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36화 (36/113)

36화

“빌어먹을, 선아, 백선!”

부서진 콘크리트를 걷어차며 백담이 소리쳤다. 눈에서는 샛노란 빛이 철철 흘러넘쳤다. 손에 들린 채찍은 태양을 잘라다 박은 것처럼 뜨겁게 빛났다.

‘습격이 시작되고 얼마나 지난 거지?’

방금 전까지 그는 결계에 갇혀 있었다. 정확히 그를 노리고 발동된 결계였다.

하지만 백담이 누군가. 그는 열여덟 어린 나이에 각성해 산전수전을 전부 겪은 인물이었다. 요새에는 포획용 결계에 대항할 수 있는 반(反)결계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백담은 결계를 개박살 내고 자유를 되찾은 것이다.

비록 그가 결계를 벗어났을 때, 요새는 이미 한창 습격을 받고 있는 중이었지만.

“젠장.”

이렇게 된 이상 선이가 적절한 타이밍에 세이프 룸에 들어갔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백담이 주변을 살피며 세이프 룸의 위치를 떠올리는데, 어디선가 울음소리가 들렸다.

백선의 울음소리였다.

“혀, 형….”

“선아!”

“어, 어떻게 해. 차수, 차수 형이 숨을 안 쉬어…!”

백선은 시체처럼 축 늘어진 한차수를 끌어안고 힘겹게 걸음을 떼고 있었다. 주르륵. 손에 힘이 부족한 탓인지 한차수의 몸이 아래로 미끄러졌다.

“아!”

공황 상태에 빠진 동생 대신 백담이 그를 받았다. 딱딱하게 굳은 차가운 몸. 그를 바라보는 백담의 눈이 시렸다.

그는 곧바로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한차수가 또 제 동생을 위해 희생한 것이다. 친형인 자신이 붙들려 있는 동안, 피 하나 섞이지 않은 타인이, 또.

턱 하고 목을 틀어막는 뜨거운 무언가를 겨우 삼키고 백담이 말했다.

“선아, 진정하고 아이템 사용해. 한차수는 나한테 맡기고.”

“그치만, 그치만 숨을 안 쉬는걸. 죽었어, 죽었다고. 저번하고는 다르다고! 죽었단 말이야!”

“정신 차려, 백선!”

그때였다. 섬뜩한 기동음이 공기를 뒤흔들었다.

키이잉―!

수십 개의 붉은 광선이 그들을 감쌌다. 사방에서 쏘아져 오는 살기에 백선이 숨을 삼키며 한차수를 끌어안았다.

“씨발, 진짜.”

백담은 슬슬 머리가 뜨거워지는 걸 느꼈다.

“버러지 새끼들이 진짜 처돌았구나.”

요새를 무너트리고 결계를 씌우는 걸로도 모자라, 내 동생과 동생의 손님까지 죽이려 든다 이거지.

“작정하고 왔으니 나도 머리 풀고 제대로 대접해 줘야겠네.”

“혀, 형. 잠깐만…!”

백선은 뒤늦게 백담이 뭘 하려는지 알아차린 모양이었다.

“선아, 조용히 하고 머리 숙이고 있어.”

“형!”

“소리 내지 마.”

우우우!

바람 한 점 없는 곳에 광풍이 불었다. 은백색 머리 위로 광휘가 터져 나오고.

[ 징벌의 방 ]

백담을 중심으로 사각형의 반투명한 공간이 만들어졌다.

하나, 둘, 셋….

“서른다섯 마리, 하. 잘도 긁어모았군.”

무너져 내린 콘크리트 더미 아래. 두꺼운 기둥 뒤. 반쯤 일어난 바닥재 아래. 심지어 세이프 룸 안에도 숨어든 녀석들이 그를 향해 레이저를 겨누고 있었다.

백담의 눈이 허공으로 향했다.

쿠구궁!

공간이 찢어지며 새하얀 무언가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그것은 마치 거대한 깃털처럼 보였다. 천사가 흘리고 간 것처럼 순백색으로 빛나는 수백 개의 깃털.

키이이잉!

