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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38화 (38/113)

38화

한차수는 꿈에서 미친 듯이 달리고 있었다. 어째서 달리고 있는 걸까. 자각했을 땐 이미 쫓기고 있는 와중이었다.

‘무엇으로부터?’

지극히 당연한 물음이 뇌리를 가득 채웠다. 그 와중에 손에 무게감이 느껴져 내려다보니 권총이 쥐어져 있었다.

“아.”

익숙한 총이었다. 검은 몸체에 은색 독수리 마크가 새겨진 보급형 권총이었다.

그리고 기억이 재편된다.

그를 뒤쫓는 검은 형상은 어느새 코앞에 있었다. 그는 쫓기는 게 아니라 지키는 중이었다.

무엇을?

“사, 살려 주세요.”

뒤편에서 작은 울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는 깨달았다. 그가 지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쿵, 쿵!

일직선으로 달려오는 적을 향해 총구를 겨눴다.

철컥.

방아쇠에 손을 얹자 기다렸다는 듯 강선을 타고 끓어오르는 푸른빛.

우우웅-!

총신이 진동하자 작게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여린 성대를 타고 흘러나오는 울먹임이 그를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캬아아아악!

붉은 눈동자가 빠르게 거리를 좁혀 온다. 하나, 둘, 셋. 마지막 숫자와 함께 그는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그리고.

“커헉!”

심장이 뽑혔다. 아니, 사지가 뽑혀 나갔다. 이게 뭐지? 아파, 너무 아프다.

그는 어느새 동굴 속에 누워 있었다. 잘린 사지와 목을 찌르며 튀어나오는 비명. 이건 한차수였다. 한차수의 기억, 과거, 아니. 소설인가?

방향을 잃은 탄환처럼 생각이 이리저리 튀어 나갔다.

“끄으으윽, 아아아악!”

고통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 나간다. 축축한 동굴 속에서 한차수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의지로 할 수 있는 행위라곤 그것뿐이었으니까.

뚜벅, 뚜벅. 멀리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졌다. 동굴 벽을 때리고 한차수의 공포심을 불러일으키는 그 발소리.

‘녀석들이다.’

빌어먹을 새끼들, 씹어 먹을 악귀들! 한차수는 분노하면서 절망했다. 그래 봤자 잘 먹고 잘살 거면서. 동생 하나 없어졌다고 무너질 인생도 아니면서!

“오늘이 마지막이다.”

“…너무 이른 거 아닌가요? 조금 더.”

“언제까지?”

“…….”

“분풀이라는 이름으로 저 버러지를 언제까지 살려 둬야 하는 거지?”

아무 감정도 느껴지지 않는 낮은 목소리. 동굴 벽을 메아리침에도 떨림 하나 스며들지 않는 차가운 음성.

“한차수.”

붉은 눈동자가 그를 응시했다. 적의 시선이었다. 아니, 아니야.

정이흔은 이렇지 않다. 그가 아는 정이흔은 이런 사내가 아니다.

“이제 이 지긋지긋한 시간도 끝이다.”

삭막한 얼굴이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뒤로 보이는 초췌한 낯의 사내는 분명… 백담.

그 순간, 벼락이 머리를 내리쳤다. 엉킨 실타래가 한 줄로 이어졌다.

백담의 집, 백선의 귀가. 그리고 이어진 습격. 거기서 자신은 백선을 대신해 몬스터의 공격을 막았다. 그래, 그리고 무슨 시스템 창이 미친 듯이 올라왔던 것 같은데.

푸욱

“——!”

묵직한 둔통이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정이흔이 무심한 얼굴로 검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백담은 아무 말 없이, 쓰러지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그 시선에는 형언할 수 없는 경멸이 묻어 나왔다. 그를 벌레보다도 못하게 보는 차가운 시선.

화가 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점점 닫히는 시야 사이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이대로 가면 꿈에서 깰 것이다. 현실의 백담은 그를 경멸하기는커녕 도와줄 것이고, 정이흔 또한 마찬가지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지금 내가 아픈 게 없어지지는 않잖아?

