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화
물론 그렇다고 당장 정이흔의 면전에 사표를 던지고 잠적하겠다는 소리는 아니었다.
‘심리 상담 이야기를 꺼낸 걸로 봐서는 까딱 잘못하면 다시 병원에 재입원할 수도 있겠어.’
연이어 크게 다쳤기 때문일까. 아무래도 정이흔은 제 정신이 멀쩡하지 않을 거라 판단하는 듯했다.
당분간은 회복에 집중하며 사태를 관망할 필요가 있었다.
[ 현재 적용 중인 제약(2) : 말조심 / 충분한 수면 ]
이 제약들 때문에라도 그럴 수밖에 없지만.
한차수는 구석에서 깜빡이는 시스템 창의 존재에 눈을 찌푸렸다.
‘저건 도대체 왜 안 꺼지는 거야?’
처음에는 자신이 시스템 창을 끄지 않았나 했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는 건 곧 알 수 있었다. 시스템 창을 끄기가 무섭게 은근슬쩍 시야 가장자리에 나타나는 게 아닌가.
마치 제 존재를 잊지 말라고 경고하듯이 말이다.
‘나 참.’
스킬 주제에 참 가지가지 한다 싶었다. 한차수는 한숨과 함께 침대 머리맡에 몸을 기댔다.
그리고 곧 기태연이 아직 돌아가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
“…….”
설마 내가 돌아가라고 하지 않아서 이러고 있는 걸까. 말없이 뺨에 꽂히는 시선에 한차수는 한숨을 삼켰다.
지난번에는 시비를 걸지 못해서 안달이더니 이번에는 왜 이러는 건지.
<어제 오늘 감사합니다.>
그래도 훗날 본부장의 자리에 오를 인물이다. 한차수는 포스트잇에 꽉 차게 감사의 말을 적어 전했다.
“흠.”
포스트잇을 받아 든 기태연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마음에 차지 않는 표정이었다.
“한차수 씨.”
“?”
“욕실에 들어가서 쓰러지기 전까지 뭘 했는지 확실히 기억해요?”
한차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뭘 하긴 뭘 해. 독약 마시고 쓰러졌지. 하지만 펜을 쥔 손은 전혀 다른 말을 토해 냈다.
<평범하게 머리 감고, 샤워하던 도중이었습니다.>
그러다 현기증이 났고 그 뒤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한차수는 덧붙였다. 반은 의료진의 말을 주워섬긴 거였다.
“흐음.”
기태연은 제법 진지한 얼굴로 자그마한 포스트잇을 들여다보았다. 뭔가 골몰히 생각하는 모양새에 한차수는 의아해졌다.
‘여기서 생각할 거리가 있나?’
누가 봐도 그냥 몸이 안 좋아서 잠깐 쓰러진 것뿐이었다.
‘설마 뭔가 알아차리기라도 한 건가.’
한차수의 머리가 분주하게 돌아가던 시점이었다. 누군가 바삐 들어와 기태연을 불렀다.
“그래서 당장 가 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이쪽을 신경 쓰며 속삭이는 목소리가 불길했다.
‘또 무슨 일이 생겼나 보군. 하여튼 이놈의 세계는 하루라도 잠잠할 날이 없어.’
그래도 지난번처럼 지척에서 건물이 폭발하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인가. 한차수가 소리 없이 혀를 차는데 기태연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한테 더 물어볼 건 없죠, 한차수 헌터?”
한차수는 재깍 고개를 끄덕였다. 가사 상태에 이르지는 못했지만 귀속 아이템은 해제되었고, 그걸 상대가 모른다는 시점에서 이미 이야기는 끝났다.
자신에게는 더없이 유리하게 정리된 상황. 여기서 굳이 사태를 복잡하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러니 기태연은 이만 보내는 게 옳았다. 괜히 붙잡고 있다가 그가 아이템에 호기심이라도 가지면 곤란하니까.
작별 인사를 겸해 한 번 더 고개를 숙이자 머리 위에서 한숨 소리가 들렸다.
“……?”
“목욕이 하고 싶어도 당분간은 자중해요.”