붉은 광선이 여러 갈래로 갈라졌다. 반은 깃털을 향해, 반은 백담을 향해 공격을 개시했다.

백담은 몬스터들이 자신을 향해 뛰어오는 걸 그대로 응시했다.

그는 가만히 서서 그저 가볍게 손을 휘저을 뿐이었다.

사락.

부드러운 깃털 끝이 은백색 몸체에 닿았다.

끼기기긱, 끄그그극——!

깃털은 부드럽게 몬스터의 외피를 파고들었다. 압정으로 곤충을 짓눌러 고정시키듯 막힘없이 순조롭게.

까드드득! 콰아앙!

인간을 닮은 유선형 몸체 수십 기가 연쇄 폭발을 일으켰다. 몬스터들은 사지가 뒤틀리다 못해 몸통이 날아가 버렸다.

그러나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반투명한 공간 너머, 때를 기다리던 이들의 기척이 느껴졌다. 몬스터가 아닌 헌터들. 그래, 각성자들이었다.

“형….”

자신을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백담이 말했다.

상대는 아직 포기하지 않았다고.

“백선, 약속 지켜.”

백선이 벌게진 눈으로 백담을 노려보았다. 한차수를 끌어안은 팔에 힘줄이 돋아났다. 그러나 이내 상황을 납득한 모양이었다.

“살려 줘. 형은 그럴 수 있으니까.”

백담은 고개를 끄덕였다. 백선이 이를 악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손에는 작은 구슬이 들려 있었다.

정해진 좌표로 지정된 사람을 이동시키는 일회용 순간 이동 아이템.

혹시나 상대가 백선을 인질로 잡으려고 할 경우를 대비해 준비한 아이템이었다.

“빨리 가.”

“잠깐만, 형!”

“백선, 내 말 안 들어?”

“작동이 안 돼. 저 새끼들이 무슨 짓을 한 거 같…!”

“뭐?”

쿠우웅!

굉음과 함께 시야가 흔들리고, 폐허 위로 불길한 빛이 떠올랐다. 두 번째 포획용 결계였다.

“씨발, 차라리 올가미를 들고 오지 그래.”

하, 헛웃음과 함께 백담이 진저리를 쳤다. 아주 제대로 준비했군. 그가 이를 아득바득 갈며 두 손을 떨친 순간이었다.

쌔애액―!

콰아아앙!

“아아아악!”

“으아악!”

비명과 함께 불꽃이 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미친.”

태양보다 더 뜨거운 검붉은 불꽃. 칼을 휘두를 때마다 이글거리며 갈라지는 대기.

정이흔이었다.

***

백담을 습격한 흉수들은 정이흔을 위시한 천령 길드에 의해 제압되었다. 제압 과정에 부득이하게 목숨을 잃은 이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소식을 접한 이들 중 누구 하나 불만을 토하지 않았다.

특히나 헌터들의 분위기는 오히려 반대에 가까웠다.

“백담을 노린 거라면 죽어도 싸지.”

“감히 S급 힐러를 노려? 고문이 뭐야, 머릿속을 아주 곤죽으로 만들어야 해.”

필로소와 사이가 좋은 피에트, 사계절 길드를 포함해 대부분의 길드는 당해도 싸다는 태도였다. 그만큼 S급 힐러의 존재가 귀하기도 했고.

“분명히 또 자유 벌레 새끼들이겠지. 그 새끼들이 돈에 나라 팔아먹는 게 한두 번이야?”

“언제 한번 날 잡고 싹 다 잡아넣어야 되는데.”

범인인 비등록 각성자에 대한 민심이 좋지 않은 탓이기도 했다.

비등록 각성자란 각성자 관리국을 통해 정식으로 각성자 등록을 하지 않은 헌터.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 부르는 이들은 등록을 하지 않는 걸 자신의 권리라 여겼다. 한때는 이들을 반정부 테러 단체로 규정해야 한다며 시끄러웠던 때도 있었다.

국회 의원을 비롯한 재계 인사 다수가 희귀 능력을 가진 각성자를 협박, 납치해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이러고도 너희들이 각성자들을 보호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나?”

