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화
“오랜만이야, 한차수 씨.”
이를 드러내며 웃는 남자는 말 그대로 위압적이었다.
쾅!
발길질 한 번에 나가떨어진 파티션이 난간 정중앙에 꽂혔다. 주변에 서 있던 개발실 직원들의 후드가 바람에 강제로 젖혀졌다.
“으아악!”
“꺅!”
뒤늦게 후다닥 얼굴을 가렸지만 늦은 뒤였다. 금명결이 피식 웃으며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바람을 가르며 다가오는 사내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용솟음쳤다.
끼이이이이이—!
저주술사라는 위명답게 온갖 사악한 기운이 그에게서 뿜어져 나왔다.
‘의료 센터에서 저래도 되는 거야?’
한차수는 실없는 생각을 하며 파티션에 툭 머리를 기댔다. 개발실 직원들이 어느새 구석으로 도망친 덕이었다. 금명결에게서 풍기는 기운 때문인지 그들은 한데 뭉쳐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저, 저거 그 저주술사 맞지?”
“오늘 일진이 사납다더다니, 젠장.”
“야, 조용히 해. 입 다물어.”
방금 전까지 기태연을 죽이자며 떠들던 기세는 어디 간 걸까.
“한차수 씨.”
소리 없이 다가온 사내가 태양 같은 눈으로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뜨거운 햇살 대신 타오르는 눈동자.
“오랜만이야.”
가만히 그를 올려다보던 한차수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귀걸이, 안 하셨습니까?”
“아.”
남자의 귀에는 귀걸이는커녕 아무것도 없었다. 금명결이 매끈한 제 귀를 쓱 만지고선 피식 웃었다.
“이건 나중에 얘기하고, 일단 나랑 같이 갈까?”
나중에 이야기하자니, 그게 무슨 말이지? 한차수는 자연스레 미간을 모았다. 금명결이 큭큭 웃더니 손을 뻗었다.
“잡아.”
붙잡아야 되는 거 아냐?
뒤에서 들리는 작은 속삭임에 고개를 틀자 덩달아 휘리릭 사람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왜, 저 인간들이 한차수 씨한테 뭐라고 했나? 혼내 줄까?”
금명결이 손목을 꺾으며 의미심장하게 읊조렸다. 자릿세 받는 깡패 같은 행동에 한차수는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굳이 건드릴 필요 없습니다. 딱히 피해 입은 것도 없고.”
애초에 개발실의 목표물은 자신이 아니라 기태연이다. 자신은 그저 발을 잘못 디딘 죄로 인질이 될 뻔했을 뿐이고.
‘그래도 이따 기태연을 만나면 조심하라고 일러 주긴 해야겠군.’
개발실도 진심으로 기태연을 죽일 생각은 아니겠지만… 아니겠지? 한차수는 고민했다. 아무래도 본 게 있다 보니 확신할 수가 없었다.
“윽.”
바닥을 짚고 일어서는데 발목에서부터 시큰한 통증이 일었다. 무심코 인상을 쓰자 머리위에서 혀 차는 소리가 들렸다.
“하여튼 하자는 대로 따르는 일이 없다니까. 손 한 번 잡는 거 더럽게 어렵네.”
휙 하고 팔이 붙잡히는가 싶더니 몸이 통째로 들어 올려졌다. 하늘이 왜 이리 가까워졌나. 정신을 차리니 금명결의 품 안이었다.
구석에서 사람들이 놀라 숨 삼키는 소리가 들렸다. 한차수는 조용히 금명결의 팔을 붙들었다. 놔라. 눈빛으로 강력하게 항의하자 그가 씩 웃으며 자세를 고쳤다.
“윽!”
커다란 손이 경련 이는 다리를 주물렀다. 짜릿한 격통에 한차수는 욕설을 삼켰다.
“이런 다리를 해 가지고 뭘 어떻게 걷겠다고. 한차수 씨, 요새 밥 많이 먹는다면서 그거 다 어디로 간 거야?”
