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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55화 (55/113)

55화

기운 전달이라는 괴상한 이름의 치료를 받은 지 두 번째. 한차수는 손끝에 남은 저릿한 감각에 저도 모르게 손을 털었다.

“…….”

뭔가 느껴져 고개를 살짝 들자 기태연과 눈이 마주쳤다.

“불편한 곳이 있습니까?”

“아닙니다. 그냥.”

가슴께를 어루만지던 한차수는 눈썹을 찡그렸다. 기태연이 상체를 낮춰 그와 눈높이를 공유했다.

“아픈 데 있으면 재깍재깍 말합시다. 숨겼다가 더 귀찮아지는 경우 못 봤습니까?”

“…….”

한차수는 미간을 모은 채 말이 없었다. 뭔가를 생각하는 듯했다. 잠시 뒤, 그가 조심스레 운을 뗐다.

“꼭 이런 식으로 기운을 전달할 수밖에 없는 겁니까?”

기태연이 더 말해 보라는 듯 눈썹을 까딱였다. 한차수가 흠흠, 헛기침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접촉에도 다양한 방법이 있지 않습니까. 굳이 이렇게 손을 붙잡고 있는 것 말고도, 맨손 트레이닝이라든지….”

한차수는 은근슬쩍 스파링으로 넘어가기 위한 운을 띄웠다. 기태연이 헛웃음을 터트렸다. 동시에 뒤쪽에서 누군가 쩌렁쩌렁한 목청을 자랑했다.

“나! 내가 해결할 수 있어!”

고개를 돌리자 그곳엔 이글거리는 눈의 개발실장이 있었다. 제멋대로 엉킨 녹색 머리카락이 불붙은 잡초처럼 휘날렸다.

“한차수 씨, 나한테 맡겨 봐. 내가 아주 쌈박하게 해결해 줄 테니까.”

“…….”

“잠깐 이리 와 봐, 어? 내가 이런 얘기 아무한테나 해 주는 거 아닌데 한차수 씨가 안타까워서 그래.”

굉장히 사기꾼스러운 대사에 한차수는 고개를 저었다.

“됐습니다.”

“어? 어디 가? 한차수 씨, 지금 내가 필요할 텐데? 나 아니면 저 시커먼 놈이랑 하루 종일 손 붙잡고 쎄쎄쎄나 해야 된다고!”

쎄쎄쎄가 뭔데? 한차수는 관심 없다는 얼굴로 자리를 떠났다. 뒤에서 기태연이 피식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냐, 임 실장. 우리 환자는 미친놈이랑 손잡는 것보다 나랑 쎄쎄쎄하는 게 더 좋나 보다.”

“이거 진짜 또라이 아냐!”

“폐로 담배 펴 본 적 있나? 꽤 재미있는 실험이 될 텐데.”

“…….”

침묵하던 개발실장이 한 번 더 한차수를 붙들고 늘어졌다.

“한차수 씨,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우리한테 붙으면 저 미친놈을 합법적으로 두들겨 팰 수 있다니까!”

한차수의 몸이 멈칫했다. 기태연의 눈썹이 들려 올라가고, 개발실장의 얼굴에 화색이 만연했다.

슬쩍 고개를 튼 한차수가 미치광이 같은 개발실장과 기태연을 곁눈질하더니 조용히 물었다.

“좀 더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습니까?”

“크흠흠! 아, 그거야 한차수 씨가 우리한테 협조한다고 약속하고 이번 일에 대해서 아무런 항의도-.”

“됐습니다.”

“아니, 사람이 왜 그렇게 성급해? 좀 차분하게 생각해 봐, 이런 기회는 두 번 다시 안 온다니까.”

“흠…. 임청문 실장님이라고 하셨습니까?”

“어… 그런데.”

한차수가 갑자기 다가올 줄 몰라, 임청문은 당황했다. 게다가 멀리서 볼 때와 달리 분위기가 뭔가… 묘하게 고압적이었다. 저 칙칙한 회색 눈동자 탓인가. 아니, 그러고 보니 키도 생각보다 크잖아?

