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35화 (35/113)

35화

“아, 목욕을 오래 해서 튼 거구나? 나는 또 뭐라고.”

진실이 밝혀진 건 온갖 비난과 폭언, 살벌한 협박과 추궁이 오간 뒤였다.

“근데 거긴 왜 그렇게 문질렀어? 거의 살갗이 벗겨졌잖아, 형.”

“그냥 오늘따라 꼼꼼히 씻고 싶었어.”

사실 목덜미 말고도 구석구석 힘줘서 씻은 터라 살갗이 벗겨진 데가 더 있었다.

하지만 솔직하게 대답할 수는 없었다. 곁에 앉은 백담의 기운이 살벌하다 못해 매서웠으니까.

아무래도 자신을 구박했다고 오해받은 게 퍽 억울한 모양이었다.

“아하. 뭐 나도 그런 날이 있긴 하지. 아, 이거 맛있다. 형, 이것 좀 먹어 봐.”

백선이 방긋 웃으며 고기를 집어 줬다. 뺨을 뚫을 것 같은 시선이 와 닿는 게 느껴졌다.

브라콤 형제 사이에서 식사하는 건 무척 힘든 일이구나. 한차수는 백담의 살기 어린 시선을 겨우 피하며 말했다.

“내가 알아서 먹을게.”

“선이가 주는 걸 거절할 생각이에요?”

“…챙겨 줘서 고맙다.”

백선이 기쁘게 웃으며 고기를 얹어 주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아예 그의 앞으로 접시를 밀어 주기 시작했다.

한차수의 앞에는 점점 접시가 산처럼 쌓이기 시작했다. 곁에서 피어오르는 검은 오오라에 식은땀이 흘렀다.

‘맛있는 거 좋지, 좋긴 한데. 이거 다 네 형이 너 먹으라고 한 거란 말이다.’

“한차수 씨는 좋겠네요. 우리 선이한테 고기도 다 받아먹고.”

한차수는 아무 말 않고 묵묵히 밥을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순식간에 한 그릇을 전부 비워 냈다.

“나 다 먹었어.”

탈출이다. 한차수가 희열 섞인 목소리로 외치자 백선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당황한 모양새였다.

“겨우 그거 먹고 끝이라고?”

백선의 눈이 자신을 훑는 게 느껴졌다. 곧이어 연한 노란색 눈동자에 안쓰러움이 물들었다.

한차수는 기가 막혔다.

이미 그들이 한차수에게 먹인 고기만 해도 2인분을 훌쩍 넘겼으니까.

목구멍 밖으로 튀어나오려는 말을 꾹 참고, 한차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다. 허벅지를 꾹 누르는 손길만 아니었다면.

“한차수 씨.”

나직한 부름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고개를 틀자 시선이 마주쳤다. 한차수는 반사적으로 숨을 삼켰다.

지금껏 본 얼굴 중에 가장 다정한 얼굴이었다. 눈빛은 상냥하고 입가에 걸친 미소는 자애롭기까지.

하지만 저게 연기라는 걸 아는 입장에선 소름 밖에 안 느껴졌다.

“어딜 가요. 아직 한참 남았는데.”

“…예?”

“디저트도 먹어야죠.”

다감한 목소리와 함께 끼익, 의자 끌리는 소리가 들렸다. 한차수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다행히도 디저트 타임 전 화장실에 들르는 건 용케 허락받았다.

쏴아아―

한차수는 손을 씻다 말고 고민에 빠졌다.

“지금이라도 도망칠까.”

아무래도 기회는 지금뿐이다. 한차수는 심각한 얼굴로 거울을 응시했다. 거울에 비친 회색 눈동자는 제법 진지했다.

“어차피 내가 할 일은 다 끝났잖아.”

백선을 집으로 불러들인다는 목적은 훌륭히 달성했다. 그러니 방해꾼은 이쯤에서 빠져 줘도 괜찮을 것이다.

완벽한 자기 합리화를 끝낸 한차수는 수도를 잠그고 머릿속으로 집의 구조도를 떠올렸다.

다행히도 이놈의 집은 복도가 구석구석 뻗은 탓에 비밀리에 몸을 빼기 좋았다.

‘여기서 오른쪽 복도를 통해 가면 나갈 때까지 눈에 띄지 않을 수 있어.’

좋아. 시도라도 한번 해 볼까. 물기를 털어 낸 한차수는 천천히 화장실을 나왔다.

