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저것들이 설마 날 가지고 무슨 내기라도 했나.’
합리적인 의심이 머릿속을 가득 메울 무렵이었다. 백담이 환하게 웃으며 그의 턱을 붙들었다.
“잘했어요, 한차수 씨.”
“예?”
“트레이닝 시스템에 함께 해도 아무 문제 없겠네요.”
정이흔이 들으란 듯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도 가장 중요한 건 한차수 씨 의사입니다.”
“아하, 이런 식으로 빠져나가시겠다?”
“그럼 아무 말 없이 환자를 그런 끔찍한 환경에 밀어 넣을 생각이었습니까?”
“마치 제가 한차수 씨를 덫에 빠트리기라도 할 것처럼 말하시네요. 놀라워라. 자기가 걸어 다니는 불덩어리라는 사실도 잊고 열사병으로 쓰러진 사람 손을 주물럭거려서 다시 쓰러트릴 뻔한 사람한테서 이런 말을 듣다니…. 너무 감명 깊어서 땀이 다 나네요. 아, 힐러를 부를 필요는 없어요. 다행히도 전 한차수 씨와 달리 자가 치료가 가능하거든요.”
면사포를 벗어 던진 백담의 전투력은 하늘을 찔렀다. 면전에서 쏟아진 거침없는 폭언에 한차수가 다 정신이 아찔할 정도였다.
하지만 정이흔도 만만치 않았다.
“그렇군요, 참 다행입니다. 그게 없었다면 관리국으로 올 때 백담 헌터에게 한차수 씨를 맡길 수 없었을 테니까요.”
“…지금 내가 내 몸만 치료하고 한차수 씨는 치료 못했다고 비꼬는 거예요?”
“제 말이 그렇게 들렸습니까? 이런, 좀 더 조심할 걸 그랬군요. 순수한 감탄이었습니다. 저라면 그 자리에서 한차수 씨를 맡겠다고 나서지 못했을 것 같아서요.”
백담이 흐드러지게 웃었다. 꽃처럼 아름다운 웃음에 한차수는 소름이 돋았다. 저건 무척 좋지 않은 신호였다. 어떤 신호냐 하면.
‘지금 안 말리면 완전 잿더미가 되겠군.’
채신머리없는 두 S급이 곧 전투를 앞두고 있다는 뜻이었다.
‘싸울 거면 나가서 싸우든가 도대체 왜 여기서… 하아.’
아니다. 한탄할 시간도 없었다. 한차수는 급히 손을 들어 두 사람의 눈싸움을 끊어 냈다.
“죄송합니다만.”
서로를 태워 버릴 듯 노려보던 눈동자가 일제히 그를 향해 움직였다. 연한 갈색 눈동자와 붉은 눈동자.
색은 다르지만 열기는 똑같은 두 시선에 한차수는 속으로 혀를 찼다.
“조금 전에 트레이닝 시스템에 함께 하자느니 하는 말을 들은 것 같은데요. 그게 대체 뭡니까?”
“아.”
“하아….”
화제를 돌리려고 대충 던진 말인데 반응이 극명하게 갈렸다. 이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화색이 된 백담과 달리 정이흔은 침울해진 얼굴이었다.
‘이것들이 왜 이래?’
도대체 그놈의 트레이닝 시스템이 뭐길래 이러는 거지.
‘화제를 잘못 고른 건가….’
싸움을 막기 위해 던진 화두였는데 오히려 역효과를 낳은 걸지도 모른다.
이제라도 주제를 바꿔야 하나. 한차수가 한껏 내려간 정이흔의 어깨를 흘끗 훔쳐보며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한차수 씨, 이제는 참을 필요 없어요.”
“예?”
“마음에 들지 않는 놈들은 전부 날려 버릴 수 있게 해 줄게요. 아니, 이렇게 말하면 안 되지. 분이 풀릴 때까지 죽이고 또 죽여서 당신 마음속에 응어리진 모든 울분이 잿더미가 될 때까지 도와주죠.”
이게 무슨 원작의 한차수가 당한 고문 같은 소리인가.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기겁하는 한차수의 두 손을 꼭 붙들며, 백담이 들뜬 얼굴로 외쳤다.
“걱정하지 말아요. 비록 한차수 씨는 답도 없는 허약한 몸이지만 기술만 제대로 익히면 사람 팔 하나 빼는 건 일도 아니니까. 아, 한차수 씨는 머리채 잡는 걸 더 선호한다고 했던가요? 잘됐네요. 이렇게 머리를 듣고 여기 밑을 그으면….”
“백담 헌터, 단어 사용에 주의해 달라고 분명 말씀드렸을 텐데요.”
“하, 진짜 짜증나게. 당신이 한차수 씨 아빠예요 뭐예요?”
“…….”
백담에게서 자초지종을 끌어내는 데는 여러 우여곡절이 따랐다. 주로 정이흔에 의한 방해였지만… 뭐, 정리하자면 다음과 같았다.
“그 트레이닝 시스템이라는 걸 이용하면 제가 직접 범인들을 신문할 수 있다는 거로군요.”
백담에 따르면 기태연과 개발실 사이에 분쟁이 야기된 것도 트레이닝 시스템 때문이었다. 받을 거 다 받고 튀어 버린 탓에 기태연이 개발실을 뒤엎은 거라고.
‘하긴 그 정도 명분 없이 일을 벌일 리가 없지.’
어쩐지 제 해독제를 공급해 주는 곳을 왜 괴롭히나 했다. 이런 뒷사정이 있었던 거로군.
그렇지 않아도 기태연의 편으로 기울어졌던 마음의 추가 확 하고 쏠렸다. 딱히 개발실이 제게 한 짓거리가 괘씸해서는 아니었다.
그냥, 당해도 싼 놈들이었다.
