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화
귀걸이에 대한 말을 듣고 놀란 탓일까. 한차수는 식사를 절반이나 남겼다.
“그게 다 먹은 겁니까?”
고개를 끄덕이는 한차수에 기태연은 소리 없이 혀를 찼다.
‘이따가 의료 센터 애들한테 혼나겠는데.’
푸른 눈동자가 한차수를 속속히 훑었다. 체격에 맞춰 지급한 옷일 텐데도 지나치게 품이 커 보였다. 몸집에 비해 살이 없는 탓이었다.
하긴 개고생을 몇 번이나 겪었는데 살이 오르는 것도 이상한 일이다.
“그럼 얘기 좀 하죠.”
한차수는 잠시 멈칫하더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긴장한 모양인지 그는 방금 전까지 쓰고 있던 마스크를 손에 꼭 쥐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신 상태가 불안정하다고 했던가. 기태연은 무심한 얼굴로 의료진에게 들은 말을 떠올렸다.
단기간에 생사의 기로를 너무 많이 넘나든 탓인지 한차수의 심리 상태는 꽤 불안정하다고 했다.
“원래도 좀 방어적인 성격인데 짧은 기간 동안 폭력적인 상황에 너무 많이 노출되어 그게 심해진 것 같아요.”
마스크를 고집하는 것도 같은 이유라고 의료진은 추측했다.
“아마 외부로부터 자신을 단절시키고 보호받고 싶다는 마음이 그렇게 드러난 걸 겁니다.”
의료 센터가 종종 자문을 구하는 심리 상담가 또한 같은 의견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잘못 손대면 툭 하고 부러질 것 같은 남자인데, 정신적으로도 매우 취약한 남자라. 기태연은 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거 정말 ‘물귀신’이 발생하기 딱 좋은 상황 아닌가.
“하아….”
일이 꼬이면 이렇게도 꼬이는군.
기태연의 입에서 무거운 한숨이 흘렀다. 털썩 자리에 주저앉자 한차수가 그를 바라ㅗ았다.
슬슬 이야기해 보라며 채근하는 눈빛이었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말입니다.”
기태연은 천천히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정이흔과 금명결, 백담에게 했었던 것 그대로.
그러니까 달리 말하자면.
“관리국에서 쓰러진 날, 한차수 씨에게 먹인 포션 중에 상태 이상 효과를 유발하는 포션이 섞여 있었던 모양입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얼굴로 사기를 쳤다 이 말이다.
“당시 관리국 소속 힐러들이 모두 차출되어 나가 있어 급히 의료 센터의 도움을 받았는데 아마 그 과정에서 개발실이 개발 중이던 포션 몇 개가 섞인 걸로 보입니다.”
한차수는 예상대로 충격받은 얼굴이었다. 그러더니 이내 미간을 좁혔다.
아무래도 그래서 이게 어떻게 귀걸이와 연결되는지 이해가 안 가는 모양이었다.
여기가 하이라이트지. 기태연은 왼 다리 위에 오른 다리를 얹으며 말을 이었다.
“한차수 씨는 지금 영체화 상태 이상에 걸린 걸로 보입니다. 상태창에는 뜨지 않을 테니 헛수고는 하지 마시고, 귀속 아이템이라던 귀걸이가 해제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짧게 숨을 삼키는 소리가 났다. 기태연은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정이흔 길드장이 말해 줬습니다. 한차수 씨가 착용하고 있던 귀걸이가 귀속 아이템이라고요. 그리고 그걸 금명결 길드장에게 넘기고 싶어 했다는 것도.”
“그… 쿨럭!”
“물 좀 줄까요?”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저은 한차수는 천천히 호흡을 골랐다. 그리고 조심스레 한 글자씩 떼어 말했다.
“영, 체. 화, 라는 건….”
“음, 긴 쪽을 원합니까, 아니면 짧은 쪽을 원합니까?”
