박 답했다.

“선이가 당신 걱정을 얼마나 많이 하는 줄은 알죠?”

“…압니다.”

“그러니 우리 형제의 마음을 그리 차갑게 외면하는 이유라도 좀 말해 줄래요? 난 진심으로 한차수 씨와 한 가족이 되고 싶은데…. 자꾸 그렇게 밀어내니 속이 상하네요.”

여기저기서 헉 하고 숨 참는 소리가 터져 나왔다. 백담은 보란 듯 가슴에 손을 짚으며 안타까운 표정을 자아냈다.

“제발 내가 납득할 수 있도록 뭐라도 말해-,”

사무적인 목소리가 병실을 울려 퍼진 건 그 순간이었다.

“제가 고아라서 그렇습니다.”

“…….”

“기억 속에 가족이라는 존재가 없어서 그런가. 아무래도 전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가족에 대해 좀 심각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습니다.”

백담은 가슴에 손을 얹은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흡….”

병실 전체가 완벽한 적막에 감싸였다. 간간이 사람이 숨을 들이켜는 소리만 들릴 뿐.

삭막하다 못해 무겁기까지 한 공기를 뚫고 한차수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태껏 살면서 가족이라는 존재를 그리워한 적이 없는데…. 몇 차례나 생사를 오가니 생각이 바뀌더군요. 그래요, 어쩌면 백담 씨처럼 사이좋은 형제를 곁에서 지켜본 것도 이유 중의 하나가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가족을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든 건.”

딸꾹. 한차수의 가슴에 청진기를 대려던 이가 당황을 숨기지 못하고 딸꾹질을 했다.

“죄, 죄송합니다.”

미안한 듯 그를 바라보는 의료진에게 한차수는 괜찮다 고개를 저어 보였다.

백담과 정이흔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 석상인지 아닌지 구분이 가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한차수는 올라가려는 입꼬리를 내리며 차분한 얼굴로 숨을 들이켰다. 이렇게까지 속내를 드러낸 게 조금 수치스러운 듯, 몸을 잘게 떨면서.

그를 붙든 의료진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제 생각이 맞다면 아마 힘을 내라는 응원일 것이다.

‘그러길래 작작 긁었어야지.’

한차수는 천천히 숨을 내쉬며 내렸던 시선을 살짝 들어 올렸다. 백담은 여전히 멍청한 얼굴 그대로였다.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한차수의 부모님, 미안합니다. 그래도 아들이 일방적으로 당하는 건 그쪽도 원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겠습니다.’

백담이 밀어붙이지만 않았어도 이렇게 변명거리로 쓸 생각은 없었는데, 어쩔 수가 없었다.

“그, 나는 말이죠.”

백담이 불현듯 정신을 차린 듯 긴 머리카락을 세차게 털며 입을 열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눈빛을 보니 대충 변명이라도 하려는 듯했다.

‘그렇게 둘 수는 없지.’

들짐승을 발견한 사냥꾼처럼 한차수의 두 눈이 번뜩였다. 그는 비밀이 밝혀져 난감한 사람처럼 볼을 쓸었다.

“사실 의료 센터에서 나가는 대로 부모님을 찾아볼 생각이었습니다.”

“…….”

입술에 꿀을 바른 듯 말문도 떼지 못하는 백담을 바라보며, 한차수은 아련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만약 두 분이 돌아가셨다면 남아 있는 형제자매라도, 그것도 여의치 않는다면 피가 이어진 친척이라도. 누구라도 찾고 싶네요.”

결연한 의지가 드러나는 눈빛과 호소력 짙은 목소리는 덤이었다.

“그래서 다른 누군가의 가족이 될 수 없습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백담 헌터.”

이상하게도 한차수의 말에는 힘이 있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감화되게 하는 힘이.

그래서였을까.

“훌쩍.”

“크흠, 흠.”

병실을 나선 의료진의 눈이 하나같이 물기에 젖어 있었다. 개중에 한 명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억누르려 했던 건지 입술에 핏기가 비쳤다.

“저, 잠시만.”

“어? 아아, 다녀와.”

화장실을 가리키며 하는 말에 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직원은 고개를 숙이고 화장실로 들어갔다. 사람들은 그를 두고 복도를 떠났다.

쏴아아-

“후….”

차가운 물에 얼굴을 적시자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것 같았다. 사내는 물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리며 거울로 제 모습을 확인했다.

달라진 곳은 없었다.

“좋아.”

갑자기 흔들리는 감정에 혹시나 했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걸 확인한 사내는 건물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지나가는 이들이 그에게 눈인사를 건네거나 손을 흔들었다.

사내는 그들에게 자연스레 웃어 보이거나 같이 손을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잠시 뒤, 그는 인적이 드문 건물 뒤편에 홀로 서 있었다.

인기척은 없다. 도청 장치도 없고 수상쩍은 기운도 느껴지지 않는다.

익숙하게 주변 환경을 체크한 사내는 귓바퀴를 감싼 금속 장신구를 툭툭 두어 번 두드렸다.

끼이잉——

주파수를 맞추듯 거친 노이즈가 귓가를 스치길 몇 번. 이내 또렷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지?

사내는 깊은 숨을 한 번 들이켰다가, 두 눈을 질끈 감고 쏟아 내듯 말했다.

“아무래도 작은 도련님께서… 정말로 미친, 아니. 기억을 잃으신 것 같습니다.”

-뭐?

“가족이, 필요하시다고 합니다.”

침묵이 이어졌다. 천천히 느리게 이어지는 숨소리. 사내는 상대가 말을 꺼낼 때까지 기다렸다.

돌연 웃음이 귓전을 채웠다.

-듣던 중에 가장 반가운 소리네.

가족이 필요하다면 그렇게 해 줘야지.

나지막한 읊조림이 고막을 간지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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