‘머리를 좀 더 뜯을 걸 그랬나?’
어차피 반항 스킬에 압도되어 있던 상태였는데 좀 더 날뛸 걸 그랬다. 아쉬움에 손을 쥐었다 펴는데 백담이 그의 손을 붙잡아 왔다.
“고문하다가 쓰러질까 하는 걱정 따위는 안할 거죠? 말했잖아요, 가상 현실이라고. 그 안에서는 상대에게 하고 싶은 걸 무엇이든 할 수 있어요. 그래, 이를테면 사람이 느낄 수 있는 모든 고통을 선사할 수 있죠.”
백담의 눈이 희번덕거렸다. 분위기로 봐서는 지금 당장 달려가 괴한들의 사지를 절단 낼 것 같았다.
다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걸 제가 왜 해야 합니까?”
한차수는 범인들에게 별다른 감정이 없었다. 그들이 사태의 원인이 되어 자신이 다친 게 맞긴 했다. 하필이면 왜 자신이 백담의 집에 있을 때 그런 짓을 저지른 건지 원망하기도 했고.
하지만 그렇다고 직접 사지를 뜯고 목을 그을 정도로 분노하느냐면 그건 또 아니었다.
“왜 해야 하냐니, 당연히…!”
“…?”
백담은 기세 좋게 외친 것치고는 제대로 된 말을 잇지 못했다.
말문이 막힌 걸까. 아니면 하고 싶은데 할 수 없는 말이 있는 걸까. 입술을 잘근잘근 깨무는 백담을 구원한 건 의외의 존재였다.
“한차수 씨가 안 좋은 기억을 떨쳐 내지 못할까 걱정이 되서 그렇다고 하더군요.”
정이흔의 말에 한차수의 고개가 휙 하고 돌아갔다.
무슨 말이냐는 듯한 그의 눈빛에 정이흔이 한숨을 내쉬었다.
“마지막으로 하나만 물어보고 싶습니다만, 아직도 상담받을 생각은 없는 겁니까?”
“그게 지금 여기서 왜…. 잠깐만요, 설마.”
트레이닝 시스템을 통한 물리적 범인 취조와 자신에 대한 걱정. 그리고 상담 권유.
세 가지 단서가 서로 맞물리며 하나의 가정을 만들어 냈다.
“설마 제가 피습당한 기억을 떨쳐 내지 못할까 봐 그 트레이닝 시스템인지 뭔지를 권유한 겁니까?”
“…그래요.”
백담이 퉁명스레 답하며 홱 고개를 틀었다. 한차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도대체 어쩌다 저런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게 된 거지?’
차라리 대놓고 힘들고 무섭다며 징징거렸다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혹시나 백담이 정이흔처럼 은인이라며 달라붙을까 봐 최선을 다해 담담한 태도를 견지했던 한차수는 거의 혼이 나갈 지경이었다.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트라우마니 뭐니 하는 것도 없고요. 도대체 어쩌다 그런 오해를 하게 된 겁니까?”
“…….”
“…….”
두 남자가 동시에 시선을 외면했다. 한차수는 당장에 그들에게 단검을 날리고 싶은 걸 참으며 애써 입을 열었다.
“그냥 말하셔도 됩니다. 무슨 말을 들어도 멀쩡할테니 염려하지 마세요. 그러니 해명할 기회를 주시죠, 제발.”
“하….”
제발이라는 단어가 등장하자 백담이 이를 까득 갈았다.
“그냥 말해요. 아까 확인한 걸로도 충분하지 않아요? 한차수 씨 괜찮은 거 봤잖아. 당신 생각보다 연약하지 않다니까요?”
저건 또 무슨 말일까. 한차수가 눈살을 찌푸리는데 정이흔이 깊은 한숨을 토해 냈다.
“지금 말고 다음에 하죠.”
“아뇨, 지금 말씀해 주십시오.”
일어서려는 남자의 손을 붙잡으며 한차수가 단호하게 말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넘어가는 게 제게는 더 힘듭니다.”
지금 이 상황을 어물쩍 넘기면 안 된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한차수가 뜻을 꺾지 않자 정이흔이 어쩔 수 없다는 얼굴로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잠시 뒤, 이야기를 들은 한차수는 그대로 땅 속으로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일부러 본 건 아닙니다. 그런 모습을 볼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어요. 하지만 보게 된 이상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노릇 아닙니까. 다른 누구도 아닌 한차수 씨가 그렇게 괴로워하는데… 예, 상담을 권유한 것도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지금껏 숨겨서 미안합니다.”
미치겠군.
한차수의 눈이 허공을 정처 없이 떠돌았다.
‘그러니까 이게 다… 가사 상태에 들고자 한 내 노력이 들킨 결과라는 건가.’
정말 어처구니가 없었다.
첫째로 그 모습을 보고 이런 거창한 오해를 한 주인공이 어이가 없었으며, 둘째로는.
‘이거 해명이 불가능한 상황인데.’
그게 다 오해라고 말하지 못하는 자신의 처지가 어이없었다.
원인을 알게 되면 뭘 하나. 진실을 밝힐 수가 없는데. 사실은 공포에 허우적거려 자신도 모르게 자해를 한 게 아니라 귀걸이를 해제하려고 일부러 목을 조른 거라 말할 수도 없지 않은가.
아니, 오히려 진실을 말하면 오해는 더욱 깊어질 게 뻔했다.
‘취향… 사실은 목을 조르는 게 취향이라고 말해야 하나.’
자신도 백담의 취향을 존중해 줬으니, 그도 자신을 도와주지 않을까.
말도 안 되는 생각이라는 건 안다. 하지만 이렇다 할 대안이 없지 않은가. 한차수가 진지하게 고민하는데 백담이 은근슬쩍 그의 손을 붙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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