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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45화 (45/113)

45화

엑실리스 길드는 저녁 늦은 시간에도 사람들로 붐볐다. 야행성인 길드 마스터의 성향에 감화된 사람 반. 처음부터 야행성이라 일부러 엑실리스에 입사한 사람 반. 그래서 우뚝 솟은 건물은 밤이 새도록 빛이 꺼진 적 없었다.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하아…. 나 이제 그만 가도 되지 않냐?”

금명결이 죽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커다란 몸집을 소파에 반쯤 구겨 넣은 그의 눈 밑이 시커멨다.

귀국하자마자 비서의 손에 납치되어 길드로 끌려와 지난 며칠간 밀린 일을 모두 처리한 결과였다.

“웃기지 마세요.”

비서가 코웃음 치며 그의 앞에 방금 올라온 서류 더미를 내려놓았다. 얼마나 무거웠던지 쿵 하고 책상이 울릴 정도였다.

금명결이 질린 얼굴로 그것을 바라보았다.

“나 이러다 정말로 죽어.”

“뻥치지 마세요. 내가 마스터 옆에 하루 이틀 있던 것도 아니고 지금 얼굴 때깔이 갓 태어난 아기처럼 반질반질하거든요?”

“그렇게까지 좋아 보여? 그럼 안 되는데.”

금명결이 재빨리 거울에 제 얼굴을 비췄다.

“진짜네. 나무 효과가 너무 좋았나 보다. 쯧, 화진아. 여기 한 대만 때려 볼래?”

“산재 처리에 더해서 유급 휴가 석 달이면 생각해 보죠.”

“내가 맞는데 왜 네가 휴가를 가?”

“S급을 맨주먹으로 때리는데 그 정도는 받아야 수지 타산 맞는 거 아닌가요?”

“됐다, 됐어!”

금명결이 거울을 내던지며 버럭 소리 질렀다. 비서는 코웃음을 치며 그의 앞에 서류 한 부를 더 내려놓았다.

“허튼수작 부리지 말고 성실하게 일하세요. 누가 평생 동안 여기 있으랍니까? 밀린 일 끝난 뒤에 하고 싶은 일 하시라고요.”

“알았다고.”

잠시 동안 침묵이 일었다. 서류 뒤적이는 소리와 만년필이 종이를 스치는 소리만 사무실을 울렸다.

하지만 이내 정적을 깨트리는 자가 등장했다. 당연히 참다못한 금명결이었다.

“얼굴만 보고 오면 안 될까?”

비서가 부리부리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았다.

금명결이 영국에 체류하는 동안 터진 게이트가 세 개. 새로 발견된 미공략 던전이 일곱 개였다. 그렇지 않아도 새로운 아이템 수급지에 목마르던 길드들은 개떼같이 달려들었고, 길드 마스터가 부재중이던 엑실리스는 당연히 뒷전으로 밀렸다.

심지어 겨우 10위권에 간당간당 드는 더원한테 밀리고 있는 형세란 말이다!

쾅 하고 비서는 들고 있던 태블릿 모서리로 책상을 찍었다. 후드득. 부스러기들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귀걸이 얻기 전에 죽고 싶으세요?”

“…….”

금명결은 조용히 시선을 돌렸다. 비서는 한숨을 쉬며 팔짱을 꼈다. 그놈의 한차수, 진짜.

하루라도 빨리 귀걸이를 손에 넣고자 하는 그의 열망은 알지만 일에도 우선순위가 있었다. 우선순위가.

“한차수 씨가 어디 애먼 데 납치당한 것도 아니고 각성자 관리국에 있는데 도대체 뭐가 그리 걱정입니까?”

금명결이 불만스러운 얼굴로 의자 손잡이를 두드리고 있었다. 비서가 눈썹을 찌푸리며 그를 재차 불렀다.

“마스터.”

“예감이 안 좋아서 그래.”

어떻게 보면 한심하게 들릴 수 있는 말. 그러나 비서의 반응은 달랐다. 진지한 표정으로 그가 물었다.

