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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51화 (51/113)

51화

점심 식사가 끝나고 한차수는 의료진 한 명과 함께 옥상으로 향했다. 기태연이 끝까지 물가를 조심하라고 말한 탓에 선택된 장소였다.

“생각보다 사람이 많네요.”

“다른 본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아서 그래요. 제3본부나 제4본부는 병상 수가 부족해서 종종 이쪽으로 오거든요.”

박성진이라는 이름의 의료진은 꽤나 서글서글한 성격이었다. 의료 센터에서 지낸 첫날부터 봐 와서 그런가 나름대로 친밀감이 느껴지기도 하고.

“뭐 좀 드실래요?”

박성진이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을 가리키며 말했다. 옥상에 왜 저리 사람들이 많나 했더니 한 편에 자그마한 카페가 있었다.

커피를 비롯해 각종 생과일주스와 허브티. 그리고 배를 채울 만한 간식을 파는 카페였다. 자그마한 입간판을 보니 직원 할인도 되는 모양이었다.

‘장사가 꽤 잘되겠는데.’

퇴사하면 나도 카페나 차릴까. 실없는 생각을 하며 한차수는 긴 줄 끄트머리에 자리 잡았다.

줄어드는 줄을 가만히 보고 있는데 박성진이 아차 하는 얼굴로 말했다.

“아, 커피는 안 돼요. 해독제 때문에 카페인 복용하면 큰일 나거든요.”

“생과일주스는 상관없습니까?”

“네. 참, 제 쿠폰에 도장 찍어도 될까요?”

“마음대로 하세요.”

어차피 기태연의 카드로 사는 음료였다. 한차수가 괜찮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박성진의 눈이 반짝였다.

주변에 아는 사람이 있나 두리번거린 그가 슬쩍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큼큼. 많이 좋아지셔서 다행이에요.”

한차수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박성진을 응시했다. 매 진료 때마다 하는 이야기를 왜 또 하나 싶어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뭔가 달랐다. 입술을 달싹거리던 박성진이 결심한 듯 크게 눈을 떴다.

“이런 말 했다는 거 들키면 혼날 텐데… 사실 한차수 씨 처음 실려 왔을 때 다들 이건 숨만 붙여 놔도 반은 성공한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

“비밀로 해 주셔야 합니다. 꼭이요. 아셨죠?”

“…알겠습니다.”

약속을 받아 낸 박성진은 콧김을 뿜으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죄다 꺼내 놓았다.

시체나 다름없는 모습으로 백담의 품에서 꺼내진 그를 보았을 때. 이제 겨우 임상 실험을 끝낸 치료 기기를 가동시키고, 끊이지 않는 출혈을 막으려고 밤새 뛰어다닌 이야기들 말이다.

‘난리도 아니었군.’

의료 센터 직원들도 참 고생이 많다. 자신이 하루라도 빨리 퇴원해야 직원들 마음도 편할 텐데.

한차수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건 기태연과의 접촉 시간을 늘리는 수밖에 없나.

몸은 재생 스킬이 에너지 아껴 가며 알아서 치료하는 중이라, 자신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영체화라는 괴상한 상태 이상을 빨리 제거하는 것밖에 없었다.

문제는 빠른 제거를 위해서는 기태연과 접촉하는 시간이 더 많아져야 한다는 점인데….

‘굳이 피부 접촉이 필요하다면 가만히 앉아 손을 잡는 것 말고 체력도 기르고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이 좋지 않나?’

한차수는 일방적 스파링에 대한 꿈을 버리지 못했다.

‘열심히 움직이다 보면 그 묘하게 간질간질한 느낌도 무시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힘을 준다는 게 거짓말은 아닌지, 기태연와 살갗이 닿았을 때 그는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서늘하면서도 뜨겁게 요동치는 모순된 기운이었다.

