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화
내가 왜 이 사람의 머리카락을 뜯고 있는 거지?
의문을 떠올리기가 무섭게 까닭 없는 분노가 가슴 한복판을 꿰뚫었다. 방금 떠오른 생각을 당장 지우라고 재촉하듯 말이다.
“윽…!”
강한 분노와 누르기 힘든 반항심. 혈관을 달구고 척수를 꿰뚫는 열기에 눈앞이 혼미했다.
아니, 흐리멍덩해진 건 그의 이성이었다. 눈에 보이는 사물은 너무나도 또렷하기 그지없었다.
너무 잘 보여서 도리어 부숴 버리고 싶을 만큼 말이다.
‘짜증나.’
이유 모를 악의가 들끓었다. 이를 악물어도 치솟는 감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마치 한창 때의 사춘기 소년처럼. 끓어오르는 혈기를 주체 못하는 멍청한 반항아처럼 말이다.
‘그래, 반항아.’
그 단어를 떠올린 순간 누군가 망치로 그의 머리를 때린 것 같았다.
“이런 미친.”
한 가닥 남은 이성이 휘발되어 가는 정신을 붙들었다. 차가운 물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그의 눈이 크게 뜨였다.
“하…!”
드디어 이게 어떻게 된 건지 이해 가기 시작했다.
이건 스킬의 효과가 분명했다. 방금 전 제멋대로 발동된 반항 스킬 말이다.
‘해제, 스킬 해제!’
숙적이니 뭐니 하는 걸 찾을 겨를 따위는 없었다. 세뇌라도 당한 것처럼 감정과 정신이 제멋대로 날뛰는데 숙적을 찾아 뭘 어쩌란 말인가.
멍청한 얼굴로 상대에게 달려가 주먹을 날리기라도 할까?
한차수는 입 안의 여린 살을 깨물며 스킬 해제를 연신 외쳤다.
‘반항 스킬 해제!’
부름에 응답하듯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주의! 숙적이 반경 10m 내에 존재합니다. ]
상관없다고. 이를 득득 간 한차수가 바닥에 주먹을 꽂아 넣었다. 자유로이 내버려 뒀다간 개발실장의 목을 조를 것 같아서였다.
‘스킬 해제해, 당장!’
[ 스킬 해제 시, 숙적에게 효과적으로 대응할 수 없게 됩니다. ]
[ 스킬 ‘반항’을 해제하시겠습니까? ]
[ Y / N ]
아주 끝까지 구질구질하게 구는구나.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핏물을 삼키며, 한차수는 이를 악물었다.
바들바들 떨리는 손끝이 허공을 짚은 순간.
“——!”
시야가 명멸했다.
그리고 한차수는 왜 시스템창이 그리 질척이며 스킬 해제를 말렸는지 깨닫게 되었다.
***
햇빛 아래서 이렇게 날뛰는 건 참 오랜만이었다.
“으아악! 죽어, 죽으라고! 이 쓸모없는 새끼야, 제발 그냥 죽어 버려!”
“실장님, 실장님 어디 계세요! 1급 게이트가 터졌습니다, 실장님!”
“이 머저리들아, 정신 차려! 그거 환각이야! 다 뻥이라고!”
관리국 직원들을 가지고 노는 것도 오랜만이고.
“오늘 오길 잘했군.”
금명결은 한차수를 등지고 선 채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태양 빛을 받은 그의 눈이 보석처럼 반짝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오늘 한차수를 만나러 온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비록 병문안을 위해 영국에서 공수해 온 약을 사발째로 들이켜야 했지만, 뭐 견딜 만한 고통이었다.
덕분에 이리 즐거운 경험을 할 수 있게 되지 않았는가?
“금명결 헌터, 대체 왜 이러는 겁니까? 우리는 의료 센터장의 부탁에 찾아온 것뿐입니다. 제정신이라면 당장 공격을 멈추고 물러나세요!”