“정확히 어떤 면에서요.”

“백담을 습격했다는 녀석들 말이야. 아직도 배후를 파악하지 못했다고 했지?”

갑자기 돌아간 화제에 의아해하면서도 비서는 고개를 끄덕였다.

S급 힐러 피습 소식은 이미 헌터계에 쫙 퍼진 상태였다. 사건의 규모를 비롯해 천령 길드가 그를 구하기 위해 나섰다는 이야기도 모두 알고 있었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들이 어느 순간 갑자기 이지를 잃은 것도 말이다.

하지만 모두가 어느 정도 범인을 짐작하고 있었다. 일본 아니면 러시아. 두 나라가 아마도 물 밑에서 수를 쓴 거겠지.

하지만 그게 왜 한차수와… 맙소사. 두 눈을 크게 뜬 비서가 금명결을 바라보았다.

“그들이 노린 게 백담이 아니라 한차수라고 말씀하고 싶으신 겁니까?”

“어쩌면 그럴 수도 있겠지.”

차분한 대답에 비서가 침음을 흘렸다. 범인들의 목표가 백담이 아니라 한차수라고 가정한다면 그들이 손에 넣고자 한 건 명백했다.

한차수가 가지고 있는 귀걸이였다.

“하지만 감정을 맡은 감정사가 사망했다는 말은 없었습니다. 게다가 귀걸이에 관심을 가질 법한 인물들도 계속해서 지켜봤지만 이렇다 할 수상한 행적을 보인 인물도 없었고요.”

비서는 금명결이 한국을 떠나 있는 동안 한아협을 비롯해 저주와 신앙 계열 각성자들을 예의 주시해 왔다. 혹시 모를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다.

“감정사가 아니라 다른 이가 정보를 흘렸다면 감정사에게는 아무런 피해도 가지 않아.”

금명결은 한차수가 사인했던 계약서를 떠올렸다. 정보 발설의 페널티는 정확히 감정을 맡은 감정사가 해당 정보를 유출할 때만 적용된다고 쓰여 있었다.

달리 말하면 감정사가 아닌 누군가가 정보를 빼돌린 건 해당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였다.

“그건… 따로 알아봐야겠군요.”

한국 아이템 거래소 협회는 엑실리스에서도 자주 이용하는 곳이었다. 만약 내부 스파이가 있다면 확인해 봐야 할 일이었다.

비서는 침착한 얼굴로 태블릿에 붙은 먼지를 털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두 눈을 굴렸다.

“할 말 있으면 말해. 괜히 눈치 보는 척하지 말고.”

“그럼 빼지 않고 물어보겠습니다.”

삐딱한 자세로 금명결이 손을 까딱였다. 비서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가까이 앉으며 속삭였다.

“귀국하자마자 한차수 씨부터 봐야겠다고 하신 거, 다른 사람이 채 가기 전에 먼저 선수 치려고 하신 거죠?”

듣자 하니 한차수는 잠깐 호흡이 멈추기까지 했다고 한다. 한마디로 언제 갑자기 죽을지 모를 상태였다는 뜻.

만약 금명결이 누군가 한차수를 노리고 있다고 생각했다면, 한차수가 죽자마자 귀걸이를 가지기 위해 관리국에 가려 한 걸지도 몰랐다.

아니, 비서는 거의 확신하고 있었다. 그만큼 제 길드 마스터는 인정머리 없는 개새끼였으므로.

그리고 그걸 금명결이 느끼지 못할 리 없었다.

“…너 아주 날 천하의 개새끼로 보는구나.”

“에이,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잖아요.”

비서가 제게만 털어놓으라는 듯 눈을 반짝이며 싱긋 웃었다. 금명결이 마주 웃으며 그의 손에서 태블릿을 빼앗아 들었다.

그리고 그대로 비서의 이마를 내려찍었다.

“악!”

“헛소리하지 말고 가서 남세우 데려올 준비나 해라.”

