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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37화 (37/113)

37화

기태연이 한차수의 소식을 들은 건 본부장에게 한바탕 깨지던 도중이었다.

“기 실장, 내가 굳이 직접 불러서 말해 줘야 알겠나? 기 실장의 고집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곤란해하고 있는지.”

“…….”

“각관국 모토가 뭔가. 각성자들의 편의를 도모하고 일반인들과의 불필요한 오해를 줄여 나가자는 것 아닌가. 그런데 기 실장은 지금 정반대의 행보를 보이고 있어!”

각성자 관리국 제1본부 본부장, 민종식이 책상을 탕탕 내리쳤다. 기태연을 응시하는 그의 눈이 살벌했다.

“동료가 자기 잘못을 덮어 줬으면 그걸로 고맙다 고개부터 숙여야지, 다짜고짜 폭행을 저질러? 지금 제정신인가, 자네?”

애초에 안보실에서 한차수를 제멋대로 집에 보내지만 않았어도 생기지 않았을 일이다. 더군다나 더 많이 다친 건 안보실이 아니라 위기관리실.

겁만 주려고 상대를 살짝 얼린 것과 실제로 총을 쏴댄 건 엄연히 다른 일이었다.

하지만 안보실 편인 본부장은 그런 건 신경도 쓰지 않았다.

“제정신이 아닌 거 알지 않으십니까.”

그리고 기태연도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안보실 뒤에는 본부장이 있지만 그의 뒤에는 국장이 있으니까.

본부장 민종식도 그걸 알기에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기태연 실장, 지금 나랑 맞먹으려 드는 건가?”

“제가 그리도 아니꼬우시면 자르시면 됩니다, 본부장님.”

기태연이 생각만 해도 즐거운 듯 웃으며 말했다.

“사실 공무원이 철밥통이라는 것도 옛말 아닙니까. 저도 슬슬 다른 일을 찾아보고 싶은데 국장님이 허락을 안 해주셔서 말입니다. 아, 국장님이 아니라 국회와 국민들이 허락을 안 해주시는 거였나요.”

“…….”

기태연을 노려보는 민종식의 눈빛이 살벌했다.

위기관리실 실장, 기태연. 그의 이름은 시민들 사이에도 제법 알려져 있었다.

민종식이 여당 의원들과 호텔에서 호화로운 취임식을 벌이던 그날. 기태연이 근처 버스터미널에서 발생한 테러를 진압했으니까.

그런 기태연을 자른다면 절대 조용히 끝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 제가 없으면 본부장님은 누가 또 구해 드린답니까…. 아, 안보실이 있었군요. 다행이네요. 이번엔 카메라에 안 잡히게 잘 대피시켜 달라고 부탁드리면 되겠습니다.”

“기태연…!”

민종식이 이를 빠득 갈았다. 허겁지겁 도망치던 제 모습이 현장 중계 카메라에 잡힌 게 떠올라서였다.

그날 민종식은 단번에 화제의 중심이 되었다. 시민의 안전은 나 몰라라 하는 신임 본부장! 그게 민종식의 새로운 수식어가 되었다.

앞으로 잘 부탁한다며 자신의 어깨를 털어 주던 여당 의원들의 연락이 싹 끊긴 건 당연한 일이었다.

민종식의 얼굴이 점점 벌게졌다. 기태연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참. 이걸 빼먹으면 안 되죠. 퇴사 전에 곽 실장한테 미리 말해 두겠습니다.”

치익, 불붙는 소리와 함께 그가 슬쩍 미소 지었다.

“우리 민종식 본부장님께서는 A급 헌터임에도 이상하게 혼자 힘으로 호텔을 빠져나오는 걸 무서워하는 것 같으니 그 점 특히 주의해 달라고요.”

민종식의 눈에서 불꽃이 튀어 올랐다. 씩씩대는 콧김이 여기까지 닿을 것 같았다. 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순간이었다.

닫혀 있던 문이 벌컥 열렸다.

“보, 본부장님!”