용케 저주에 걸리지 않은 헌터 중 한 명이 그를 향해 외쳤다. 목소리 가득 담긴 노여움에 금명결은 고개를 기울였다.
“음… 미안하지만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는데. 다짜고짜 무기를 들고 나한테 달려들다가 혼자 나자빠진 건 그쪽이잖아?”
“지금 뻔뻔하게 무슨 소리를…!”
검을 든 헌터가 치를 떨며 그를 노려보았다. 칼날에서 거친 기운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금명결이 환히 웃으며 발밑을 가리켰다.
“굳이 내 입으로 설명하기 뭐하지만 어쩔 수 없군. 자, 잘 봐. 내가 한 일이라곤 뻔하다 못해 식상한 덫 몇 개 깐 거밖에 없다고.”
실제로 금명결이 설치한 함정은 그리 심각한 종류가 아니었다. 눈만 있다면 얼마든지 피할 수 있는 그림자 덫.
관리국 헌터들이 그걸 눈치채지 못하고 꼬리에 불붙은 망아지처럼 달려든 건 제 탓이 아니었다.
“그러길래 누가 그리 개떼처럼 달려들라고 했나.”
“이…!”
까득 이를 간 헌터가 몸을 떨었다. 금명결은 피식 웃음을 흘리고 손을 털었다.
“그래도 내가 제대로 된 공격을 하지 않았다는 걸 알려 준 건 고맙군. 안 그래도 심심하던 참이었거든.”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저주에 걸리지 않은 이들의 그림자 속. 몰래 숨죽여 있던 악령들이 몸을 일으킨 탓이었다.
“으아악!”
“미친, 꺼져, 꺼지라고!”
“다들 정신 차리고 대열 이탈하지 마!”
어디, 얼마나 더 버티려나.
악령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관리국 헌터를 보는 눈이 즐거움에 반짝였다.
‘기태연도 제법 잘 싸우고 있군.’
기태연은 의료 센터장이 안보실을 이끌고 나타나자마자 바로 반대편으로 자리를 옮겼다. 자신과 함께 싸우고 싶지 않다거나 그런 건 아니고, 아마도 한차수 때문인 듯했다.
‘그러고 보니 이쯤이면 한차수도 원하는 만큼 스트레스를 풀었겠군.’
금명결이 안보실을 쥐락펴락 가지고 논 건 단순히 즐거움만을 위해서가 아니었다. 그는 그저 순수하게 한차수를 도와주고자 했을 뿐이다.
“생각보다 거친 면이 있단 말이야.”
설마 안보실이 등장하자마자 개발실장의 머리채를 휘어잡을 줄이야. 큭큭, 낮은 웃음소리가 금명결의 잇새로 터져 나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때 그 장면은 잊을 수가 없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인가 놀라 입을 헤벌리던 개발실 놈들이라니.
‘S들한테만 강한 줄 알았더니 그것도 아닌 모양이야.’
한차수는 아무래도 제 생각보다 훨씬 대범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상황 판단이 빠르다고 해야 할까.
판세가 뒤집어질지도 모른다는 걸 바로 알아차리고 태도를 바꿔 상대를 깔아뭉개려 하다니. 생산계인 게 여러모로 아까운 남자였다.
‘하다못해 건강이라도 괜찮았다면 공략대 참모 노릇이라도 시킬 수 있었을 텐데.’
아쉽군, 아쉬워.
그렇게 무의식중에 한차수가 제 사람인 것처럼 생각을 이어 나가던 때였다.
“젠장, 머리가…. 윽.”
뒤편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귀 기울여 듣지 않으면 결코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음성이었다.
“하아, 하…. 큭….”
“한차수 씨?”
“…….”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의 귀를 스치고 지나가는 건 끊어질 듯 가는 숨소리.
금명결의 얼굴이 차갑게 굳었다. 언제나 여유롭던 눈동자에는 그 어떤 웃음기도, 태만함도 없었다.
후욱!
끼아아아아악!