“…뱃속 어딘가에 있겠죠.”
“배는 여기 없다고 하는데?”
“소화가 끝났으니 없겠죠. 손 좀 그만 꿈지럭대세요. 이러다 떨어지겠습니다.”
“꿈지럭대다니, 꼭 내 비서처럼 말하는군.”
툴툴거리면서도 금명결은 손을 거뒀다. 한차수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제가 정말로 그 비서 분이었다면 말로는 안 끝났을 것 같은데요.”
스스럼없이 흘러나온 말에 걸음을 옮기던 금명결이 뚝 하고 움직임을 멈췄다. 굵은 눈썹 아래 금빛 눈동자가 가만히 한차수를 응시했다.
“왜 그런 눈으로 보십니까?”
“흠….”
금명결이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깊은 아이홀 안쪽, 그림자 드리워진 눈동자가 심각한 빛을 담았다.
한차수는 이게 갑자기 왜 이러나 싶어 미간을 모았다. 혹시나 또 수작질을 부리면 차라리 바닥으로 몸을 던져야지. 한차수가 바닥까지의 거리를 가늠하는데 금명결이 입을 열었다.
“내 착각인가….”
“?”
“전보다 훨씬 밝아진 느낌이네.”
금명결이 고개를 숙이며 속삭였다. 선이 뚜렷한 눈매가 그림처럼 휘어졌다.
“뭐라고 해야 할까. 벽이 허물어진 것 같은 느낌?”
“…….”
“아니면 이제 슬슬 내가 괜찮은 사람인 걸 깨달은 것 같다고 해야 하나? 흠. 개인적으로는 후자면 좋겠는데.”
금명결의 장난스러운 미소에 한차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금명결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확실히 덜 경계하는군.’
예전이었다면 당장 내려 달라고 외쳤을 게 분명했다. 그만큼 한차수는 그에게 명확한 선을 그었다. 아무래도 첫 만남이 좋지 않았던 탓이겠지.
하지만 그간 꾸준히 선물을 보내고 노력을 한 덕분일까. 품에 안겨 있는 남자는 생각보다 얌전했다. 금명결은 그게 제법 마음에 들었다.
“여기서 더 친해지고 싶다고 말하면 싫다고 하려나?”
“굳이 제 입으로 확인받고 싶으신 겁니까?”
“아직 거기까지는 아니라는 거군. 알겠어.”
아쉽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면서도 미소는 잃지 않는다. 호쾌한 웃음소리가 옥상을 울리고, 한차수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차수 씨!”
그때, 멀리서 그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먼 거리임에도 또렷이 귀에 닿는 부드럽고 정확한 목소리.
“한차수 씨, 괜찮은 겁니까?”
문연철이 그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 교수님.”
“교수님?”
“관리국 내 심리 상담 센터에서 일하시는 분입니다.”
“아아.”
금명결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것들 처리는 저쪽에 맡기면 되겠군.”
은근슬쩍 도망가던 개발실 직원들이 흠칫했다. 개중에 몇 명은 천으로 감싼 무언가를 소리 없이 가져가기 위해 애쓰던 중이었다.
“글쎄요, 저분이 맡는다고 해서 뭐가 딱히 달라질 것 같지는 않은데요.”
애초에 심리 상담 센터 자문교수가 개발실을 상대로 뭘 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다. 한차수가 고개를 내젓자 금명결이 눈썹을 찌푸렸다.
“그럼 어쩔 수 없네.”
“?”
“그냥 가야지, 뭐.”
단호하게 내뱉은 사내가 성큼 걸음을 옮겼다. 무너진 벽을 걷어차고 출구를 향하는 모습에 문연철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잠시만요.”
“미안한데 한차수 씨가 좀 바쁜 몸이라서 말이야.”
금명결이 서릿발 같은 목소리로 말했다.
“비켜 주면 감사하겠군.”
“…혹시 엑실리스의 마스터십니까?”