“지금 일부러 화제 돌리시는 겁니까? 남세우는 갑자기 왜… 헉, 그렇군요. 마스터의 깊은 혜안을 내가 몰라보다니. 꿈속에서 괴롭혀서 자살하는 것처럼 만들려는 겁니까?”

“안 죽일 거고, 죽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거야, 이 미친놈아!”

금명결이 환장하겠다는 얼굴로 외쳤다.

“애초에 내가 걔를 왜 죽여?”

“그럼 운전 중에 차는 왜 박살 내셨어요?”

“…화진아, 나는 한차수 씨가 제법 마음에 들거든?”

금명결이 얼굴을 쓸어내리며 한숨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진심으로 한차수를 좋게 보고 있었다.

목숨이 위험한 상황에서도 굴하지 않는 패기 하며 감히 제게 마비약을 먹이는 발칙함. 거기다 더해 제 분수를 지키며 선을 넘지 않을 줄 아는 머리까지.

공략하기에는 적잖이 까다롭지만 성공 뒤에는 절절한 단맛을 맛볼 수 있는 상대 아닌가.

‘게다가 쓸데없이 대쪽 같은 성격이니 공격 스킬이 공유된다 한들 비밀을 팔아넘기지 않을 테고, 몸이 약하니 스킬을 쓸 수조차 없을 테지.’

어차피 누군가와 나눠 써야 하는 커플 아이템이라면 그 상대로는 한차수가 제격이었다. 그러니 이제 와서 그를 죽이고 귀걸이를 탈취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비서는 분명히 다른 이유가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아, 그러고 보니 한차수 씨 뒤에는 천령 길드장이 있었죠. 하긴 그 사람이 좀 무서워야 말이죠. 이해합니다, 마스터.”

“넌 진짜 그 입 때문에 망할 거다.”

투덜거린 금명결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어디 가세요? 한차수 씨 괴롭히러 가세요?”

“씻으러 간다!”

귀국하고 나서 옷을 갈아입기는커녕 씻지도 못했다. 버럭 소리 지른 금명결이 문을 붙잡아 당긴 순간이었다.

“어라, 어?”

비서가 돌연 새된 소리를 내뱉었다. 저게 또 이상한 수작질을 부리는구나. 금명결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걸음을 옮겼다.

“마, 마스터!”

“안 들려.”

“아니, 이상한 게 아니라…! 빨리 들어와 봐요, 얼른!”

“너는 내가 씻는 시간도 그렇게 아깝냐?”

“일단 오라고!”

“악!”

허겁지겁 달려온 비서가 금명결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그러더니 다급히 주변을 살피며 그를 사무실 안으로 다시 밀어 넣었다.

“문은 왜 잠가, 밀실 살인이라도 저지르게?”

“제 위시 리스트에 들어 있는 일이긴 한데 지금 당장은 아니고요. 이것부터 보세요, 얼른.”

“아, 왜….”

눈앞에 들이 밀어진 태블릿에 금명결이 있는 힘껏 성을 냈다. 어디 기업이 보낸 제안서니, 초청서니, 이젠 신물이 날 지경이었다.

그러나 화면 안에 보란 듯이 새겨져 있는 글자는 그의 예상과 달랐다. 아니, 예상을 훌쩍 뛰어넘어 그의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내용이었다.

[ 엑실리스 길드 마스터 금명결 헌터 귀하.

한차수 헌터의 아이템(액세서리)을 전해 드리고자 하니 엑실리스 길드 마스터께서는 내일 오전 각성자 관리국을 방문하시길 바랍니다.

― 각성자 관리국 제1본부 의료 센터 ]

“…….”

“…….”

차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적막이 두 남자 사이에 내려앉았다. 금빛 눈동자에 혼란이 가득 차고, 겨우 화면에서 시선을 떼어 낸 금명결이 물었다.

“이게 뭐야, 한차수 죽었어?”

“그, 그런가 봅니다.”

“…진짜로?”

귀속 아이템의 소유권 이전은 소유주가 사망했을 때만 가능한 일.

“이런 미친.”

그러므로 이건 공식적인 사망 선고나 다름없는 메시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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