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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59화 (59/113)

59화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있나? 쉽게 생각해요, 한차수 씨.”

뭘 쉽게 생각하란 말인가. 심적으로 너무 힘든 나머지 자해를 했다고 인정하란 건가. 아니면 사실은 혼자 목 조르는 게 취향이라 말하라고?

‘그런 걸 취향이라고 말했다간 단박에 정신 병원에 집어넣을 것 같은데.’

지금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정이흔의 눈빛이 꼭 그랬다.

“힘들면 말하세요. 이야기는 언제든지 할 수 있는 거니까요.”

짐짓 온화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눈빛에서 흘러나오는 기세가 남달랐다. 이제 더 숨길 것도 없으니 제 마음대로 하겠다는 마음이 대놓고 보였다.

‘종신 계약의 악몽이 돌아오는 건가.’

어쩐지 그간 계약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다 했더니 이런 사정이 있었을 줄이야.

깊은 한숨을 내쉬자, 백담이 그의 손등을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나름대로 위로해 주려는 몸짓인 듯했으나 그다지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이 녀석도 똑같은 놈이기 때문이다.

“몸에 난 상처든, 마음에 난 상처든 다를 거 없어요. 피가 나면 다들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르잖아요? 트라우마도 똑같아요. 나만 믿어요, 한차수 씨.”

자신이 경험해 봐서 안다며, 싹 낫게 해 주겠다고 백담이 호언장담했다.

‘사람의 팔다리를 뽑고 경동맥을 단번에 그어 내리는 걸 약으로 비유해도 되는 건가….’

역시 동생을 잃은 슬픔을 달래겠다고 원작 한차수를 고문한 캐릭터다웠다. 한차수는 고개를 저으며 그의 손을 떼어 냈다. 한순간이지만 백담의 얼굴이 샐쭉해졌다.

“상처가 아무리 심하다 한들 그런 식의 치료는 원치 않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굳이 그런 데 에너지를 소모하고 싶지 않았다. 기태연을 하루 종일 붙들어 놔도 모자랄 시간. 그걸 범죄자들에게 낭비할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지만 곧이곧대로 말할 수는 없기에 대충 상식선에서 거절했다. 그러자 백담이 싸늘한 목소리로 뇌까렸다.

“한차수 씨, 혹시 일부러 이러는 거예요?”

“예?”

“대놓고 나 좀 봐 달라는 듯이 피를 질질 흘리면서 아무것도 필요 없다 떼쓰면 뭐가 달라질 줄 알아요? 상처가 곪아 들어가는 걸 보면서도 모르는 척, 그런 상처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것처럼 눈 감으면 다 괜찮아질 것 같냐고요.”

“…….”

얘는 왜 이렇게 화가 난 걸까. 한차수는 반사적으로 이유를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본능이 그에게 경고를 보냈다. 이유를 캐물었다간 좋지 않은 꼴을 보게 될 거라고.

잠시 생각하던 한차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제가 아프다는 걸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그럼요?”

“그저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방법으로 제 자신이 나아질 수 있다고 믿지 않을 뿐이죠.”

사실 마음 같아서는 트라우마고 뭐고 멀쩡하니까 죄다 꺼지라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렇게 말하는 순간, 오히려 오해만 더욱 깊어진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여기서 자신은 괜찮다고 수천 번 말한다 한들 그들의 귀에는 아픈 사람이 내지르는 필사의 변명으로만 여겨지리라.

‘어디서부터 해결해야 하는지 감도 안 잡히는군.’

은인으로 여기는 것까지는 그래도 예상 범위 안이었다. 사사로운 목적을 위한 행동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사람의 목숨을 구했으니까.

그런데 이런 식의 오해는 처음이라 무척 당황스러웠다.

‘예전 세상에서도 이런 걱정을 받은 적은 없는데.’

심지어 그가 살던 곳은 환경적인 측면에서 이 세상보다 훨씬 팍팍했다. 한정된 자원과 끊임없는 경쟁. 기대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시기와 질투가 매일같이 그의 목을 노렸지만 끝까지 정신을 놓는 일은 없었다.

그런 자신이 이리도 연약한 취급을 받을 줄이야….

한차수는 감회가 새로웠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렸네, 한차수 씨.”

비록 오래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거 하나는 잘 알겠네요. 당신이 그렇게 마음 약한 소리를 해 댄 게 문제였어. 그러니까 당신네 길드장이 나한테 이딴 걸 뒤집어씌우려 그 지랄을 하지.”

백담이 침대 위에 아무렇게나 내팽개쳐져 있던 면사포를 집어 들어 창문을 향해 집어던졌다. 하늘하늘한 천 뭉치가 돌멩이처럼 빠르게 날아가는 모습에 탄식하는 것도 잠깐.

“길드장님이 씌웠다니… 설마 저게 길드장님 물건이었습니까?”

한차수는 면사포가 백담이 아니라 정이흔의 취향이라는 것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심지어 쓰는 쪽이 아니라 남한테 씌우는 쪽이라니.

‘그런데 그게 나 때문이라고?’

이 무슨 혼란스럽기 짝이 없는 상황인가. 정이흔과 백담을 번갈아 보는 그의 시선이 복잡했다.

“한차수 씨, 잠깐만요.”

정이흔이 정색하며 그를 불렀다. 그러나 한차수가 한 발 더 빨랐다.

“아, 아닙니다. 제가 괜한 걸 물었네요. 설명해 주시지 않아도 됩니다.”

