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옆에 앉아도 될까요?”
거침없이 다가온 남자에 한차수는 조금 당황했다.
‘뭐지 이 자식.’
자신에 대해 알고 있을 거라 짐작은 했다. 하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올 줄이야.
‘생긴 것과 달리 굉장히 저돌적인데. 설마 정이흔이 날 만나면 말이나 붙여 보라고 했나?’
은근히 막무가내인 정이흔의 성격을 생각하면 그런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종신계약서에 사인해 주지 않는다고 병원에 가둬 두려던 녀석이니까.
‘흠… 그럴 듯하네.’
한차수는 대답을 기다리는 남자를 향해 자리를 권했다.
“예, 앉으셔도 됩니다.”
‘이왕 이렇게 된 김에 멀쩡하다는 걸 보여줘야겠군.’
정이흔이 왜 제게 심리 상담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딱히 알고 싶지도 않고. 하지만 그게 자신을 귀찮게 만들 수 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그러니 이번 만남을 기회로 삼아 제게는 아무런 정신적 문제도 없다는 걸 밝힐 생각이었다.
아무리 제멋대로인 정이흔이라 하더라도 전문가의 말은 귀담아들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남자는 안도하는 듯한 미소를 지으며 벤치에 앉았다. 컵 하나를 사이에 둔 적당한 거리였다. 목소리는 제대로 들리되 팔이 닿지는 않을 거리.
‘아무 말이나 해라.’
뭐라고 떠보든 아주 정상적이다 못해 지루하고 평범한 답을 해 주지. 한차수가 다짐했다.
기다렸다는 듯 남자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음, 저희 아까 잠깐 눈 마주쳤는데 혹시 기억하세요?”
“그럼요. 심리 상담 센터에 도움 주시는 분이라고 성진 씨에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성함이.”
“아, 문연철이라고 합니다.”
잠깐. 문연철이라고 하면….
‘원작에서 백담의 상담을 맡았던 사람 아닌가?’
그의 기억이 맞다면 문연철은 작중에 스치듯 짧게 지나간 조연이었다. 제대로 된 등장도 없이 이름만 나타난 조연.
그런 이를 기억하는 이유는 간단했다.
‘백담이 이 남자의 여동생이랑 결혼을 약속했었지.’
원작에서 백담은 동생의 복수를 마친 뒤 몇 년이나 깊은 우울증을 앓았다. 자해와 자살 시도로 점철된 끔찍한 우울증. 그를 보다 못한 필로소 길드장은 백담에게 거의 반강제로 상담사를 붙였고, 백담은 지속적인 상담과 약물 치료를 거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상담사의 여동생과 사랑이 싹튼다. 그녀가 바로 훗날 백담의 약혼녀로 등장하는 문연선이다. 사실 백담의 재활이 성공한 건 그녀 덕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제야 이름이 생각나는군.’
문연철의 존재가 방아쇠가 되어 약혼녀의 이름이 기억났다. 그리고 동시에 가슴을 찌르는 작은 가시.
그건 자신이 빙의한 탓에 두 사람의 인연이 어그러졌다는 죄책감이었다.
‘그래도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어.’
한차수는 무심히 가시를 걷어 내며 문연철에게 악수를 청했다.
“한차수입니다.”
그의 속도 모르고, 남자는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손을 맞잡았다.
“갑자기 옆에 앉겠다고 해서 미친 사람 취급받을 줄 알았는데 다행이네요.”
“뭐 그런 걸로 사람을 미친 사람 취급한답니까.”
한차수가 피식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문연철이 어떤 사람인지 떠올린 뒤로 그는 조금 너그러워진 상태였다.
“이런 것도 다 인연인데요. 이렇게 아는 사람이 생기면 좋은 일이죠.”
혹시 모르는 일이다. 자신이 연결 고리가 되어 백담과 문연철, 그리고 문연선의 인연이 다시 이어지게 될지도.