“지금 바쁜 거 안 보여?!”

“죄, 죄송합니다. 하지만 급한 사안이라…!”

허겁지겁 달려온 직원이 토해 놓은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뭐? S급 힐러가 자택에서 습격을 받아… 환자를 데리고 지금 이쪽으로 오고 있다고?!”

심지어 그 환자라는 게 얼마 전에 각관국에서 데리고 있던 한차수란다.

보고를 받은 본부장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예, 개발실에서 의료 센터와 함께 개발한 치료 기기를 쓰고 싶다고, 응급 상황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할까요?”

“당연히 쓰라고 해야지 그걸 가지고 여기까지 처올라오고 앉았어! 당장 가서 기계 준비하라고 해!”

본부장은 거의 정신이 나간 것 같은 얼굴이었다. 그도 그럴게. 만약 자신이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면….

“이것 참, 각관국에서 안전하게 보호하고 있었다면 안 다쳤을 수도 있겠네요.”

기태연이 정확히 본부장의 속을 찔렀다. 그를 노려보던 본부장이 와락 소리 질렀다.

“당장 꺼져!”

“옙.”

***

쫓겨난 기태연은 어슬렁어슬렁 복도를 걸었다. 한차수의 소식을 들었음에도 그는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여유롭기까지 했다.

한차수가 그의 피를 마신 건 이틀 전, 그리고 다친 건 오늘.

‘피의 효능이 아직 남아 있을 테니 죽지는 않을 거야.’

자신의 피가 가진 회복 능력은 못해도 사흘은 간다. 그러니 아무리 심하게 다쳤다 한들 죽음에 이르지는 않을 터.

기태연의 여유로움에는 이유가 있었다.

‘백담이 바로 들고 온 걸 보면 외적인 부작용은 안 나타났나 보지?’

다행이었다. 각관국에서 3미터 넘는 생선인간을 보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지’

개중에는 정신에 미치는 부작용도 있었다. 물에 집착하여 자꾸만 물에 뛰어들거나 물을 과하게 마시는 등의 부작용 말이다.

“지금쯤이면 되려나.”

기태연이 시간을 확인했다. 본부장이 보고를 받고 30분가량이 흘렀다. 그때가 백담이 본부에 도착하기 직전이었으니 이젠 괜찮아졌을 것이다.

그러나 기태연의 느긋한 생각은 치료실 앞에 이르러 박살 나고 말았다.

집중치료실 앞은 그야말로 전쟁터였다.

“출혈은 어느 정도 잡았는데 의식이 전혀 돌아오질 않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코마 상태에 빠질 것 같은데…. 도대체 뭐에 당한 거지?”

“백담 헌터, 잠시만요! 들어가시면 안 됩니다, 지금 힐링을 쓰셔도 안 돼요! 파장이 섞여 들어가면 큰일 납니다!”

“정이흔 헌터 좀 도와주, 잠깐, 우 팀장님. 정이흔 헌터가 안 보여요!”

“비키세요, 여기 지금 응급 환자 있다고요! 당신들 때문에 사람 죽으면 책임질 거야?!”

치료실을 다급히 오고 가는 전문 인력들. 그들의 손에 들린 빈 약통과 주사기, 뭔지 모를 상자들과 물밀 듯 밀려오는 거대한 기계들.

그리고 무슨 일인가 하여 몰려드는 불청객들과 그들에겐 시선도 주지 않고 유리창 안쪽을 노려보는 백담까지.

완전히 아비규환이었다. 그때, 무리에서 누군가 튀어나와 다급히 기태연을 붙잡았다.

“실장님, 지하에서 지금 지원 요청 들어왔습니다!”

무전을 받은 기태연은 기함했다.

정이흔이 구속실에 나타나 범인들을 불태워 죽이려고 하니 지원을 바란다는 무전이었다.

***

다행히도 한차수는 새벽을 넘기지 않고 안정 상태에 접어들었다. 이유 모를 지속적 출혈의 원인은 저주로 판명되었다.