기태연이 손을 들어 각각 다른 방향을 가리켰다. 한차수가 왼쪽을 응시했다. 긴 쪽이었다.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듯이 말 그대로 영체화가 되는 겁니다. 유령처럼 존재감이 옅어지고 덩달아 신체 구성도 바뀌는 건데, 아. 너무 심각하게 들을 필요는 없습니다.”
기태연이 딱 잘라 말했다.
“개발실에서 실험 중인 포션이라 해독제도 전부 준비되어 있습니다. 일주일 후면 아무 이상 없이 나을 거예요.”
물론 개소리였다. 포션도, 해독제도 아무것도 없었다.
한차수가 걸린 건 영체화가 아니라 그의 피가 불러온 부작용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기태연은 뻔뻔하게 거짓말을 쏟아냈다. 걸리지 않을 자신이 있어서였다.
‘그나저나 생각보다 피를 짙게 받아들인 모양이야. 귀속 아이템까지 내가 해제할 수 있었던 걸 보면.’
물귀신이 된 상대는 기태연의 영향력 하에 놓인다. 굳이 따지자면 권속처럼 여겨진다는 뜻이다.
기태연이 그의 귀속 아이템을 해제할 수 있었던 이유다.
‘하여튼 이놈의 부작용 때문에 바람 잘 날이 없군.’
기태연은 자신을 불태워 버릴 것처럼 노려보던 정이흔을 떠올렸다.
“죽은 게 아니고서야 귀속 아이템이 해제될 리 없을 텐데요, 기태연 실장님.”
오밤중에 당당하게 국장에게 직통 전화를 건 사내다웠다. 패기가 넘쳐흘렀다고 할까. 아니면 살기라고 해야 할까.
만약 미리 변명을 준비해 놓지 않았다면 정이흔은 정말로 관리국을 불태웠을 것이다. 그리고 금명결과 백담은 그걸 부추겼겠지.
‘생각만 해도 머리가 아프네.’
기태연은 헛생각을 지우고 눈앞의 현실에 집중했다.
천방지축 S급들 때문에 좀 짜증 나긴 했지만 결론만 놓고 보자면 제게도 좋은 일이었다. 한차수에게 부작용이 나타났다는 게 확실시되었으니까.
이제 남은 건 한차수가 의료 센터에 머무는 동안 곁에 머물며 그의 몸에 남은 자신의 기운을 걷어 내는 것뿐이었다.
“그냥 감기에 걸린 거라고 생각해요. 꾸준히 해독제를 복용하면서 쉬다 보면 나을 겁니다.”
이 정도면 됐겠지. 기태연은 대화를 마무리했다. 나름대로 부드럽게 말하려 노력했는데 잘 됐는지는 모르겠다.
뭐, 한차수가 질질 짜지 않는 걸 보면 잘된 것 같기는 하지만.
“그럼 조금 이따 봅시다.”
각성자 관리국의 제일가는 사기꾼은 그렇게 한차수를 내버려 두고 퇴장했다.
“…….”
그리고 혼자 남은 한차수는 그대로 툭 하니 침대 위로 쓰러졌다.
“하, 하하….”
얼굴을 감싸 쥔 손 사이로 숨죽인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얼마나 있었을까. 허탈함 가득한 회색 눈이 천장을 응시했다.
‘빌어먹을, 다행이다.’
이딴 식으로 일이 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도 못했는데…
‘악역에 빙의한 인생이 기구해서 신이 선물이라도 준 건가.’
사실 꺼림칙한 구석이 없는 건 아니었다. 영체화라는 특이한 상태 이상에 걸렸다는데, 정작 자신은 이렇다 할 이상 증세를 느끼지 못했으니까.
하지만 시스템창에 나타나지 않는 상태 이상은 수두룩했다. 원작에서 정이흔도 그런 상태 이상에 하나 걸려 고생하지 않았던가?
게다가 평생 안고 살아가야 할 병도 아니고 일주일이면 낫는단다. 거기다 더해 귀속 아이템까지 해제되었다니.
‘그거면 충분해.’
한차수는 제 몸 하나만 건사하면 만족하는 성인이었다. 별 소득도 없을 의문을 파헤치는 데 시간 낭비하지 않는 어른이라는 뜻이었다.