비유하자면… 그래. 바다 깊은 곳에 잠든 거대한 심해어의 심장이 뛰는 걸 지켜본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문제는 심장의 크기만큼 그것이 내뿜는 기운 또한 거대하기 짝이 없다는 거였다. 자신의 손등 위에 그의 손이 겹쳐졌을 때 내심 얼마나 놀랐던지.

‘등골이 오싹할 정도였지.’

해수처럼 차가운 기운은 순식간에 그의 몸속을 파도처럼 쓸어내렸다. 혈관 가닥가닥 씻어 내리는 으스스한 느낌이란….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닭살이 돋을 정도였다.

‘나도 참 별의별 경험을 다 하는군.’

악역에 빙의한 죄로 신경 다발이 씻기는 체험을 하다니.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팍팍한 인생이 없었다.

“그래서 한차수 씨 눈 떴을 때 저희 모두 진짜 울 뻔했잖아요.”

하지만 악역을 살리기 위해 S급들한테 채찍질당한 사람들도 안쓰러운 건 매한가지였다.

한차수가 위로의 말을 꺼내려던 참이었다.

“성질 더러운 관리국 애들 뒤치다꺼리만 해 주다가 한차수 씨처럼 진짜… 진짜 세상에 도움 되는 분을 살렸다는 생각이 드니까 막 가슴이 벅차오르는 거 있죠.”

내가 지금 무슨 말을 들은 거지.

한차수는 그의 어깨를 토닥이기 위해 올라가려던 손을 멈췄다. 회색 눈동자가 심각한 빛을 담고 박성진을 바라보았다.

박성진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진 지 오래였다.

“생각해 보니까 일하면서 보람찬 순간이 언제였는지 기억이 안 나더라고요. 그때 깨달았죠. 아, 내가 매너리즘에 빠져 있었구나…! 생명을 살리는 일이 이렇게 보람차고 의미 있는 일이었는데 내가 지금까지 그걸 잊고 있었구나 하고.”

“…….”

딱히 안쓰러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군. 한차수는 마음속으로 근로 의욕을 되찾은 박성진을 축하해 주었다.

그사이 줄이 반이나 줄어 있었다. 슬슬 메뉴판이 가까이서 보여, 한차수는 정신을 집중했다.

‘뭐가 좋으려나.’

카페에서 파는 생과일주스는 세 종류였다. 딸기, 바나나, 키위. 음료를 받아 가는 사람들로 보건대 가장 인기가 많은 건 딸기인 듯싶었다.

“생딸기 주스랑 딸기바나나 주스 나왔습니다.”

그때, 누군가 메뉴판에 없는 음료를 받아 갔다.

“딸기바나나?”

한차수의 시선이 안경 쓴 사내에게 꽂혔다.

그리고 시선이 마주쳤다. 커다래진 검은 눈에 한차수는 머쓱해졌다. 그가 말없이 고개를 살짝 숙이자 남자가 웃으며 따라서 고개를 숙였다.

‘사람 좋은 얼굴이네.’

온화한 인상의 남자였다. 짙은 갈색 머리에 부드러운 눈매. 살짝 올라간 입꼬리 덕에 눈만 깜빡여도 미소 짓는 느낌이 드는 얼굴.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선량함이 풀풀 풍기는 사람이란 저런 이를 두고 하는 말일 테다.

‘한차수와는 다르게 말이지.’

부러움에 가만히 제 처지를 비관하는데 박성진이 곁으로 슬쩍 다가왔다. 궁금증 가득한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교수님이랑 어떻게 아세요? 원래 아는 사이세요?”

“예?”

“방금 전에 인사하셨잖아요.”

“…저분이 교수님이십니까?”

“어, 네.”

고개를 갸웃한 박성진이 이어 말했다.

“저희 의료 센터에 자문으로 오시는 심리학과 교수님이신데… 아는 사이 아니셨어요? 인사하신 줄 알았는데.”

“우연히 눈이 마주쳐서 그냥 예의상 인사한 겁니다. 그보다 심리학과 교수가 의료 센터에 자문으로 온다는 건 처음 듣네요.”