한차수를 올려다보는 임청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까 전에는 되게 허약해 보였는데.’

기태연의 손을 붙잡고 있을 때만 해도 그렇게 아파 보이는 사람이 따로 없었다.

‘이게 바로 비교군의 중요성인가!’

임청문이 새로운 깨달음을 얻든 말든, 한차수는 그를 향해 거침없이 말을 붙였다.

“개발실장이면 개발실의 모든 걸 진두지휘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해도 됩니까?”

“음, 맞지?”

“그럼 기태연 실장님을 죽이는 데 쓰려 했던 개틀링 건. 그러니까 킬킬이를 탄생시키는 데도 실장님의 손길이 많이 닿았겠네요.”

이건 우리한테 관심이 생긴 거라도 봐도 되겠지? 임청문의 눈이 반짝였다.

그렇지 않아도 킬킬이의 죽음에 무척 상심했던 그는 한차수가 킬킬이에 대해 묻자 울컥 감정이 요동쳤다.

“그래, 내가 우리 킬킬이의 아빠나 다름없지. 그 애를 구성할 부품을 내가 하나하나 손수 골랐다고. 크윽, 이렇게 끝날 애가 아니었는데. 저 미친놈만 아니었어도….”

임청문이 이를 바득 갈았다. 불쌍한 킬킬이만 생각하면 속에서 천불이 일었다.

“많이 아쉬우셨겠습니다. 그렇게 소중한 킬킬이를 위해서 인식 교란에 자체적으로 공격까지 하는 벽도 세우셨는데.”

“격리벽? 그건 괜찮아. 만들기 어려운 것도 아니고.”

코웃음 치는 임청문의 온몸에서 자만심이 뿜어져 나왔다. 고작 그런 걸 가지고 뭘 놀라냐. 이 덜 떨어지는 것들아, 하는 개발실 특유의 재수 없는 태도였다.

“아하….”

의미심장한 미소와 함께 한차수가 살짝 목을 굽혔다. 툭, 임청문의 얼어붙은 무릎 위에 발이 올라왔다.

임청문의 눈이 휘둥그레지는데 머리 위에서 차분한 목소리가 울렸다.

“관리국 소속 공무원들의 치료를 위해 세워진 의료 센터에 살상 무기를 설치. 그를 은폐하기 위해 비전투 계열 각성자 살해와 은닉이 가능한 특수 장치를 설치하셨다 이 말이군요.”

“…어?”

무심한 얼굴과 달리 살벌하기 짝이 없는 단어 선택. 임청문은 도움을 구하듯 다급히 고개를 돌렸다.

곁에 함께 무릎 꿇려 있던 부실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자, 잠깐만.”

“각성자 관리국 소속 지원개발실 임청문 실장님.”

한차수가 한숨을 내쉬었다. 무게감 실린 숨결에 임청문의 등줄기에 솜털이 바짝 섰다.

‘어?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은데.’

뭐지, 뭐지? 임청문은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그래 봤자 어차피 미수로 끝나서 징계도 안 나올 텐데.’

징계를 받아 봤자 언제나처럼 실효성 없는 벌점만 받고 끝날 일인데. 어째선지 한차수의 저 얼굴을 보니 뭔가 심하게 잘못된 느낌이었다.

뒤이은 그의 말에 임청문은 머리를 망치로 내려찍은 듯 거센 충격을 휩싸였다.

“관리국 내에서는 실장님의 능력과 미래를 높이 사 지금껏 무슨 사고를 쳐도 눈감아 드렸겠지만 아쉽게도 제 소속은 관리국이 아닙니다.”

“어억.”

맞다, 얘 천령 길드 소속이지.

몸뿐만 아니라 뇌마저 얼어붙은 임청문을 내려다보며, 한차수는 머리를 쓸어 올렸다.

‘역시 내가 문제 제기를 하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도 없었군.’