“이… 배은망덕한 새끼들.”

꿈이라는 특성 덕분일까. 이성이 반쯤 뭉개진 한차수는 쉽게 분노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개고생을, 커헉… 개고생을 하는데…!”

아니면 더 이상 그를 압박하는 게 없기 때문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게 지금 뭐라는 거지?”

“나도 모르죠. 죽기 직전의 발악인가?”

“시발, 하필이면 이딴 데 빙의해서, 쿨럭, 허억…!”

다른 소설의 악역이었으면 오히려 쉬웠을 거다. 하다못해 평범한 로맨스 소설이기만 했어도 좋았을 테지. 그런데 하필이면 빙의해도 동생한테 미친놈들이 즐비한 소설에 걸려서 내가 시발…!

“한차수 헌터, 괜찮아요? 한차수 헌터!”

“——!”

“움직이시면 안 돼요! 이 대리, 가서 의료동 사람들 전부 불러. 그리고 기 실장님이랑 천령 길드에 한차수 씨 깨어났다고 알려, 아, 필로소에도! 으악, 한차수 헌터, 움직이면 안 된다니까요!”

“——!”

“잠시만요. 좀 진정해 보세요! 그러다 혀 깨물어요!”

분노와 함께 몸부림치던 한차수는 곧 뭔가를 깨달았다.

‘목소리가… 안 나오잖아.’

동시에 얄미운 알림음이 고막을 강타했다.

[ 경고! ]

[ 패시브 스킬 ‘재생’에 필요한 에너지가 부족합니다! ]

[ 에너지 절약을 위해 제약이 가해집니다. ]

[ 적용 중인 제약(1) : 말조심 ]

[ 스킬 유지에 필요한 에너지보다 더 많은 에너지가 소모될 시 다시 가사 상태에 돌입합니다. ]

에너지 절약을 위한 제약? 게다가 다시 가사 상태라니.

‘내가 지금까지 가사 상태였어?’

하지만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 가사 상태에 돌입하면 착용 중인 귀속 아이템이 해제될 수 있으니 주의하세요! ]

메시지 창을 바라보는 그의 회색 눈동자가 힘없이 흔들렸다.

한편, 한차수가 말하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린 의료진은 사색이 되었다.

“목에는 이상이 없는데….”

“설마 정신적 충격 때문인가?”

복도에 난 창으로 한차수를 바라보는 얼굴들이 심란했다. 그는 목소리가 나오지 않는다는 걸 안 순간부터 초점 없는 눈으로 힘없는 웃음만 흘리고 있었다.

‘하늘도 무심하시지, 저렇게 선량한 사람한테 어쩌자고 저런 가혹한 일만….’

백담에 의해 억지로 떠맡다시피 한 환자지만 그래도 제 손으로 살려 낸 목숨이었다.

더군다나 그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어쩌다 다치게 되었는지도 알고 있다.

정이흔의 동생인 정서흔을 살리고 몸이 망가졌다는 헌터. 그가 또 한 번 제 목숨을 바쳐 생명을 구해 냈다. 그냥 일반인도 아니고 나라에 유일한 S급 힐러가 지극히 아끼는 동생을.

각성자 관리국 소속 공무원의 입장에서 이보다 더 큰 은인은 없었다.

“…방법이 있을 거예요.”

“맞아요, 이렇게 손 놓고 있으면 자유인 놈들이 잘됐다고 좋아할 거라고요.”

미등록 각성자를 일컫는 말에 모두의 얼굴이 굳었다.

목숨을 부지한 채 구치소로 끌려간 범인은 총 여섯. 개중에 넷은 불법 입국한 외국인 헌터였고, 남은 두 명은 미등록 각성자였다.

내국인 두 명이 미등록 각성자라는 걸 확인한 각성자 관리국은 빠르게 심문에 착수했다. 그러나 아무 소용 없었다.

“걔네 정신 놨다면서요?”

