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7화
남은 두 시간의 수면 시간을 전부 채우고 일어난 한차수는 침음을 흘렸다.
아까보다 인원이 한 명이 더 늘어나 있었다.
“한차수 헌터 덕분에 아주 즐거운 아침을 맞이했습니다.”
기태연은 어디 전쟁터에서 구르다 온 듯한 모양새였다. 한껏 벌어진 셔츠 깃 사이로 땀이 근육을 타고 흘렀다.
언제나처럼 의자를 끌어 앉은 그가 그동안 있었던 일을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금명결의 난폭 운전, 백담의 연구재료 소생, 그리고 오밤중에 국장의 잠을 깨운 정이흔까지.
뒤로 갈수록 한차수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기태연은 어느새 담배 끄트머리를 신경질적으로 씹어 대고 있었다.
‘이 미친놈들이….’
한차수는 고개를 들어 침대를 둘러싼 세 명의 S급들을 한 명 한 명 노려보았다.
“배고픕니까? 식사를 가져오라고 할까요?”
“저건 허기진 얼굴이 아니라 노려보는 눈이야, 천령 길드장.”
“당신들 둘 다 꺼지길 바라는 눈빛이겠죠.”
당연히 누구 하나 뉘우치는 기색이 없었다. 한차수는 이마를 짚었다.
전날, 그가 의료진에게 부탁한 건 아주 단순한 일이었다.
엑실리스 길드 마스터에게 건넬 물건이 있으니 그를 불러 줬으면 좋겠다는 부탁.
다만 직원이 이걸로 됐냐고 물은 김에 물건의 종류를 구체적으로 정해 줬을 뿐이다. 혹여나 금명결이 못 알아듣고 무시할까 싶어서.
그런데 아주 개판이 났다.
‘인내심이라고는 먼지만큼도 없는 놈들.’
깊은 한숨을 내쉰 한차수는 슬쩍 네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정이흔과 금명결. 둘 중 누가 먼저 어떻게 귀속 아이템을 해제했냐고 물을까 궁금해서였다.
그런데 예상외로 둘 다 그것에 대해선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지난번에 준 구슬은 쓰기 너무 어려운 것 같아서 새로운 버전으로 가져와 봤습니다. 손목에 감아서 쓸 수 있는 건데, 어떻습니까?”
“그거 미아 보호 팔찌 아닌가?”
“납치 미수범이라 그런가, 눈썰미가 있네요.”
오히려 금명결과 정이흔은 서로 싸우기에 바빴다. 한차수는 한심한 기색을 숨기지 않았다. 그들로부터 멀찍이 떨어진 백담 또한 마찬가지였다.
까드드득!
주의를 환기시킨 건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 고드름. 순식간에 얼어붙은 공기에 네 쌍의 시선이 일제히 기태연을 향했다.
“지금 졸려 죽겠는 건 나뿐이에요? 사람 다 모였으면 빨리빨리 끝냅시다.”
길게 하품을 한 그가 서랍을 열어 상자를 꺼냈다.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가 든 상자였다.
“물건 받으러 오신 분은 물건 받으시고.”
휙 하고 포물선을 그리는 상자에 한차수가 경악한 것도 잠시. 금명결이 멋들어진 자세로 상자를 낚아챘다.
“길드원 괜찮나 살피러 오신 분은 빨리 살피고 돌아가시고.”
삭막한 푸른 눈동자가 정이흔을 향했다. 아주 잠깐 그의 눈에 음울한 기색이 어렸다 사라진 것도 같았다.
“…그리고 그쪽은 왜 왔는지 아직 물어보질 못했네요. 백담 헌터, 당신은 왜 온 겁니까?”
백담이 코웃음을 치며 한 걸음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선 믿을 수 없는 말을 내뱉었다.
“가족 될 사람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도 오지 않으면 그게 등신 아니에요?”
“…가족? 누가, 누구의 가족이라고요?”
“보고도 몰라요? 한차수 씨 말이에요.”
“혼자 주장하는 헛소리입니다, 기태연 실장.”