기태연이 걱정하는 듯한. 아니, 한심한 걸 보는 듯한 눈으로 말했다.
“그리고 갈증이 나도 물 많이 마시지 말고, 혹시 중정 근처로 나가고 싶어지면 꼭 다른 사람을 대동하고요. 알겠습니까?”
이 녀석은 왜 갑자기 정이흔 흉내를 내는 걸까? 가슴 속에 한 자락 의심이 싹텄지만 한차수는 티 내지 않았다.
대신 알았다며 대충 고개를 끄덕일 뿐이었다.
‘이 짓도 계속하니 힘들군.’
말조심인지 뭔지 하는 제약이 빨리 풀렸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이제는 유리 조각으로 팔 그을 생각도 안 할 거고, 독약도 안 마실 건데 좀 봐주면 안 되냐.’
스킬이 제 생각에 어느 정도 반응하는 것 같아 대놓고 물어봤다.
그러자 삐롱 하는 경쾌한 소리가 들리더니.
[ 현재 적용 중인 제약(2) : 말조심 / 충분한 수면!! ]
시야 구석에서 유영하던 시스템 창이 떡하니 눈앞에 나타났다.
“…….”
닥치고 회복이나 하라는 소리군. 한차수는 병실에 혼자 남아 쓸쓸하게 이불을 덮었다.
초침 째깍거리는 소리가 평온하게 머리맡을 울렸다.
***
병실은 나온 기태연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대격변 초기에 지어진 의료 센터는 본부 건물과 달리 구조가 복잡했다. 증축과 확장을 거듭하며 이곳저곳 추가된 곳이 많기 때문이리라.
너무 하얗기만 해서 눈이 아픈 복도를 걸으며 기태연이 부하를 향해 물었다.
“한차수 헌터 원래 1층에 있었지?”
“네. 상태가 워낙 급해서 1층에 급히 병실 꾸리고 거기서 치료했죠.”
이거 아깝게 됐네.
한차수를 감시하기엔 확실히 이전 병실이 좋았다. 단방향 유리가 있는 병실이라니. 지금 제게 딱 필요한 것이 아닌가.
‘아무래도 부작용이 터진 것 같단 말이지.’
생선 대가리를 마주하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복병이 있었다. 하필이면 희박한 확률을 뚫고 정신적 부작용이 나타난 것 같다, 이 말이다.
그것도 부작용 중에서 제일 까다로운 ‘물귀신’이라니.
‘일단 센터 애들한테 예의 주시하라고 말해 놓긴 했는데….’
이번처럼 사람이 곁에 없는 틈을 타 욕조에서 익사하기라도 하면 큰일이다. 아무래도 가까이서 지켜봐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적어도 부작용이 사라지기 전까지는.
“안 그래도 스케줄 빼기 힘든데, 젠장.”
“예?”
혼잣말에 뒤따르던 부하가 몸을 붙이며 물었다.
“방금 뭐라고 하셨습니까?”
“혼잣말한 거 뻔히 알면서 물어보지 마라.”
부하 직원의 머리를 밀어내며 기태연은 화제를 돌렸다. 그를 병실에서 나오게끔 한 주제였다.
“그래서 개발실 녀석들이 뭐라고 했다고?”
“아, 지금 트레이닝 시스템은 대인용 버전이 아니라 몬스터를 상대로 한 수련용 버전이라고 시간을 좀 더 달라고 하던데요.”
“이것들 수 쓰고 있네.”
계단을 내려가다 말고 기태연은 피식 웃었다. 하는 짓이 참 깜찍해서였다.
몬스터가 꼭 등장해야 한다면 F급 헌터도 해치울 수 있는 약한 녀석으로 배치하면 되는 일. 개발실도 아마 그걸 모르지는 않을 테다.
‘모르면 당장 사표 써야지.’
각성자 관리국에서 제일 잘난 두뇌를 가지고 있는 녀석들 아닌가. 아마 시간을 더 달라는 건 따로 원하는 게 있다는 뜻이리라.
