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화
지원개발실이 주도한 위기관리실 실장 암살 계획은 안타깝게도 한낮의 꿈으로 끝나고 말았다.
“안 돼! 우리 킬킬이가…!”
“이 잔악무도한 인간, 사무실로도 모자라 피 같은 우리 자식을 얼리다니!”
“내 귀가 잘못됐나.”
기태연이 한숨을 쉬며 손가락을 튕겼다.
쩌저저적!
서리가 내려앉은 옥상 정원. 하얗게 얼어붙은 구조물 사이로 투명한 얼음 창이 솟아올랐다.
예기를 품은 얼음 창들은 정확히 한곳을 향해 창끝을 겨누고 있었다.
난간 위에 설치되다만 흉물스러운 형태의 기계. 개발실에 따르면 킬킬이라는 애칭을 가진.
“…저거 개틀링 건 아닙니까?”
멀리서 구경하던 한차수는 그제야 천에 덮인 물건의 정체를 깨달았다. 평범한 저격 소총도, 중기관총도 아닌 진짜 구식 개틀링 건이라니.
’정말 미친자들이 맞았군.’
현대화된 기관총이 얼마나 많은데 이제 와서 개틀링 건을 만들고 앉아 있는가.
‘그리고 저걸로 기태연을 잡을 생각이었다 이거지?’
제대로 돌아 버린 놈들이 아닐 수 없었다.
한차수가 개발실의 정신머리에 감탄하는데, 금명결이 옆에서 나직이 의견을 덧붙였다.
“흐음, 개량 마석을 탄환으로 사용하는 무기를 개발 중이라고 하더니 저게 그건가 보네.”
“…일반 탄환도 아니고 개량 마석을 넣은 탄환이라고요?”
“개발실장이 저번에 마석의 새로운 쓰임새를 입증해 보이겠다고 컨퍼런스에서 큰소리치다가 쫓겨났거든.”
마석은 몬스터를 해치우면 일정 확률로 얻을 수 있는 아이템으로 길드와 헌터들의 주된 수입원 중 하나였다. 마석이 가진 고농축 에너지를 전기 대신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마석을 개량해서 탄환으로 쓴다니. 달리 말하자면 탄창에 현금을 그대로 처박겠다는 말이 아닌가.
“대단하군요.”
과연 수틀렸다고 개틀링 건으로 관리국 실장을 날려 보낼 생각을 하는 이들다웠다. 한차수가 감탄하는 가운데, 기태연의 킬킬이 분해쇼가 시작되었다.
끼긱-
끄그극, 카강!
하얗게 얼어붙은 몸체는 발길질 몇 번에 쉽게 나가떨어졌다. 순식간에 고철더미가 된 개틀링 건을 본 이들이 포효했다.
“안 돼!”
“우리 킬킬이가!”
“당신은 살인마야, 이 악마 같은 사람!”
여기저기서 비명과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물론 기태연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슥슥. 산산조각 난 기계를 대충 치운 그가 구석으로 향했다.
잠시 뒤, 큼지막한 화분 더미 뒤에서 그가 묵직한 주머니를 들고 나왔다.
차르륵-
땡그랑, 땡강!
개량 마석을 집어넣은 탄환이 바닥에 산처럼 쌓였다. 한차수는 할 말을 잃었다.
‘그래, 탄환이 하나일 리가 없지.’
권총도 아니고 개틀링 건을 만들었는데 적어도 수백 발은 있어야 써먹을 수 있지 않겠는가.
‘아니, 근데 탄환이 저렇게 많은데 아까는 왜 하나 가지고 그렇게 난리법석을 피운 거지?’
사실 그것에는 슬픈 뒷이야기가 있었다. 머리는 명석하지만 체력이라고는 매일 산책하는 강아지만도 못한 개발실 직원들. 그들은 탄환주머니를 들 힘이 없어 처음 만든 탄환 하나를 대표로 의식을 거행했던 것이다.
물론 한차수가 이 같은 사정을 알 리 없었다. 알았다한들 크게 감명받을 내용도 아니었고.
“어쩐지 연구동에 털어먹을 게 별로 없다더니 연구비를 여기다 다 썼나 보지?”
기태연이 흥미로운 얼굴로 탄환을 살피다 그것들을 전부 챙겼다.
“잘 쓰지.”
대놓고 털어먹는 도둑질에도 개발실은 속수무책이었다.
“으흐흐흑.”