딱 봐도 뻔했다. 임청문은 뛰어난 머리와 능력을 무기 삼아 천지 분간 못하고 날뛰어 온 애송이였다. 그럼에도 목이 날아가지 않은 건 그를 내버려 두는 게 이롭다고 관리국이 판단했기 때문이겠지.

‘그렇지 않고서야 관리국 내 실세나 다름없는 위기관리실 실장을 감히 날려 보내려 들까.’

임청문이 떠들어 대는 꼴을 보니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기태연을 한 치도 두려워하지 않는 모습은 기태연의 힘이 그들에게 미치지 않는다는 뜻이었으니까.

아마도 개발실은 위기관리실의 영향력이 닿지 않는 독립된 집단일 터다.

‘기태연이 딱히 크게 반응을 하지 않는 걸로 봐서 이런 일이 한두 번도 아닐 테고.’

그래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다. 집안싸움에 굳이 끼어들 만큼 여유가 넘쳐나는 건 아니니까.

하지만 먼저 자신을 억지로 협상 테이블에 끌어 올려놓고 갑인 양 행동하는 꼴을 두고 볼 수 없었다.

한 번 얕잡아 보인 순간, 이미 관계 정립은 끝난 거니까.

‘두 번째 기회를 운운한 것만 봐도 뻔하지. 이미 자신이 나보다 위에 있다고 생각한 거야.’

정원을 벗어나 병실로 돌아간다 해도 개발실장은 언제든 자신을 써먹을 수 있는 패로 생각할 것이다.

평온한 생활을 원하는 한차수로서는 그것을 가만히 내버려 둘 수 없었다.

‘게다가 기태연과 굳이 손을 잡지 않아도 되는 방법을 알고 있다는데 내뺄 필요 없지.’

싸움에 승리하면 모두 제 것이다.

그럼 위기관리실 실장의 권력도 명예도 통하지 않는 상대를 어떻게 제압해야 할까. 답은 하나였다.

이런 놈한테는 그가 가진 능력으로도 무마할 수 없는 일이 있다는 걸 알려줘야 했다.

“게다가 따로 인사를 드린 적도 없는데 실장님께선 이미 제 이름을 알고 계셨죠.”

아직도 재기 불능인 상대를 바라보며 한차수는 차분히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럼 제가 어떻게 관리국 소속 헌터들만 입원할 수 있는 의료 센터에 들어오게 됐는지도 굳이 설명드릴 필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만.”

백담과 정이흔을 언급하는 말에 임창문의 눈동자에 균열이 일었다.

한차수는 그것을 담담히 응시하며 몸을 낮췄다. 태양을 등진 그의 눈동자가 서늘한 빛을 발했다.

남의 위세를 빌려다 쓰는 건 별로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제 안위에 필요하다면야, 뭐.

‘진짜 백담이랑 정이흔을 데려다 죽일 것도 아니니 이 정도면 괜찮지.’

한차수가 줄소송당하고 싶지 않으면 알아서 재깍 엎드리라는 말을 아주 친절한 방식으로 말하려던 때였다.

“허억, 헉. 저기입니다…!”

“세상에. 지금 이게 무슨 짓이야, 기태연!”

“아.”

못해도 기십 명은 넘는 발소리. 기태연이 얼려 버린 엘리베이터를 대신해 계단을 올라온 장정들이 출입구로 쏟아져 나왔다.

“쳇.”

기태연이 담배를 잘근 씹으며 땅을 박차고, 금명결이 고개를 숙여 한차수에게 물었다.

“막아 줄까?”

“됐습니다. 어차피 다 끝났….”

그 순간이었다.

[경고!]

[경고!]

[경고!]

이제껏 보지 못한 속도로 빠르게 올라가는 시스템 메시지. 그리고.

[ 반경 10m 이내에 숙적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

[ 파악된 숙적의 숫자 : 1/4 ]

[ 스킬 반항(A)이 활성화됩니다. ]

[ 내면의 반항심이 들끓고 분노가 의식을 잠식합니다! ]

“으아악! 내가 잘못했어! 미안, 미안하다고!”

정신을 차린 한차수는 임청문의 머리카락을 쥐어뜯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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