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화
금명결에게 귀걸이를 넘긴 순간부터 한차수는 정이흔이 다시 찾아올 거라 예상했다. 그렇게 퇴사를 외쳐 대던 자신이 왜 천령 길드에 남기로 결정했는가. 다 금명결 때문이었다.
정이흔도 그걸 모르지 않을 테니 아마 어떻게 해서든 자신을 붙잡을 만한 뭔가를 들고 오리라. 한차수는 쉽게 그의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아침에 정이흔이 방문할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한차수는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나는 종신 계약서가 무섭다.’
그러니 종신 계약서를 보자마자 정말 큰 정신적 충격을 받을 것 같았다. 에너지를 소모할 정도로 말이다.
‘말을 꺼낼 때마다 기절해 버리면 정이흔도 더는 어쩔 수 없겠지.’
그렇게 한차수는 제약을 이용해 정이흔을 물리칠 태세를 갖췄다.
다만 그가 예상치 못한 게 있다면….
“간밤에 푹 잤습니까, 한차수 씨?”
정이흔은 그럴 생각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는 서류는커녕 가방 하나 없이 한차수를 찾아왔다.
“식사도 잘 챙겨 먹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선지 지난번보다 얼굴이 더 좋네요.”
색이 옅은 바지에 흰 셔츠. 가볍다 못해 간단한 차림새의 남자는 손에 노란 꽃다발을 들고 있었다.
막 데이트에 나설 것 같은 모습에 한차수의 눈동자에 혼란함이 깃들었다. 그가 예측한 시나리오에 이런 경우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 받아요.”
정이흔이 다소곳이 다가와 꽃다발을 건넸다. 한차수는 망가진 기계처럼 삐그덕거리다 꽃을 받았다.
“이따가 센터 사람이 꽃병을 가져올 테니 거기 꽂아요. 향은 강하지 않은 걸로 골랐으니 지내는 동안 거슬리지는 않을 겁니다.”
잔잔한 목소리로 말하는 내내 정이흔은 제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청순한 빛을 발하는 붉은 눈동자에 한차수는 말을 잃었다.
하지만 이내 무덤덤한 얼굴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감사의 의미였다.
‘역시 이게 정답이었군.’
정이흔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계약서를 가지고 오지 않길 잘했어.’
그도 알고 있었다. 금명결이라는 족쇄가 사라진 이상 한차수는 언제든 퇴사할 수 있다는 것을.
하지만 왜 예전처럼 그에게 종신 계약을 요구하지 않느냐면….
‘그렇지 않아도 정신적으로 취약한 상태인데 여기서 더 큰 스트레스를 줄 수는 없어.’
정이흔은 그가 건강한 상태로 길드에 남아 주길 원했다. 비틀리지 않고 올바른 몸과 마음을 가진 한차수. 그게 정이흔이 바라는 한차수의 형태였으니까.
그래서 섣불리 계약을 강요하는 대신 조심스럽게 접근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오는 길에 좋은 소식을 하나 접했습니다.”
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회색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정이흔은 그와 눈을 맞추며 말했다.
“두 달 전에 열린 길드 내 자유 경매 당첨자에 한차수 씨 이름이 있더군요.”
크게 떠진 눈동자를 바라보며 정이흔은 소리 없이 웃었다.
“자, 여기요.”
그가 준비한 진짜 선물은 바로 이것이었다.
주먹보다 조금 작은 회색빛의 수정.
“서해안 던전에서 드롭된 마령석입니다. 아쉽게도 크기가 그리 크지는 않지만 데리고 다니기엔 오히려 이 정도가 더 좋을 거예요.”
마령석 혹은 정령석은 던전이나 게이트에서 아주 낮은 확률로 드롭된다. 이름처럼 마령이나 정령을 품은 수정이며, 마수의 알과 달리 테이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대신 상대적으로 부화가 쉬운 만큼 가지고 태어나는 능력도 변변치 않은 게 사실이었다. 종이에 베인 상처 정도밖에 치료하지 못하는 힐링이나 탄산보다도 덜 아린 독 정도?
하지만 지금의 한차수에겐 이보다 더 적절한 선물이 없었다. 아니, 꼭 필요한 선물이었다.
단단히 세워 둔 마음의 벽을 노력으로 허물 수는 없지만, 부드러운 온기로 녹일 수는 있으니까.
‘그리고 정신적으로도 여러모로 안정되겠지.’
작고, 연약하고, 지켜줘야 할 존재가 생기면 사람은 놀랍도록 강인해진다. 대격변 초기, 아무런 능력 없이도 아이를 지키기 위해 몬스터에 맞선 수많은 부모가 그걸 증명한다.
그러니 백담의 말은 틀렸다. 한차수는 굳이 그런 폭력적인 방식으로 회복하지 않아도 된다.
정이흔은 한차수의 손에 수정을 조심스레 쥐여 주며 말했다.
“이제 한차수 씨 겁니다.”
부디 그가 늦지 않게 회복하길 바라면서.
***
“꽃병 대령했습니다아! 어라, 한차수 씨 뭐 하세요?”
“…….”
“헉, 이거 수정 아니에요? 와, 진짜 안에서 빛무리 같은 게 움직이는구나. 얘가 조금 있으면 밖으로 나오는 거죠?”
“…….”
“어, 한차수 헌터? 한차수 씨?”
“아.”
의료진의 부름에 한차수는 뒤늦게 정신을 차렸다. 고개를 세차게 휘저은 그는 한숨 같은 숨을 내쉬었다.
손안에 느껴지는 온기가 너무 무거웠다. 정이흔이 주는 마음만큼이나.
쯧, 자신도 모르게 혀를 찬 그가 직원을 불렀다.