방금 전에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내뱉은 것뿐. 복잡한 속사정 따위는 하나도 알고 싶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길드장님. 제가 무례했습니다. 그냥 듣지 않으신 걸로 쳐 주십시오. 그보다 아까 전에 기태연 실장님의 목소리가 들렸었는데….”

어깨가 붙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지금 굉장히 더러운 오해를 산 것 같은 기분인데.”

백담이 이를 으득 갈며 그를 노려보았다. 어느새 다시 치렁치렁 늘어진 아마색 머리카락이 한차수의 뺨을 쓸었다.

“정이흔이 당신을 갓 태어난 아이보다 연약하게 봐서 그랬던 거니까 소름 끼치는 생각 하지 말래요?”

“예?”

“당신이 나랑 같이 있다가 봉변을 당했으니 당연히 내 얼굴을 보면 쓰러질 게 뻔하다고 말해서 어쩔 수 없이 쓴 거라고.”

사실 그건 일종의 내기였다.

한차수의 트라우마가 정말로 백담 자신으로 인해서 촉발되는가에 대한 내기.

그래서 일부러 반투명한 베일을 준비했다. 만약 한차수가 베일에 가려진 얼굴을 보고도 기절하지 않으면 일 단계 통과.

그 다음은 베일을 벗은 맨 얼굴이었다. 그걸 보고도 한차수가 멀쩡하면 정이흔은 더 이상 백담을 말리지 않기로 했다.

물론 그 내기는 백담의 승리로 끝났다. 그래서 이토록 당당히 한차수에게 고문 참여를 권유할 수 있게 된 것이고.

백담이 해사하게 웃으며 그에게 속삭였다.

“정말 어처구니없지 않아요? 봐 봐, 지금 나랑 이렇게 눈 맞추고 있어도 아무렇지 않잖아. 내가 당신 목숨을 구해 준 걸, 무의식도 아는 거지.”

“…….”

“뭐, 어쨌든 상담은 싫다고 했으니 결국 트레이닝 시스템밖에 답이 없네요. 이번 주 안에 시작할 거니 기다리고 있어요.”

“지금까지 제 말은 귓등으로도 안 들으신 겁니까? 고문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한차수가 인상을 찌푸린 채 말하자 백담이 의미심장한 웃음소리를 흘렸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당연히….”

“맨손으로 기태연 실장을 조져 놓으려면 그 방법밖에 없을 텐데.”

한차수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동그래진 회색 눈동자를 들여다보며 백담이 말했다.

“개발실장이 그러던데요. 그걸 가지고 협상하려다 한차수 씨한테 머리채 잡혔다고.”

한차수는 탄식을 흘렸다.

‘날 도울 방법이 있다는 게 트레이닝 시스템을 말하는 거였군.’

기태연과 접촉 치료에 대해 말하고 있을 때, 개발실장이 끼어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하반신이 통째로 얼어붙은 주제에 잘도 날뛴다 했는데….

“그걸 이용하면 기태연 실장을 상대로 맨손 트레이닝을 할 수 있다는 말이로군요.”

천천히 말을 내뱉는 회색 눈동자에 점차 힘이 깃들었다. 절망 속에서 한줄기 돌파구를 찾아낸 탓이다.

‘그래, 뭐. 오해야 시간이 지나면 풀리기 마련이지.’

백담의 말에 따르면 트레이닝 시스템 안에서는 참가자의 능력치를 조절할 수도 있다는 듯했다. 그렇다면 기태연에게 날린 주먹이 혼자 박살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인데.

한차수로서는 제법 구미가 당기는 이야기였다. 그렇지 않아도 기태연과의 접촉 치료 방식을 바꾸고 싶었으니까.

다만 걸리는 것이 하나 있다면.

“저야 좋지만, 기태연 실장이 허락해 줄지 모르겠습니다.”

자신은 어디까지나 치료를 받는 입장이었다. 만약 기태연이 그런 방식으로는 기운을 전달해 줄 수 없다고 거절하면 어쩔 수 없는 노릇.

그래서 옥상 정원에서도 제대로 물어보지 못하고 은근슬쩍 돌려 말하지 않았었나.

“그런 식으로 치료가 원활히 이루어질지도 모르겠고… 그리고 개발실장이 과연 시스템 사용을 허가해 줄까요.”

그때 머리카락을 적당히 뽑았어야 했는데.

한차수가 걱정을 내비치자 백담이 코웃음을 쳤다.

“내가 그런 거 하나 확실히 안 하고 당신한테 달려왔을까. 이미 기태연 실장을 비롯해 개발실과 전부 이야기 끝났어요.”

트레이닝 시스템에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자마자 백담은 금세 기세등등해졌다.

‘이렇게까지 좋아할 일인가.’

정이흔도 아니고 백담이 이러는 걸 보니 조금 의아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차수 씨 머리는 정말 쓸데없는 생각하는 데만 잘 굴러가는 것 같다니까. 이래서야 혼자서 이 거친 세상 살아 나갈 수 있겠어요?”

그냥 인신공격을 하고 싶어서 날 도와주는 거였나?

한차수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백담이 침대에 털썩 걸터앉았다. 색이 바랜 금실처럼 긴 머리타래가 시트 위로 흩날렸다.

“그래서 말인데, 한차수 씨.”

이거 왠지 불안한데. 한차수는 급히 정이흔에게 도움을 요청하려 했으나 이미 한 발 늦은 뒤였다.

“우리 집 둘째가 되는 건 생각해 봤어요?”

종신 계약보다 무서운 입양 권유가 그를 강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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