“저희 몇 년 전에 심리 상담 센터 만들었잖아요. 그거 관련해서 초기부터 도움 주시던 분이에요.”

각성자 관리국 의료 센터에는 심리 상담 센터가 따로 존재한다고 한다.

몬스터를 주로 상대하는 길드 소속 각성자와 달리 관리국 소속 각성자는 사람을 상대하는 경우가 많아서 생긴 일이었다.

“그렇군요.”

박성진의 말을 곱씹던 한차수는 깨달음이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걸 느꼈다.

그러고 보니 의료 센터에서 눈을 뜬 날, 정이흔이 제게 상담 권유를 하지 않았었나. 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금명결한테 귀걸이를 돌려준 날에도 의료진이 상담 관련해서 할 말이 있다고 정이흔을 불러냈었지.’

센터 내에 있는 심리 상담 센터에 다니게 하려고 한 거였군. 한차수는 헛웃음을 삼켰다.

‘그럼 저 교수라는 남자도 나에 대해 알고 있을지도 모르겠는걸.’

정이흔이 상담과 관련해 의료진과 이야기를 나눈 게 확실시되는 상황. 아마 자문역이라는 저 교수도 그 대화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크다.

“흠.”

그래서 아까 눈이 마주칠 때 웃은 건가? 한차수는 슬쩍 고개를 돌려 교수라는 남자를 훔쳐봤다.

작은 울타리 너머 벤치에 앉은 남자는 심리센터 직원으로 보이는 일행과 함께였다.

“주문하실 건가요?”

“아. 죄송합니다.”

차례가 돌아온 걸 잊고 있었다. 한차수는 고심 끝에 직원에게 물었다.

“혹시 딸기바나나 주스 됩니까?”

“네, 사이즈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기쁨을 숨기지 않으며 한차수는 컵을 가리켰다.

“제일 큰 걸로 주시면 됩니다.”

남자를 따라 하는 것 같아 조금 면구스러웠다. 하지만 본능은 이길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몹시 만족스러운 선택이었다.

“주문하신 딸기바나나 주스랑 샷 세 번 추가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나왔습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주스를 한 입 먹은 순간, 한차수는 깨달았다. 교수가 왜 메뉴에도 없는 걸 시켰는지 말이다.

“맛있죠?”

한차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없이 주스를 마시는 데 집중했다. 그렇게 얼마나 여유를 누렸을까.

“아, 날씨 좋다. 이렇게 하루 종일 있… 으으윽.”

박성진이 갑자기 신음을 흘리며 몸을 비틀었다. 손목에 찬 디바이스에서 붉은 빛이 깜빡거리고 있었다.

박성진의 얼굴이 새까맣게 죽었다. 깊은 한숨을 쉰 그가 말했다.

“입이 방정이라고. 하아… 한차수 씨, 저 잠깐 아래층에 내려갔다 와야 할 것 같은데요. 어떻게 하실래요?”

“저는 좀 더 있다가 가겠습니다.”

“어, 혼자 괜찮으시겠어요?”

“사람이 이렇게 많은데 무슨 일 있겠습니까.”

박성진은 그래도 안심이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저 대신 수진 씨가 올 거예요. 기다리시다가 무슨 일 있으면 바로 연락하시고요.”

박성진은 호출기까지 쥐여 주고 자리를 떠났다. 가는 와중에도 걱정이 되는지 틈틈이 뒤를 돌아보는 게 참 유난이다 싶었다.

“흠, 한 잔 더 마실까.”

아무 생각 없이 멍하니 음료수나 마시다 보니 어느새 1리터를 전부 비웠다. 한차수가 빈 컵을 아쉬운 눈으로 응시할 때였다.

“안녕하세요.”

부드러운 목소리가 공기를 흔들었다. 고개를 든 한차수는 눈을 깜빡였다.

밤색 머리에 까만 눈동자. 선량함의 표본 같은 사내가 자신을 바라보며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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