방법이 어찌 되었든 그는 원하는 바를 이루었다.
금명결로부터의 완전한 자유 말이다.
“후우….”
짜릿한 해방감이 전신을 가득 채웠다. 빙의한 이후 처음으로 맛보는 만족스러움이었다.
이제 금명결도 치웠으니 남은 건 재생 스킬의 제약을 해제하는 일이었다. 목소리도 안 나오는 몸으로 퇴사하겠다고 하면 정이흔이 들어줄 리가 없으니까.
그러려면 든든히 먹어야겠지.
“더 드시려고요?”
놀라 되묻는 의료진을 향해 한차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들고 있는 포스트잇에는 음식을 더 달라는 말이 쓰여 있었다.
“음, 무리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잘 먹는 게 중요하긴 한데 그것도 적정선이라는 게 있습니다. 지금 한차수 씨 몸으로는 많은 양의 음식을 소화할 수 없을 거예요.”
한차수는 단호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제 몸을 잘 아는 사람은 자신 외엔 없었다.
지금 그의 몸은 에너지를 필요로 했다. 생체 활동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 말고, 재생 스킬에 필요한 대량의 에너지가.
‘적어도 지금보다 두세 배는 더 필요해.’
빠른 회복을 위해서는 많은 에너지의 투입과 절제된 소모가 병행되어야 했다. 그래서 지금도 일부러 목소리를 내고 있지 않았다.
‘일분일초가 아깝다.’
몸을 정상 궤도에 돌려놓고 나면 집에서 아예 나오질 말아야겠다.
한차수는 전투적으로 식사에 임하며 결심했다. 의료 센터를 퇴원해 귀가한다면, 당분간은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오지 않겠다고.
그도 그럴 게, 최근 들어 자신에겐 단 하루도 마음 놓고 편히 쉴 수 있는 날이 없지 않았는가.
빙의하자마자 주인공 동생 대신 등짝이 갈리지를 않나. 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사라지려 했더니 주인공이 붙잡아, 뿌리치나 했더니 금명결이 습격해….
아이템 거래소 협회와 백담의 집에서 있었던 일은 말하기도 입이 아팠다.
너덜너덜해진 몸으로 지금껏 살아 있는 게 기적이었다.
‘차라리 전쟁터에서 구르는 게 낫겠어.’
적어도 거기선 여러 사람 때문에 골치 아플 일은 없지 않나. 한차수는 한숨을 내쉬고서 음료를 들이켰다. 건강에 좋은 거라며 의료진이 한 박스나 놓고 간 음료였다.
“윽.”
이거 맛이 왜 이래. 다급히 물을 털어 넣은 한차수는 일그러진 눈으로 라벨을 확인했다.
<홍삼과 녹용을 갈아 넣은 시원한 배 주스!>
제조사가 적혀 있을 자리에는 ‘각성자 관리국 개발 지원실’이라는 단어가 적혀 있었다.
“…….”
개발실은 도대체 뭐 하는 집단이지? 한차수의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자신을 살리는 데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치료 기기와 제게 이상한 상태 이상을 부여했다는 포션. 그리고 이 괴상망측한 맛의 음료수까지 모두 개발실의 작품이지 않나.
“흠….”
잠시 고민하던 한차수는 깔끔하게 결론을 내렸다.
‘엮여서 좋을 것 없는 곳이군.’
개발실의 역작을 눈에 안 보이는 데로 치우고, 한차수는 눈을 감았다. 체력 비축에 낮잠이 도움이 되리란 판단에서였다.
그의 판단은 옳았다. 이틀 뒤 아침, 한차수는 눈을 뜨자마자 기쁜 소식을 접했으며.
[ 알림! ]
[ 스킬 ‘재생’에 필요한 에너지 공급 상태 원활 ]
[ 제약 ‘말조심’이 해제되었습니다. ]
별로 기쁘지 않은 손님도 한 명 받았다.
“좋은 소식이 있습니다, 한차수 씨.”
정이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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