자유주의자들은 가장 먼저 피해자들을 구출, 범인들을 검거했으며 그걸로도 모자라 정부 데이터베이스를 완전히 날려 버렸다.

그렇게 전 국민의 인적 사항이 휴지 조각이 되고, 결국 정부와 각성자 관리국은 한발 물러설 수밖에 없게 되었다.

각성자 납치사건에 부통령까지 엮인 마당이라 그러지 않는 게 더 힘들었지만.

그렇게 비등록 각성자들은 자유를 얻었다. 대신 범죄에 연루되었다는 게 확실해질 경우 가중 처벌을 받는다는 대가를 받아들여야 했다.

그 이후 나라는 희귀 능력자들을 극진히 대우하는 쪽으로 노선을 바꿨다.

바로 지금, 새로 개발한 치료 기기를 내놓으라는 백담의 요청을 각성자 관리국이 재깍 받아들인 것처럼.

“백담 헌터!”

본부장에게 불려간 기태연 대신 우저근이 백담을 맞이했다.

그는 피투성이가 된 한차수를 보고 잠시 멈칫했지만 빠르게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바로 백담에게 본론부터 꺼냈다.

“오시는 동안 바로 사용하실 수 있도록 세팅을 마쳤습니다.”

“안전성 테스트는?”

“통과했습니다. 이미 세 차례 임상 시험도 끝냈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 말 지켜야 할 거예요.”

연갈색 눈이 천천히 우저근을 흘겼다. 한순간이지만 우저근은 뱀 앞에 선 개구리의 심정을 느꼈다.

그만큼 서슬 퍼런 기세였다.

“제때 출동도 못 하는 주제에 이거라도 잘해야 내가 세금 내는 의미가 있지, 응?”

“백담 헌터, 진정…, 윽!”

조금 전까지 전투를 치르다 와서 그런 걸까. 백담의 분노는 감히 우저근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목이 졸리는 감각에 그가 헛숨을 삼켰다.

“잘잘못을 따지는 건 나중에 하죠.”

낮은 목소리가 긴장된 공기를 깨트렸다. 우저근은 그제야 말없이 백담의 뒤를 따르던 이가 누군지 알아차렸다.

‘정이흔?’

새카만 후드를 뒤집어쓴 채라 미처 알지 못했다. 왜 저런 옷을 입고 있나 궁금증이 인 것도 잠시.

“맥박이 갈수록 약해지고 있습니다.”

가라앉은 목소리로 정이흔이 말했다.

비록 피투성이긴 했지만 한차수는 겉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범인들을 제압하자마자 백담이 그에게 힐링을 쏟아부었으니까.

그러나 원체 약했던 몸은 그렇게 쉽게 회복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심장이 문제였다.

몬스터의 일격은 정확히 심장 가장자리를 찔렀다. 그렇지 않아도 망령의 독에 한 번 잠식되다시피 한 심장. 백담이 겨우 되살려 냈으나 이전보다 더욱 약해졌음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차수의 호흡은 너무나 약했다. 금방이라도 꺼질 것처럼.

그를 내려다보는 백담의 잇새로 살벌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죽게 둘 줄 알고.”

괜히 스킬을 유지하며 이곳까지 온 게 아니었다. 백담이 그를 재차 고쳐 안은 찰나였다.

움찔.

한차수의 몸이 움직였다.

“한차수 씨?”

정신을 차리나 싶었던 한차수의 입에서 주룩, 검은 핏물이 흘러내렸다.

“…….”

“…….”

“기계 어디 있어, 씨발!”

“이, 이쪽으로 오십시오!”

우저근이 드물게 당황하며 일행을 이끌었다. 복도를 내달리는 무리에 지나가던 이들이 당황하는 게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금은 사람을 살리는 게 우선이었다.

“우 팀장님? 환자는… 헉, 빨리 이쪽으로 오세요!”

“환자 이쪽에 눕히세요! 네, 그렇게 천천히 집어넣으시면 됩니다…. 성진 씨, 가서 호스 가져와!”

“예!”

언제나 느긋했던 집중 치료실이 순식간에 소란스러워졌다.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