바람이 거세게 요동치는 소리가 들리고, 하늘 높이 치솟은 검붉은 장막이 순식간에 사방으로 흩어졌다. 금명결의 명령으로 한차수를 제 아래 감춰 두었던 악령들이었다.
이윽고 태양 같은 눈동자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들어찼다.
“한차수!”
언제나 유쾌함이 묻어 나오던 목소리에 실린 다급함. 좌중을 묵직하게 찍어 내리는 거친 목소리는 멀리서 전투 중이던 기태연의 정신을 사로잡았다.
‘한차수? 한차수에게 또 무슨 일이 생겼나?’
기태연은 달려드는 곽 실장의 다리 사이를 재빨리 걷어차고 고개를 돌렸다.
고함이 터져 나온 곳은 방금 전까지 그가 한차수와 함께 있던 반대편 옥상. 금명결이 악령으로 만든 결계를 등지고 수문장처럼 서 있던 자리였다.
그곳을 확인한 기태연이 짓씹듯 욕설을 내뱉었다.
“젠장.”
금명결이 정신을 잃은 한차수를 다급히 추스르는 모습이 보였다. 단순한 기절이 아닌 듯, 맥박을 확인하는 그의 얼굴이 심각했다.
“어디다 한눈을 파는 거냐, 기태연!”
“하… 미치겠네.”
설마 아까 전 그의 몸에서 남은 기운을 긁어낸 게 잘못된 걸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한차수의 몸에 남은 기운을 모두 걷어내지 않는다면 그는 며칠 뒤 중정 호수에서 익사체로 발견될 테니까.
‘아직도 다 걷어낸 게 아닌데 이를 어쩐다.’
한차수를 바라보는 그의 눈이 금명결 못지않게 심각했다.
“이게 자꾸 어딜 흘끔흘끔 보… 컥!”
쿵!
안 되겠군.
뒤돌려 차기로 곽실장을 날려 버린 기태연이 차분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휴전하지.”
“…….”
“내가 진 걸로 합시다.”
곽실장이 처박힌 곳으로부터 한 발자국 떨어진 자리. 그곳에 소리 없이 서 있던 의료 센터장이 그를 노려보았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아마 그녀의 손에 들려 있는 독침이 온 몸을 강타할 터다.
하지만 지금은 휴전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자신이 아니라, 한차수를 위해서.
“사람이 죽어 가잖습니까. 그냥 사람도 아니고 관리국에 아주 중요한 사람인데.”
옥상 반대편, 창백한 얼굴로 쓰러진 남자를 턱짓하며 하는 말에 의료 센터장이 으득 이를 갈았다.
“그게 지금 항복하겠다는 사람의 자세인가?”
“그럼 뭘 어떻게 해 드릴까요. 음, 무릎이라도 꿇어 드려야 하나.”
귀찮게시리, 한숨을 내쉰 기태연이 그대로 털썩 무릎을 꿇었다.
“자, 항복합니다. 그러니 이제 가서 불쌍한 환자 좀 살려 주시죠.”
뻔뻔하기 짝이 없는 요구에 의료 센터장의 눈썹이 하늘로 치솟았다. 하, 차가운 숨을 내뱉은 그녀가 성큼 발을 내디뎠다.
“사람을 악덕 의사 취급하지 마라, 이 망나니 새끼야. 네가 그딴 식으로 굴지 않아도 우리 의료 센터는 아픈 사람을 못 본 척하지 않아. 그게 관리국에 중요한 사람이든 아니든, 한 번 받은 환자를 내치는 일은 없어.”
싸늘한 일갈이 무릎 꿇은 기태연의 위로 떨어져 내렸다. 흠, 기태연은 자신을 지나치는 의료 센터장의 등을 바라보며 고개를 기울였다.
“나름대로 성의를 표시한 거였는데.”
“입 다물어!”
쌔액-!
정확히 목을 향해 날아온 독침을 피하며 기태연이 몸을 일으켰다.
아직도 정신 못 차리는 안보실 녀석들을 치우고 의료 센터장을 위해 길을 뚫어 주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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