이를테면 예전부터 가지고 싶어서 안달이 나 있다던 마령석이라든지.
“지난번에 천령이랑 제주도에서 공략한 게이트에서 마령석인지 정령석인지 뭔가 몇 개 나온 걸로 아는데. 그거 아직도 소유권 분쟁 중인가?”
뒤따르던 부하의 눈이 크게 뜨였다가 제 크기를 찾았다. 기태연의 말이 뜻하는 바를 알아차린 것이다.
“수정 말씀하시는 거면 얼마 전 감정이 끝났다고 합니다. 작은 거 두 개에 큰 거 하나였는데, 흠. 그런데 셋 다 C급이라서 딱히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네요.”
“마수 알 산다고 기계 갖다 팔려다가 걸린 녀석들한테는 그걸로도 감지덕지지. 일단 작은 거 하나 우리 쪽에 달라고 하고 개발실에도 은근슬쩍 흘려 봐. 좋아서 환장할 거다.”
“사용 요청서도 미리 작성해 놓을까요?”
센터 건물을 나서며 기태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신과 동생을 덮친 범인이라는 이유로 팔을 뜯으려던 백담이다. 지금쯤이면 몸이 달아 있겠지.
“허가 떨어지자마자 백담 쪽에도 연락 넣어.”
잠시라도 지체했다는 인상을 줬다간 구치소를 박차고 들어가 팔을 뜯어 놓을 인물이었다.
“그럼 일단 4인 파티로 사용 요청하겠습니다.”
“그래. 백담 한 명이면 셋은 충분히….”
잠깐, 그러고 보니 백담이 그때 동생‘들’과 함께 고문에 참가하고 싶다고 했지 않았나.
“실장님?”
“요청서는 내가 작성할 테니 내버려 둬. 그리고 나 이번 주 내내 내근만 한다. 내 앞으로 오는 공략은 다 안보실로 돌려 버려.”
“네? 잠깐만요, 실장님! 어디 아프세요? 설마 그만두시는 건 아니죠? 그러면 저희 다 죽어요!”
사색이 된 직원이 본부 건물 안으로 사라지는 기태연의 뒤를 다급히 쫓았다.
***
각성자 관리국 의료 센터의 음식은 훌륭했다. 세금이 녹아 들어간 맛이라 그런가, 본식부터 후식까지 흠잡을 곳 없었다.
“깨끗하게 비우셨네요!”
하지만 박수 세례는 좀 겸연쩍었다. 이 나이 먹고 밥 잘 먹었다고 칭찬이나 받다니. 볼을 긁적이는 한차수는 간단한 검진을 끝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너무 누워만 있으면 오히려 좋지 않다는 소견 때문이었다.
“힘들지 않으면 중정까지 잠깐 내려갔다 올까요?”
창밖을 유심히 바라보자 의료진이 은근슬쩍 물어 왔다. 한차수는 호수 같은 연못에서 시선을 떼어 내며 고개를 저었다.
“하긴 오늘 햇볕이 좀 세긴 하죠. 언제든 마음 내키실 때 다시 말씀하세요.”
햇빛을 걱정한 게 아니라 어느샌가 문 앞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시스템 창 때문이었지만… 그걸 설명할 만한 목소리가 한차수에겐 없었다.
설명해 봤자 미친놈 취급이나 받을 것 같았고.
한차수는 의료진의 오해를 푸는 대신 포스트잇을 꺼내 들었다. 그가 펜을 들자 상대가 눈을 반짝이며 차렷 자세를 취했다. 참으로 부담스러웠으나 한차수는 애써 모른 척하며 포스트잇을 건넸다.
포스트잇 내용을 읽은 남자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정말로 이대로 전해 드리면 될까요?”
잠시 고민하던 한차수는 무언가 덧붙였다. 직원이 활짝 웃었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대로 엑실리스 측에 연락 넣어 드릴게요.”
그리고 그날 저녁, 언제나처럼 느지막이 일어난 금명결은 당황을 금치 못했다.
“이거 뭐야, 한차수 죽었어?”
금빛 눈동자에 혼란스러움이 가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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