“저, 죄송하지만.”
“이제 말씀하실 수 있으세요?!”
“아, 네.”
“자, 잠시만요. 팀장님 불러올게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꽃병은 여기 둘 테니 꽂으시면 되고요, 아, 물도 받아 놨어요!”
“…….”
한차수는 허탈한 얼굴로 텅 빈 병실과 마령석을 번갈아보았다.
“하는 수 없지.”
난리 통에 휴대폰을 잃어버린 제 잘못이다. 한차수는 한숨을 내쉬며 침대에 몸을 묻었다.
머리맡에서 반짝이는 마령석이 몹시 신경 쓰였지만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몇 분이 흘렀을까. 복도 저편에서부터 우르르 사람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한차수 헌터!”
“한차수 씨, 저희를 부르셨다고요!”
“저는 박성진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다들 조용히 안 해? 검진이 먼저다, 멍청이들아!”
그 후로도 한참이나 시달린 끝에 한차수는 의료 센터 노트북을 빌릴 수 있었다.
그리고 충격적인 검색 결과를 마주했다.
“성인의 지성을 갖추기까지 못해도 3년이 걸린다고?”
그전까지 마령은 다섯 살 난 아이나 다름없다고 한다. 밥 먹기 싫다고 투정 부리고, 갑자기 심통이 나 잘 자고 있는 주인의 가슴을 향해 뛰어내리고….
“잘 자라고 자장가도 불러 줘야 한다고?”
이건 정말로 애를 키우는 게 아닌가. 한차수는 눈앞이 아찔해졌다. 심지어 지성을 갖추는 건 개체마다 차이가 있다고 한다.
마령을 키운 지 10년이 되었는데 아직도 지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한탄 글을 본 한차수는 결심했다.
‘부화시키면 안 되겠군.’
마령석을 부화시키는 데 가장 중요한 건 신체적 접촉. 달리 말하면 가까이 가지 않으면 마령도 부화할 일 없다는 말이었다.
“하필이면 악역한테 오다니, 너도 운이 없구나.”
한차수는 복잡한 눈으로 마령석을 바라보았다. 온기를 품은 작은 수정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정이흔이 떠올랐다.
쓸데없이 다정한 녀석.
한숨을 삼킨 한차수는 마령석을 조심스럽게 베개 위에 올려놓았다.
“나중에 퇴사하면 내가 따로 좋은 주인 찾아 줄게.”
그전까지는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도록 하자. 주인공과 나처럼.
그의 입가엔 어느새 쓴웃음이 맺혀 있었다.
***
각성자 관리국 제1본부 위기관리실 실장은 바쁜 자리였다. 한차수의 곁에 머물 시간을 내려면 밥 먹을 시간도 없이 일해야 할 만큼.
기태연은 빠르게 서류를 훑으며 물었다.
“12구역 순찰 내용 어디 있지?”
“정민이가 곧 가져올 겁니다. 지금 기록 관리실에 가 있어요.”
“이카로스와 적풍 간의 세력 다툼은.”
“그거 이카로스 길드 마스터 취조하면서 업데이트된 부분이 있어서 제가 지금 정리 중입니다! 1시간 뒤에 보고드리겠습니다.”
“다음은… 개발실이군. 이 새끼들은 트레이닝 시스템 가지고 도대체 얼마나 질질 끌 생각인 거야?”
그렇지 않아도 백담이 도대체 언제 범인들을 고문할 수 있냐고 아침부터 전화를 해 댔다.
“한지권, 개발실에서 정확히 뭐라고 지껄였는지 말해 봐.”
기태연의 시선을 받은 직원이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 시스템에 오류가 생겨서 아무래도 몇 달은 기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가장 약한 몬스터를 출력해 보려 했는데 뭔가 꼬였는지 드래곤들만 나온다고.”
“오류?”
기태연이 기가 차다는 듯 웃었다. 머리를 쓸어 넘기는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났다.
“오류라. 21번의 베타 테스트를 통과하고 이제 막 사내 테스트를 앞둔 시스템이 갑자기 오류를 일으켰다, 이 말이지?”
“…네.”
“먹고 째겠다는 거군.”
수정을 손에 쥐니 아주 눈에 보이는 게 없나 보지?
보나 마나 뻔했다. 트레이닝 시스템은 이미 완성된 거나 다름없으니 그대로 내팽개친 거다. 지금쯤 침을 흘리며 수정을 가지고 무슨 실험을 할까 두 눈을 빛내고 있겠지.
“좋아.”
두 손으로 책상을 짚은 기태연이 일어나며 외쳤다.
“여기서 개발실 한번도 안 가 본 사람 있나? 향후 반년 정도는 아마 원래 모습을 못 볼 텐데, 오늘이 마지막 기회니 구경하고 싶은 사람은 따라오도록.”
간단히 말하자면 반년이 걸려도 복구할 수 없도록 개박살을 내겠다는 뜻이었다.
위기 관리실 직원들은 상사의 말을 찰떡같이 알아들었다.
“헉, 저요! 그 새끼들, 제 스쿠터 고쳐 준다면서 엔진에 촉수 심어 놨어요!”
“저, 저도 갑니다!”
여기저기서 개발실의 피해자들이 속출했다. 지원자를 충분히 모집한 기태연은 연구동을 향해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트레이닝 시스템 연구실은 B동이라고 했지.”
“넵! 가상 현실 관련 연구는 B동에서만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그러니 A동은 전소되어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가장 원한이 깊어 보이는 직원이 발랄하게 외쳤다. 기태연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전부 끝내고 앞으로 남은 시간은 전부 한차수 곁에 있어야지.
연구동을 응시하는 그의 눈동자 안에 새파란 불꽃이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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