돌아가는 꼴을 보다 못한 정이흔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하려 했다.
그러나 상황은 오히려 더욱 파국을 향해 치달을 뿐이었다.
“어쩐지 이상하더라니. 설마 같이 고문하고 싶다던 동생이 저 동생이었습니까?”
“잠깐, 고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아.”
아주 흥미진진하군. 귀걸이도 떼어 냈겠다 완벽한 자유의 몸이 된 한차수는 마음 놓고 아수라장을 구경했다.
‘귀걸이를 어떻게 해제했냐고 물었을 때를 대비해 변명을 다섯 가지나 만들어 뒀는데 다 쓸데없게 됐네.’
누구 하나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볼 생각을 안 하니 먼저 말하기도 뭐했다.
‘뭐, 좋은 게 좋은 거지.’
은근슬쩍 넘어갈 수 있으면 이쪽이야말로 환영이었다. 한차수는 베개를 세워 그곳에 편히 몸을 기댔다.
그렇게 기태연, 백담, 정이흔이라는 보기 드문 삼파전을 구경하려는데.
“한차수 씨.”
어느샌가 가까이 다가온 금명결이 그를 보며 씩 웃고 있었다. 한차수가 고개를 갸웃하니 그가 상자를 흔들며 말했다.
“선물 고마워.”
대충 고개를 까딱이자 금명결은 피식 웃었다. 이어서 소름 돋는 말이 귓가에 꽂혔다.
“난 한차수 씨랑 파트너 하는 것도 꽤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
“이렇게 돼서 꽤 아쉽네.”
미친놈인가? 한차수는 날짐승을 보는 눈으로 금명결을 일별했다. 그의 손은 어느새 인벤토리를 뒤지고 있었다.
금명결은 자신만의 세계에 빠져 있는 상태였다.
“아, 아닌가. 이제 내가 소유주니 한차수 씨한테 파트너 제안을 하는 방법도 있지.”
중얼거리는 꼴을 보아하니 아무래도 자신의 선택은 옳은 모양이었다. 한차수는 재빨리 인벤토리에서 원하던 물건을 찾아내 뒤집어썼다.
“어때, 한차수 씨. 나랑… 그거 지금 나 웃기려고 하는 건가?”
한차수는 휙휙 고개를 저었다. 그를 따라 가면에 장식된 화려한 깃털이 이리저리 휘둘렸다. 얼굴이 좀 가렵긴 했지만 감당할 수 있을 정도였다.
“…말 한마디 없이 사람 엿 먹이는 데 아주 능하네.”
한차수는 어깨를 으쓱였다. 엿이라니. 이건 어디까지나 자기 방어 수단일 뿐이었다. 혹시라도 금명결이 틈을 타 제 귀에 귀걸이를 꽂아 넣으려는 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수단.
‘계약서도 쓰지 않고 그러진 않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니까.’
한차수의 방어적인 자세에 금명결이 입술을 삐죽였다.
“내가 그동안 좀 거칠게 굴어서 한차수 씨를 많이 놀라게 했을 거라는 건 알아. 하지만 사람 인상이라는 건 원래 변하기 마련 아닌가? 가까이서 지내다 보면.”
“둘이서 뭐 하고 있는 거예요?”
정이흔과의 대화가 끝난 건가. 백담이 금명결의 수작을 끊어 내며 다가왔다.
“엑실리스 마스터는 볼일 끝났으면 이만 가지 않으실래요? 당신 지금 깨어 있을 시간도 아니잖아요. 박쥐처럼 음침하게 밤에만 깨어 있는 사람이 왜 답지 않게 굴어서 여러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네.”
빈정거림에 있어선 금명결을 압도하는 실력자의 등장에 한차수는 안도했다.
하지만 이쪽도 제정신이 아니기는 마찬가지였다.
살랑살랑 다가온 백담은 금명결을 밀어내고서 무언가를 들이밀었다.