“아아, 킬킬아. 우리 귀염둥이, 아빠가 지켜 주지 못해 미안해….”
무릎 꿇려진 채로 하반신이 전부 얼어붙은 개발실이 할 수 있는 일은 그저 통곡뿐.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울부짖는 게 어떻게 보면 안쓰럽기도 했다.
“국장님한테 바로 보고 올려야 니들이 닥칠까.”
“…히끅.”
“…….”
“여기서 끝낸 걸 다행으로 여겨라. 특히 너, 임청문.”
“크윽.”
개발실 실장이 긴 머리카락을 뒤흔들며 소리쳤다.
“비록 오늘은 이렇게 패배했지만 우린 절대 굴복하지 않는다. 너, 이 짐승만도 못한-.”
“임 실장님, 당신 비밀연구소가 어디 있는지 내 입으로 까발려야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고글을 쓴 개발실장은 기태연의 말에 그대로 침몰했다. 그러나 분함은 가시지 않은 모양이었다.
까득, 끄드득.
이 가는 소리가 얼어붙은 공기를 끊임없이 울려 대, 한차수는 귀를 틀어막았다.
“아이고, 우리 연약한 한차수 씨.”
혀를 찬 금명결이 기태연을 향해 물었다.
“이제 다 끝났나?”
“아.”
임청문의 고글을 뺏어 착용해 보던 기태연이 고개를 돌렸다. 한차수의 창백한 얼굴을 본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런, 오래 기다리게 할 생각은 없었는데.”
“딱 1분만 더 늦었어도 바로 돌아갈 생각이었어요, 기 실장님.”
내내 한차수의 곁에 붙어 있던 의사가 차가운 목소리로 일갈했다. 한차수는 그녀가 건네준 에너지 바를 씹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옥상 정원을 떠나지 않고 이 촌극을 관람한 데는 기태연의 지분이 컸다. 그가 병실로 돌아가지 않고 기다려 주길 청했기 때문이다.
뭐랬더라. 기운이 불안정하니 기다렸다가 치료를 받고 돌아가라고 했던가.
‘시스템창에 뜨지 않는 상태 이상은 이런 게 불편하군.’
한차수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좁혔다.
“미안하다니까.”
어느새 다가온 기태연이 그의 손을 붙잡았다. 개발실을 박살낸 게 기분 좋은 듯 새파란 눈동자가 반짝이고 있었다.
“내가 책임지겠다고 했잖아.”
사아아-
살갗이 맞닿은 자리. 온기로 이어져야 할 중심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기운이 퍼져 나갔다.
“음.”
한차수는 설핏 이마를 찌푸렸다. 다시 느껴도 정말 엄청난 기운이었다.
쿵, 쿵-
‘역시 S급이라 이런가.’
기태연의 힘은 몸속을 스치듯 지나갈 뿐이었다. 그럼에도 그 뒤에 자리 잡은 거대한 생명력이 고스란히 느껴지다니.
햇빛에 살짝 달아올랐던 열기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한차수는 벤치에 앉은 채 눈을 감았다.
“흐음.”
그 모습을 가만히 바라보던 금명결이 고개를 기울였다. 금빛 눈동자에 의뭉스러운 빛이 스쳐 지나갔다.
“의사 선생.”
“네?”
“왜 위기관리실 실장이 한차수 씨를 직접 치료하고 있는 건지 물어봐도 되나?”
“아.”
기태연이 하는 양을 말없이 지켜보던 의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기태연이 한차수의 치료에 나서게 된 건 순전히 그의 의지였다.
“천령길드 측에선 내가 책임진다는 조건 하에 치료 과정의 실수에 대해서 문제 제기하지 않기로 했습니다.”
의료 센터는 화들짝 놀랐다. 어디까지나 치료 과정에서 자신들이 꼼꼼하지 못했기에 생긴 실수라고 생각했으니까.
“저희들이 책임지겠습니다!”
“맞아요, 왜 실장님이 저희 대신 총알받이를 자처하세요?”
직원들은 자신이 대신 사과하겠다 주장했으나 기태연은 물러서지 않았다.
“흠, 나는 총알이 날아와도 다치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 정 신경 쓰이면 나랑 한판 뜨던가. 이기면 대신 책임지게 해 주지.”
“실장님을 어떻게 꺾어요!”
“그럼 포기해.”