“그렇게 말해 주시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네요. 참, 아까 딸기바나나 시키신 거 맞죠?”
“들켰나요?”
“엄청 간절한 눈으로 보셔서 시키실 줄 알았습니다.”
참 대화하기 편한 남자였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목소리가 딱 듣기 좋았다. 발음도 부드러워 튀지 않았고.
‘필로소 길드장이 왜 이 사람을 백담한테 붙였는지 알겠네.’
분위기에 잘 스며드는 남자였다. 존재감이 흐리다고 해야 하나. 아니면 타고나기를 사람을 편하게 만든다고 해야 하나.
멍하니 푸른 하늘을 향해 시선을 던지는데 문연철이 돌연 직구를 꽂아 왔다.
“음, 혹시 저랑 이렇게 대화하는 게 불편하시면 그냥 그렇다고 말하셔도 됩니다.”
“예? 그럴 리가요.”
불편하기는커녕 한차수는 아무 생각 없었다. 그가 고개를 내젓자 문연철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혹시 다음 주에 기간 한정으로 청포도 주스랑 케이크를 판다는 소식 들으셨습니까?”
“저기 카페에서요?”
“네.”
“아뇨. 사실 여기에 카페가 있는 것도 오늘 처음 알았습니다.”
“아, 그럼 금요일에만 특별 판매하는 샌드위치가 있다는 것도 모르시겠네요.”
“그런 것도 팝니까?”
제법 즐거운 대화였다. 자꾸만 꼬이는 파리 떼만 아니었어도. 한차수는 지치지도 않고 들이대는 파리에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컵을 버려야 할 성싶었다.
“저, 잠시 쓰레기 좀 버리고 오겠습니다.”
빈 컵을 흔들며 말하자 상대가 멈칫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다녀오세요.”
어딘가 아쉬워하는 얼굴이었지만 이 이상 파리를 견딜 수는 없었다.
한차수는 빈 쓰레기통을 찾아 머나먼 여정을 떠났다. 가까운 쓰레기통은 모두 쓰레기가 차다 못해 흘러넘치는 탓이었다.
“운동 겸 한 바퀴 천천히 돌까….”
옥상 정원은 군데군데 사람들의 시선이 차단되도록 구조물이 설치되어 있었다. 한차수는 느릿한 걸음으로 갈대를 돌아 가장자리로 향했다.
저 멀리 구석에 쓰레기통 하나가 보였다. 외진 곳에 있어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은 듯했다.
성큼, 가림막 사이로 발을 내딛은 순간이었다.
“윽!”
물컹한 뭔가가 얼굴을 뒤덮었다. 아니, 얼굴만이 아니라.
‘이게 뭐…!’
아주 얇고 미끄러운 뭔가가 몸 전체를 감싸고 지나가는 감각이었다. 비유하자면 미끌미끌 질긴 거미줄이 얼굴과 사지를 훑고 가는 기분.
다행히도 소름 끼치는 경험은 순식간에 끝났다. 주먹을 휘두를 새도 없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조금 당황했다.
“기회는 단 한 번. 절대 실패하면 안 된다.”
“모두 기를 모아라, 개발실의 명운이 이 탄환에 걸려 있다. 자, 다들 손을 겹쳐! 그리고 외쳐라,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우아아! 승리할 것이다아아아!”
방금 전까지 눈에 담았던 하늘과 다를 바 없는 파란 하늘. 아까 전에도 지겹게 봤던 각성자 관리국의 건물.
그런데 구석에 갑자기 후드를 뒤집어쓴 수상한 집단이 나타나 옹기종기 모여 이상한 구호를 외치는 게 아닌가.
“개발실의 승리를 위해!”
대화를 들어 보니 아마도 개발실 사람들인 것 같았다.
‘정말… 수상하기 짝이 없군.’
슬쩍 뒤를 돌아보니 자신이 지나온 자리에 새카만 장막이 일렁이고 있었다. 아마 저걸로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출입을 차단한 모양이다. 왜 자신에게는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는지 모르겠지만….