알 수 없는 이름들이 적힌 종이였다. 이름을 보아하니 여러 나라 사람들이 섞여 있는 듯했다. 성별과 나이대 또한 다양했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건지 모르겠다. 한차수가 눈빛으로 묻자 백담이 꽃처럼 어여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 달콤한 목소리로 살벌한 소리를 내뱉었다.
“어떻게 죽었으면 좋겠어요?”
“……?”
“아, 내가 말을 잘못했네요. 죽이지는 않을 거예요. 죽고 싶게 만들 거지만. 그러니 마음 편히 말해요. 당신을 다치게 한 이 개자식들이 어떤 방식으로 얼마나 고통받으며 죽었으면 좋겠는지.”
연갈색 눈동자 안쪽에서부터 광기가 차오르고 있었다. 햇살을 받아 하얗게 반짝이는 머리카락은 바람 없이도 잘게 흔들렸다. 얼마나 미친놈 같았는지 금명결마저 작게 또라이라고 읊조릴 정도였다.
결국 그를 구할 수 있는 건 주인공밖에 없었다.
“두 분 다 그만하시죠.”
정이흔이 두 남자를 침대에서 멀리 떨어트려 놓으며 말했다.
“금명결 길드장은 원하는 걸 얻었으니 이만 돌아가세요. 그리고 백담 헌터… 내가 누누이 말했을 텐데요. 한차수 씨한테 스트레스 주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고.”
“그래서 그 스트레스 없애 주겠다고 가져온 거잖아요?”
백담이 활짝 웃으며 명단을 흔들었다. 각성자 관리국의 가상 현실 트레이닝 시스템의 제물이 되어 백담의 손에 수십 번 죽을 사람이었다.
“이런 종류의 스트레스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나보다 더 잘 아는 사람은 없어요. 정이흔 길드장, 그건 당신도 알 텐데?”
18살 어린 나이에 각성하여 산전수전을 겪어 온 백담. 그라고 공포와 두려움에 떨었던 날이 없겠는가.
하지만 그는 극복해 냈다. 그를 목줄에 묶어 개처럼 부리고자 하던 녀석들의 목을 지르밟고 심장을 뽑아냄으로써.
“세상 모든 일이 같잖은 위로의 말 하나로 극복되면 얼마나 좋을까요.”
“…….”
“나는 한차수 씨를 도와주려는 거예요. 당신과 마찬가지로.”
중요한 건 공포의 대상을 제 손으로 굴복시키는 경험이다. 그들이 더 이상 자신에게 아무런 영향력을 끼칠 수 없다는 걸 인식하고 무의식에 각인시키는 과정.
백담의 말에 정이흔은 쉬이 대답하지 않았다. 그가 말하는 바를 모르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때, 주의를 환기하듯 기태연이 손을 튕겼다.
“S급 여러분들의 의미심장한 대화를 방해해서 참으로 죄송합니다만 일단 우리 환자부터 좀 챙깁시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병실 문이 열렸다. 의료진이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다.
“안녕하십니까! 실례하겠습니다. 좀 비켜 주세요!”
“안녕하세요, 한차수 헌터. 좋은 아침입니다. 오늘은 뭐로 드시겠어요? 한정식? 양식? 그것도 아니면 중식?”
“헉, 백담 헌터. 그렇지 않아도 급히 상의할 일이 있었습니다. 센터장님께서 부르시는데 잠시 시간 되십니까?”
“천령 길드장님, 지난번 말씀하신 상담과 관련해서 드릴 말씀이 있는데요. 잠깐 같이 나가실까요?”
“여기 계셨군요, 엑실리스 길드 마스터! 지금 안보실에서 찾고 계십니다. 동행해 주셨으면 하는데요.”
물론 그 틈을 타 들어온 건 의료진뿐만이 아니었다. 우아한 태도로 연행되는 금명결을 마지막으로 S급 세 명이 모두 자리를 비웠다.
“드디어 얘기 좀 할 수 있겠네.”
기태연이 지친 얼굴로 한숨을 내쉬더니 한차수를 향해 말했다.
“귀걸이, 어떻게 된 건지 궁금하지 않아요?”
빵을 찢던 한차수의 손이 우뚝 멈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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