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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57화 (57/113)

57화

이번에는 확실히 꿈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

“——!!”

한차수는 끔찍한 취향을 화가가 제멋대로 덧칠한 듯한 세계 안에 놓여 있었다.

흐물거리는 바탕도 모자라 반쯤 무너져 내린 광원. 거기다 한술 더 떠 모자이크 같은 이목구비를 가진 인형이 주위를 빙글빙글 맴돌았다.

뭐라고 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저 네모난 구멍이 입이 맞다면 그들은 아마 대화를 시도하는 중이리라.

“———”

“——….”

“—, ———!!”

언제쯤 깨어날 수 있을까.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한차수는 이내 푹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깨고 싶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그에게 달라붙은 시선들 때문이었다.

“나 참.”

저들끼리 잘만 떠들던 모자이크 인간들이 일제히 그를 향해 눈을 모았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뭉개진 주파수처럼 웅웅거리던 녀석들의 목소리가.

“언제까지——”

“차수, 너——”

점점 형체를 띠기 시작했다.

철판을 쇠못으로 긁어내리는 듯한 끔찍한 음성에 한차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젠장.”

안 되겠다, 튀자.

한차수는 귀를 틀어막으며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꿈속이라면 페널티고 뭐고 적용되지 않겠지.

그가 불길한 빛을 뿜어내는 광원을 향해 한 발짝, 걸음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실패작!”

“…!”

묵직한 목소리였다. 힘과 감정이 실린 사람의 음성. 악에 받쳤다고 표현해도 좋을 그 소리가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다.

“아.”

그리고 그대로 한차수는 무너져 내렸다. 저항할 수 없는 힘에. 대항할 수 없는 무의식적 공포에.

“그래, 이거였지….”

꿈이 선사하는 안락한 무지가 햇살에 녹아내리는 안개처럼 걷혔다. 현실로부터 한걸음 물러서 내리눌렀던 눈꺼풀이 억지로 열렸다.

기절하기 직전, 반항 스킬이 해제되자마자 그는 끝 모를 공포심에 억눌렸다.

“하.”

숨통이 틀어막히고, 손발이 굳었다. 이내 절망이 몸속 깊은 곳에서부터 뛰쳐나와 그를 지배했다.

그래, 그건 자신이 어찌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를 바닥으로 짓누른 절망감은 원작 한차수의 것이었으므로.

쨍그랑!

쨍강!

깨달음이 기폭제가 되어 세계가 터져 나갔다. 한 겹이라고 칭하기에도 모자란 가녀린 보호막이 총에 맞은 듯 산산이 부서졌다.

뺨을 내리긋고, 어깨 사이로 파고드는 유리 조각을 느끼면서도 한차수는 담담히 생각을 이어 나갔다.

고통이 생생해질수록 꿈의 수명은 짧아지니까.

아마도 그는 곧 꿈에서 깨어날 수 있을 터다.

‘반항 스킬을 해제했는데 왜 공포심이 살아났을까.’

한차수는 가만히 눈을 돌려 자신을 향해 손가락질하는 인형을 응시했다. 찰나의 순간, 회색 눈동자에 빛이 움텄다 사라졌다.

‘그건… 그냥 공격성을 높이는 스킬이 아니었군.’

숙적을 상대로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도록 스스로를 방어하는 스킬이었던 거야.

그는 원작 한차수가 쓴 일기를 떠올렸다. 실패작이라 취급받은 과거. 그로 인해 무너져 내린 그의 정신과 뿌리 깊은 열등감.

‘그럼 숙적이란 건 원작 한차수의 과거와 관련된 인물이라는 건가.’

그렇다면 한가하게 꿈속에 누워 있을 시간이 없었다. 당장 몸을 회복하고, 숙적이 다시 나타날 때를 대비해야 했다.

단순한 적도 아니고 ‘숙적’이라 칭할 정도라면 상대도 분명히 제게 그리 좋은 감정을 품었을 리는 없기에.

“스파링이고 뭐고 때려치워야겠어.”

기태연의 살가죽을 벗겨 걸치는 한이 있더라도 당장에 빌어먹을 상태 이상을 해제해야겠다. 그러고 나서 이곳을 떠나든, 아니면 숙적을 죽이든 해야지.

아, 그러고 보니 개발실장이 제게 도움을 줄 수 있다고 했던가?

“음….”

숙적을 향한 분노에 형형했던 안광이 잦아들었다. 개발실장의 머리카락을 죄 쥐어뜯어 놓은 게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이걸 어쩐다. 고민하는 한차수의 귓가에 파공음이 들렸다.

쌔애액-!

높은 곳에서 거대한 유리 조각이 그의 가슴을 향해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한차수는 반사적으로 몸을 굴리려다 그만뒀다.

‘저걸 맞으면 꿈에서 깰 수 있으려나.’

한차수는 눈을 감았다.

끄드득.

익숙한 소리가 몸 속 가득 울려 퍼지고.

“한차수 씨, 정신이 듭니까? 하… 다행이에요.”

“잠깐, 나는 못 들어간다고? 이거 어처구니가 없군. 한차수를 여기까지 데려온 게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야?”

“일어났으니 이제부터는 내가 치료하죠. 아, 환자가 쓰러지든 말든 옥상에 혼자 버려두는 쓰레기 같은 의료 센터 직원분들은 좀 꺼져 줬으면 좋겠는데요.”

“…그러다가 센터장 귀에 들어가면 여기서 영영 꺼지게 될지도 모릅니다, 백담 헌터.”

“흥.”

한차수는 생각했다. 어쩌면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한 걸지도 모르겠다고.

‘꿈속에서 더 머물러야 했나.’

그만큼 현실은 난장판이었다. 어디서부터 정리를 해야 할지 모르겠을 정도로.