문연철에게서 놀란 듯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흠, 나한테 아는 체하라고 친절하게 말한 게 아닌데.”
금명결은 짐짓 안타까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한차수를 콕 집어 불렀다.
“왜 사람들은 이렇게 눈치가 없는 걸까. 어떻게 생각해, 한차수 씨?”
“하아….”
한껏 숨죽이고 있던 보람이 없군. 한차수는 깜빡이며 눈을 떴다. 문연철이 걱정 가득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에요, 차수 씨?”
그는 자신이 쓰레기를 버리고 난 이후로 도통 돌아오질 않아 직접 찾아 나서는 중이었다고 했다.
“10분이 넘도록 안 오시길래 어디서 쓰러지신 줄 알았어요.”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습니까?”
문연철이 고개를 끄덕이는데, 마침 뒤에서 누군가 그를 불렀다.
“교수님, 그쪽에도 없… 헉, 한차수 헌터어어!”
머리를 하나로 높이 묶은 의사가 그를 발견하고 팔짝 뛰었다. 눈에 익은 얼굴이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셨어요!”
“아.”
“얼굴은 왜 이렇게 벌게지셨어요. 땀은 또 왜 이리 많이 흘리시는 거구요! 아니, 손은 차갑잖아? 세상에, 경련, 경련이…!”
“일단 진정하시고.”
“제가 지금 진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
“일단 이것부터 드세요. 얼른.”
화난 의사를 말릴 수 있는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오만하기로는 S급들 중 제일이라는 금명결마저 가만히 그녀가 하는 양을 지켜볼 뿐이었다.
“후우…. 자, 그래서 도대체 뭐 때문에 이 꼴이 되신 거죠?”
한차수가 약을 먹은 걸 확인한 뒤, 의사는 추궁을 시작했다. 턱 하고 허리에 손을 얹은 그녀의 눈은 마치 한 마리 사자와도 같았다.
“음, 그게.”
“저기 후드 뒤집어쓴 머저리들 알고 있나?”
금명결이 다짜고짜 정원 한구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가짜 갈대밭과 파티션 사이로 보이는 폐허에 의사의 눈이 커졌다.
“저게 뭐… 아니, 저 새끼들 지금까지 저기 숨어 있던 거였어?”
의사가 어딘가를 향해 전화를 걸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갈 것 같았는지, 금명결이 웃으며 손을 튕겼다.
“으아아악!”
“미친, 사람 살려!”
어쩐지 비명이 점점 멀어진다 했더니.
금명결의 어깨 너머로 보이는 광경은 그야말로 악몽과도 같았다.
“꺄아아악!”
“이거 놔, 아니, 놓지 마! 내려 줘, 내려 달라고!”
검은 악령 수십 마리가 사람들의 발목을 잡고 허공 위를 뱅글뱅글 돌고 있었다.
“…저래도 되는 겁니까?”
“맛보고 나면 나중에 또 해달라고 나한테 찾아올걸?”
그렇게 중독된 엑실리스 길드원이 몇 명인 줄 아냐며 금명결이 코웃음 쳤다.
‘…이 세상엔 제대로 된 인간이 없어.’
풍요로운 자원과 깨끗하고 맑은 자연이 있으면 뭘 하나. 그 안에 살아가는 인간들이 미쳤는데.
한차수가 새삼스럽게 자신의 빙의 사실에 회의감을 가질 무렵이었다.
콰앙!
근처 출입문이 거칠게 열렸다. 쾅 소리와 함께 나가떨어진 철문 사이로 새카만 인영이 모습을 드러냈다.
“하아….”
차가운 공기가 등줄기를 파고들었다. 폐가 얼어붙을 것만 같은 한기였다.
“이 개새끼들이.”
새파란 눈동자가 태양 아래 드러난 순간.
쩌저저적-!
한차수는 보고 말았다. 의료 센터가 자랑하는 옥상 정원이 얼음 정원으로 재탄생하는 모습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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