붙잡힌 범인들은 어느 순간 이지를 상실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으나 이미 정신을 놓은 이들을 어쩔 수는 없었다.

결국 각성자 관리국은 최후의 수를 썼다.

자유 연합 소속 길드들을 미친 듯이 소환하기 시작했다는 말이었다.

마침 오늘은 이카로스의 마스터가 관리국에 다녀간 참이었다.

“천령 길드장이 심문에 동석했다고 했지? 뭐 들은 말 없어?”

“자기네들은 범인이랑 아무 연관도 없다고 배 째라는 식으로 나왔다던데요? 백담한테는 관심도 없다고, 차라리 적풍을 뒤지는 게 시간 낭비 안 하는 방법이라고….”

“하, 참나! 그래, 입막음 한번 제대로 해 놨으니 무서울 게 없겠네.”

눈매가 날카로운 직원은 이미 이카로스를 범인으로 점찍은 태도였다. 키 작은 직원이 목 뒤를 긁적였다.

“그러고 보니 적풍은 내일이었죠?”

“어, 하나씩 소환한다더라. 위에서 완전 이 갈고 있다나 봐.”

솔직히 말해 양아치 같은 행태였으나 나름대로 합리적인 판단 끝에 나온 결론이었다.

“그런데 소속도 없는 각성자면 어떻게 해요? 그냥 시간 낭비하는 거 아니에요?”

“시간 낭비여도 상관없어.”

안경 쓴 직원이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

“계속 이렇게 귀찮게 굴면 해태에서 나설 수밖에 없거든.”

“아.”

키 작은 작원이 깨달았다는 듯 숨을 터트렸다.

자유주의 연합의 ‘집행자’ 해태.

그들은 자유를 명분 삼아 타인을 해치고 사리사욕을 취하는 이들의 목을 베는 추수꾼이었다.

지금은 가만히 앉아 사태를 관망하고 있지만, 만약 해태가 몸을 일으킨다면 그건 자유주의 연합 전체의 문제가 된다.

범인들은 물론 그동안 눈에 안 띄게 몰래 범죄를 저지르던 이들도 한번에 싸잡혀 정리될 테니까.

각성자 관리국은 그것을 알고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다 같이 뒈지기 싫으면 빨리 범인들과 관련된 정보를 뱉어 내라고 말이다.

“아아, 해태가 나서면 되겠네요. 뭐야, 다행이다.”

“다행이긴 뭐가 다행이야, 인마. 각성자 등록도 안 하는 범죄자 녀석들이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설쳐 대는 게 뭐가 좋다고.”

입가에 주름이 진 직원이 불쾌한 얼굴로 중얼거리던 찰나였다.

멀리서부터 뜨거운 바람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손에 들고 있던 커피가 일순간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헉, 이게 뭐…!”

“천령 길드장이다.”

복도 반대편에서 열기를 이끌며 다가오는 건 정이흔이었다. 그의 눈에서 들끓는 불꽃을 본 직원들의 입에서 일제히 헉 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놀라운 건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백담 헌터 동생 보러 간 거 아니었어?”

“그, 그러게?”

백담이 무척이나 자애로운 얼굴로 웃으며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의료 센터 직원들의 팔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저 천사 같은 얼굴 뒤에 있는 야차 같은 성질머리를.

한차수가 각성자 관리국에 실려 오던 날, 너희들을 믿는 게 아니었다며 채찍을 들고 날뛰려 들지 않았던가.

만약 한차수가 저주에 걸렸다는 걸 알아차리지 못했다면 치료실은 그날로 두 쪽으로 갈라졌을 것이다.

점점 다가오는 S급들을 바라보는 직원들의 시선에 공포가 어렸다.

“…한차수 씨 상태 설명하기로 한 게 서 대리였지?”

“어? 저요? 아뇨, 수진 씨라고 알고 있는데요.”

“제가 언제부터요?!”

“지금 너희들끼리 싸울 때냐, 이것들아. 어서 한차수 씨 괜찮은지부터 다시 살펴!”

치료실 앞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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