일단 그가 당면한 문제 중 가장 시급한 처리를 요하는 건 정이흔이었다.

“한차수 씨, 왜 그럽니까. 어디 아픈 데라도 있습니까?”

제 위에 엎드리다시피 한 채 자신의 손을 꼭 붙잡고 있는 남자 말이다. 거리가 어찌나 가깝던지. 고개를 돌리면 이대로 콧잔등이 부딪힐까 봐 겁이 날 정도였다.

“이쪽 좀 보세요.”

볼 수가 있겠냐고.

한차수는 천장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힘겹게 입을 움직였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까….”

부담스러우니 좀 비키고 기태연이나 데려와라.

분명 방금 전까지 그의 목소리를 들은 것 같은데 눈을 뜨니 어째선지 보이질 않는다.

‘그 녀석이 있어야 상태 이상을 해제하는데.’

“윽.”

정이흔을 대충 옆으로 밀어내고 몸을 일으키는데 머리가 쩡 울렸다. 시야가 핑글 하고 몇 바퀴 돌아 도저히 눈을 뜨고 있을 수가 없었다.

“한차수 씨!”

정이흔이 곁에서 호들갑을 떨었다. 다시 눕히려는 건지 어깨며 등을 쓸어 대는 손이 귀찮았다.

“아직도 이마가 불덩이네요.”

“…?”

그때, 누군가 얼굴을 가린 손을 치웠다. 동시에 이마에서부터 온몸으로 퍼져 나가는 부드러운 힘.

한차수는 눈을 뜨지 않고도 상대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백담이로군.’

몇 번 받아 봤다고 금세 기운을 파악할 수 있었다. 따뜻한 기운이 몸속으로 흡수되는 게 느껴졌다.

“하아….”

겨우 살 만해졌군. 한차수는 한결 가벼워진 몸을 만끽하며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 그대로 굳어 버렸다.

처음 보는 백담의 모습이었다.

허리까지 길게 늘어져 있던 머리카락이 긴 막대 같은 걸로 깔끔히 고정되어 있었다. 덕분에 그동안 가려졌던 날렵한 턱 선이 드러났다. 그의 추종자들이 본다면 두 눈을 번쩍 뜰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이걸 이길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그게 뭐냐면.

“왜 면사포를 쓰고 계신 겁니까?”

“뭐라고요?”

한차수는 뒤늦게 제가 속마음을 그대로 말해 버렸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그만큼 놀라운 시각적 충격이었으니까.

백담은 속이 비치는 하늘하늘하고 얇은 면직물을 뒤집어쓰고 있었다. 저런 종류를 뭐라고 부르는지 정확한 용어를 알지는 못했다. 하지만 결혼하는 이들이 뒤집어쓴 걸 본 적은 있었다.

‘새하얗고, 자수가 놓여 있고, 끝단에 레이스가 달렸으니… 면사포가 맞지 않나?’

그런데 왜 자신을 저리 기분 나쁜 눈으로 바라보는 걸까. 가만히 생각하던 한차수는 곧 자신의 잘못을 깨우쳤다.

‘내가 자기 취향을 지적했다고 생각한 모양이로군.’

한차수는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그는 백담과 면사포가 몹시 잘 어울린다고 생각했다.

아마색 머리카락과 연한 갈색 눈동자. 가만히 서 있어도 성스러움을 뿜어내는 사내의 얼굴을 면사포가 반쯤 덮고 있는 모습은 그 자체로 고아한 느낌을 자아냈다.

게다가 백담은 항상 하얀 정장이나 밝은 계열의 옷을 입곤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였는데 당장 식장에 들어가더라도 무리 없을 모양새였다.

그래도 잘못한 건 잘못한 거니까.

“기분 나쁘셨으면 죄송합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었습니다.”

따지자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답다는 쪽이 맞았다. 한차수는 진심을 담아 백담에게 사과했다.

“오히려 잘 어울린다고 생각합니다. 방금 전에는 놀라서 저도 모르게 질문처럼 말한 거고요.”

“…….”

사과를 받은 백담의 눈빛이 묘했다. 얇은 천 너머, 옅은 갈색 눈동자가 그를 유심히 살폈다.

한차수는 그가 입을 열 때까지 침묵을 지켰다. 본의 아니게 무례한 말을 내뱉은 사람으로서 마땅히 지켜야 할 침묵이었다.

마침내 면사포에 가려진 입술이 틈을 벌렸다.

“아무렇지도 않아요?”

“…뭐가 말입니까?”

설마 아직도 자신이 그의 취향에 어깃장을 놓았다고 생각하는 걸까. 한차수는 지체 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백담의 입술이 살짝 들려 올라갔다.

“흠.”

고개를 기울인 그가 소리 없이 웃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걸까. 오싹한 느낌에 한차수가 몸을 뒤로 젖히는데 무언가 시야를 가렸다.

“…?”

사락거리며 떨어져 내린 건 방금 전까지 백담이 쓰고 있던 면사포였다.

“지금은 어때요?”

다음에는 백담이 뭘 입고 와도 아무 말도 하지 말아야지. 한차수는 대답을 강요하는 백담을 바라보며 힘겹게 입을 열었다.

“둘 다 잘 어울립니다. 가리고 있었을 땐 면사포 때문에 신비로운 느낌이 났는데 지금은 뒤에 꽂고 있는 그, 막대가 더 잘 보여서 그런지 색다르게 다가오네요.”

이 정도면 무난한 대답이겠지. 한차수는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들었어요?”

백담이 이것 봐라, 하는 얼굴로 정이흔을 바라봤다. 그는 뭐가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미간을 모으고 있었다.

“…?”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묘한 기류에 한차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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