의사는 그때, 왜 기태연이 관리국을 그렇게 뒤엎어 놓고도 잘리지 않는지 깨달았다. 성질머리는 더럽지만 정말 믿음직스러운 사람이지 않은가.
하지만 이 멋진 영웅담을 엑실리스 길드 마스터에게 이야기할 이유는 없었다.
‘천령 길드장이나 필로소 부길드장은 한차수 씨가 사경을 헤맬 동안 곁을 지키기라도 했지, 이 사람은 그것도 아니잖아?’
듣자 하니 뒤늦게 한차수가 죽었는지 확인해야 한다며 방탄 차량을 몰아 관리국 정문을 들이받기나 했다고 한다.
금명결을 바라보는 의사의 눈에 불신이 어렸다.
정확히 말하자면 우리 연약한 한차수 씨가 무슨 치료를 받든 네놈이 뭔 상관이냐는 눈빛이었다.
“환자의 관련된 정보를 외부인에게 알려 드릴 수는 없습니다.”
단호한 대답에 금명결이 눈살을 찌푸렸다. 입을 비죽 내민 그가 툴툴거렸다.
“내가 뭐 기밀 정보라도 알려 달랬나? 너무 딱딱하게 구는군.”
“환자의 건강과 관련된 정보는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기밀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나 참.”
금명결은 어쩔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괜히 말 붙였다가 본전도 못 찾게 생겼다. 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한걸음 뒤로 물러섰다.
‘의료 센터 애들이 부모라도 되는 것처럼 한차수를 과보호한다더니 정말이었군.’
의사의 반응이 생각보다 사납긴 했지만 놀라진 않았다. 애초에 정말 치료 방법에 관심이 있어서 물어본 것도 아니었으니까.
금명결의 시선이 한차수에게 닿았다. 기태연에게 두 손을 붙잡힌 그는 언제나처럼 무심한 낯이었다.
‘역시 저만한 사람이 없단 말이지….’
염원하던 귀걸이를 손에 넣은 뒤, 그는 미리 살펴 두었던 이들 중 한 명과 파트너 계약을 맺었다. 먹고 살기 적당한 돈을 주고 비밀 유지 조항이 든 계약서에 도장까지 찍었다.
그리고 오늘 새벽, 파트너가 죽었다.
벌써 다섯 번째였다.
‘자다 깨서 떨어진 귀걸이 찾는 것도 지겨워 죽겠군.’
사망 원인은 다양했다. 누군가는 잠을 자다 죽었고, 다른 누군가는 식사 중에 기도가 막혀 어이없이 세상을 떴다.
그래도 석연치 않은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금명결은 짧은 시간 동안 그들의 죽음에 대해 가능한 자세히 조사했다.
아쉽게도 수상한 점은 발견되지 않았다. 누군가 사주한 흔적도 없었고, 독이나 저주도 아니었다. 다만 찾아낸 게 있다면 등급이 높고 힘이 강할수록 빨리 죽었다는 것.
한차수를 찾아온 건 그래서였다.
B급 생산계에 언제 죽을지 모르는 허약한 몸. 당장 죽는다고 해도 뭐라 할 가족도 없는 천애 고아.
게다가 한차수는 이전 파트너들과 달리 귀걸이를 직접 소유했었다. 그러니 파트너가 되도 괜찮지 않을까.
확신에 가까운 예감이 금명결로 하여금 한차수를 찾게 만들었다.
‘고아라 했으니 가족 간의 따뜻한 분위기 같은 걸 동경하려나.’
그렇지 않아도 어머니가 한국에 오신 지 꽤 됐다. 어머니와 함께 있을 때 한차수를 불러내는 것도 꽤 좋을지도.
‘그것도 먹히지 않으면….’
꼬시지 뭐.
여자든 남자든 마음먹으면 유혹하지 못한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딱히 자신이 문란하게 살아온 건 아니다. 한 번에 두 명 이상 사귄 적이 없으면 나름대로 순정파 아닌가?
‘한차수가 빨리 받아 주면 좋겠는데.’
그가 받아 주기 전까지는 다른 파트너들을 전전할 수밖에 없었다. 귀찮은 일이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원래 평생 갈 파트너를 고르는 건 힘든 일이지 않겠는가. 금명결은 머리를 쓸어 넘기며 고개를 들었다. 한차수는 여전히 기태연의 손을 잡은 채 살포시 눈살을 찡그리고 있었다.
언제 봐도 마음에 드는 표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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