“녀석들 중 한 명이 백담 헌터를 노리고 준비한 덫이었던 모양입니다. 치료 스킬이 듣지 않는 종류의 저주더군요.”

백담이 한차수와 함께 각관국에 머무르는 사이, 몇몇 대원은 현장을 분석했다. 기태연은 팔짱을 낀 채 부하의 보고를 들었다.

“아마 백담 헌터의 능력이 그들의 저주를 상회해 한차수 씨가 관리국에 도착할 때까지 살아 있을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담담히 말하는 이의 낯이 차분했다. 기태연은 고개를 끄덕이고 부하를 내보냈다.

그리고 빙그르르 의자를 돌려 우두커니 서 있는 사내를 바라보았다.

“제발 자리에 앉아 달라고 부탁해야 앉을 건가?”

“…….”

“그렇게 창밖을 노려봐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겁니다, 천령길드장.”

현장에서면 몰라도 각성자 관리국 안에서 범인을 죽이게 내버려 둘 수는 없지. 기태연은 창가에서 떨어질 줄 모르는 정이흔을 데려다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구치소로 이송되는 범인들을 불태울 듯 노려보던 그의 시선이 기태연에게 향했다.

“S급 힐러를 해치려다 현장에서 잡힌 범인들입니다. 게다가 등록된 헌터도 아닌 미등록 각성자죠. 어차피 살아서 교도소를 나가지는 못할 텐데요.”

살아생전 바깥 풍경 볼 일 없으니 자신이 죽이게 해 달라는 소리였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요구에 기태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러면 제가 그 뒷감당을 모조리 해야 하잖습니까. 안 됩니다.”

‘도대체 한차수가 얼마나 중요하길래 이러는지 모르겠군.’

한차수가 정이흔의 동생을 살려 줬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기엔 너무 과한 반응이 아닌가?

‘단순히 은인을 향한 태도라기엔 뭔가 있어.’

게다가 한차수에게 집착하는 건 정이흔뿐만이 아니었다. 방금 전, 본부장이 자신을 찾아와 한바탕 뒤집어 놓고 갔다.

“전력을 다해서 살려 놔, 알겠어? 기태연 실장이 들여놓은 거니까 책임지라고!”

자기가 신나서 내보내 놓고 이제 와서 뭘 책임지라는 건지 알 수 없지만 이것만은 확실했다. 윗선의 누군가가 한차수를 몹시 신경 쓰고 있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차수를 피떡으로 만들어 놓은 범인을 고이 정이흔의 손에 넘긴다라.

‘이름 모를 그놈이 분명 개입하겠지. 본부장도 가세해서 지랄할 테고.’

기태연은 고민했다. 정이흔이 구치소를 습격할 확률과 그에게 범인을 넘길 경우 자신이 귀찮아질 확률.

치열한 계산 끝에 그는 결정을 내렸다.

“일반인과 달리 각성자의 취조는 힘들죠. 게다가 S급 힐러를 노리고 조직적으로 테러를 저지른 미등록 헌터들이니 아마 심하게 반항할 겁니다.”

기태연이 그 점을 짚자, 정이흔의 눈에 이채가 스몄다.

“취조 과정에 도움이 필요하실 수도 있겠군요. 이를테면, 범인들이 난동을 벌이려 할 때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이라든지 말입니다.”

“그러면 정말 좋겠군요. 그렇지 않아도 관리국은 인력난이라서요. 적어도 A급 이상의 헌터가 동석해 준다면 이쪽은 무척이나 고마울 겁니다.”

취조에 동참시켜줄 테니 구치소 털 생각은 하지 마라.

죽이지 않는 대신 거칠게 제압하는 건 되지?

그럼, 네 마음대로 하렴.

그럴듯한 미사여구 뒤로 이해관계가 합치되었다.

서로 원하는 걸 취하게 된 두 남자는 시선을 마주치며 웃었다.

같은 시각, 한차수는 꿈에서 쫓기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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