“오늘 부로 위기관리실 실장 기태연의 존재는 세상에서 지워진다.”
“하하하하하하, 이것이 개발실을 건드린 자의 최후다. 자, 다들 축배를 준비해라!”
미친놈들이 따로 없었다.
기태연이 개발실을 한바탕 뒤엎었다더니. 이런 식으로 복수를 계획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역시 절대로 엮이면 안 되는 집단이로군.’
한차수는 차갑게 식은 얼굴로 거리를 벌렸다. 그딴 음료수를 만들 때부터 알아봤다.
‘어디 보자.’
여기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려나. 한차수는 까만 벽 위에 살며시 손을 얹었다. 그 순간이었다.
삐이이이이—!
손이 닿은 자리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꿀렁이던 벽이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마치 물에 손을 담갔다 빼면 튀어 오르는 수면처럼.
우우우우!
미끌미끌한 붉은 유기체는 한차수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했다.
“——!”
이 새끼들은 도대체 뭘 만든 거야? 한차수는 재빨리 바닥에 몸을 굴렀다. 투둑, 툭. 꿀렁거리는 벽이 새빨간 뭔가를 그를 향해 발사해 댔다.
“뭐야, 거기 누구야!”
“침입자다!”
곧 개발실 직원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차수는 급히 몸을 일으켰다.
‘엄폐물이….’
한차수는 가까운 파티션 뒤로 몸을 숨겼다. 그러나 상대의 수가 너무 많았다.
한차수가 다른 곳으로 몸을 피하기도 전에 누군가 그를 발견했다.
“여기 있다! 다들 이리로… 헉.”
상대를 본 한차수는 아연함에 얼굴을 쓸어내렸다. 상대의 손에는 날카로운 쇠붙이가 촘촘히 박힌 그물이 들려 있었다.
“잠깐, 잠깐만요. 우리 얘기 좀 합시다.”
그래도 사람이니 말이 통하지 않을까. 한차수는 일말의 희망을 품었다.
미약한 기대는 이내 산산이 부서졌다. 소리를 듣고 달려온 다른 직원들이 그를 발견하자마자 악을 써 댔다.
“어? 나 저 사람 알아. 기태연이 끼고도는 그 환자잖아!”
“맞네! 기태연이 쟤한테 쓸 시간 낭비하게 하지 말라고 우리 몽땅 얼린 거라면서!”
“야… 잡아. 도망쳐서 일러바치면 우리 다 끝이야.”
한차수는 목격했다. 마지막 말이 끝나자마자 개발실 직원의 눈이 한꺼번에 휘리릭 돌아가는 것을.
“한차수 씨라고 했던가요? 미안하지만 협조 좀 해 줘야겠습니다.”
“많은 거 안 바라요. 그냥 여기서 우리랑 같이 가만히 있으면 돼요. 참 쉽죠?’
한차수는 침음했다.
‘돌겠군.’
아무래도 이대로 있다간 인질이 될 것 같았다.
“잘됐어. 어차피 녀석이 사무실로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도 귀찮은 참이었는데.”
“그럼 다시 위치 조절할까요?”
“아냐, 우리 다른 것들도 가져왔잖아. 여기 쭉 둘러서 설치하자.”
개발실 직원들이 음흉한 웃음을 흘려 댔다. 한차수는 그들을 보며 헛웃음을 삼켰다. 자기들끼리 잘 논다 싶어서였다.
달그락. 한차수는 정이흔이 주고 간 구슬을 손에 쥐었다.
‘어떻게 할까….’
회색 눈동자가 차분히 주변을 훑었다. 그때였다.
끼이이이이이이—!
“뭐야, 또 뭔데?!”
“격리벽 설치한 녀석 누구야? 일을 도대체… 억!”
“아, 여기 있었군.”
검은 코트 자락을 휘날리며 나타난 사내는 다름 아닌 금명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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