“형!”

“…….”

그리고 두 눈을 반짝이며 자신을 기다리던 백선을 마주쳤다.

‘아, 젠장.’

자신을 향한 백선의 과한 집착을 잊고 있었다.

“왜 이렇게 오래 있어? 안에서 쓰러진 건 아닌지 걱정했잖아.”

백선이 해맑게 웃으며 팔짱을 꼈다. 형을 닮아 팔 힘이 제법 억셌다.

“형이, 아니, 우리 형이 지금 마들렌 굽고 있어. 형, 마들렌 좋아해?”

“좋아하지….”

가능하면 집에서 혼자 여유롭게 먹고 싶었다. 배 속을 고기로 가득 채우고서 억지로 먹는 것 말고.

“진짜? 다행이다. 형 병원에서 유독 그걸 좋아하는 것 같길래 내가 특별히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어.”

백담에게 특별 지시까지 내렸다는 말에 한차수는 식은땀을 흘렸다.

‘이거, 마들렌에 독이라도 탄 건 아닌지 모르겠네.’

지금이라도 집에 가서 해독약을 가져와야 하는 건 아닐까, 하는 고민이 들었다.

하지만 그런 말을 입 밖으로 내뱉을 수는 없었다. 이곳은 동생에 눈이 돌아 버린 S급 브라콤의 둥지.

농담이라도 잘못 던졌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게다가 백담은 힐러잖아. 상황이 더 안 좋군.’

그 녀석은 식중독에 걸리게 해 놓고 제 손으로 직접 치료까지 해 줄 놈이었다.

원작에서도 한차수의 사지를 뗐다 붙이기를 즐기지 않았는가. 어떤 의미로는 정이흔보다 질이 나쁘다는 의미였다.

‘제발 정상적인 빵이기만을 바라야겠군.’

한차수가 터덜터덜 식당을 향해 끌려가던 순간이었다.

쿠웅―

벽이 흔들리고 바닥이 요동쳤다.

“이게, 뭐…!”

강력한 중압감. 위에서 때려 박는 듯한 힘의 압박이 바로 몸통을 강타했다.

“쿨럭!”

“형, 괜찮아?!”

백선이 바로 그를 부축했다. 한차수는 말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젠장, 토할 것 같아.’

목 끝까지 들어찬 음식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았다. 하지만 백선은 하얗게 질린 그의 얼굴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어떻게 해, 우리 형, 안 그래도 몸도 약한데!’

이글거리는 연노란색 눈동자가 천장을 향했다. 백선은 충격파의 정체를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아마도 백담을 납치하라는 의뢰를 받은 헌터들이리라.

형인 백담이 어린 나이에 S급 힐러로 각성한 뒤, 그들 형제는 자주 습격을 받곤 했다. 보통 힐러들은 공격 스킬이 미비하기에 생기는 일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백담에게는 강력한 공격계 스킬이 있었다. 덕분에 그들을 노리고 온 이들을 수월하게 물리쳤으며, 덤으로 회복 스킬 연습까지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옛말이었다. 백담이 필로소에 자리 잡고 이 요새를 지은 뒤에는 습격이 현저히 줄었으니까.

‘아직도 정신 못 차린 새끼들이 있을 줄이야.’

개나리처럼 화사한 눈동자에 노기가 들어찼다. 차라리 자신이나 형을 다치게 했다면 이렇게 화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 형제는 스스로를 회복할 힘이 있었으니까. 그러나 이건 선을 넘었다.

“감히 형을 다치게 하다니….”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한차수를. 몸을 바쳐 자신을 구해 준 하나뿐인 은인을 다치게 하다니.

그들은 절대로 용서할 수 없는 금기를 범했다. 죽어 마땅한 존재들이었다.

“씹새끼들….”

천천히 몸을 일으키는 백선에게서 살기가 어른거렸다. 바닥을 짚은 채 신음하던 한차수가 놀라 고개를 틀었다. 순간적으로 백담이 나타난 줄 알았기 때문이다.

“선아, 잠깐만.”

“안 되겠어. 해결될 동안 형은 숨어 있어.”

요새 곳곳에는 몸을 숨길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백선은 한차수를 붙들고 그곳을 향해 달렸다.

“무슨, 잠깐, 선아!”

“발 멈추지 마!”

투닥거리는 와중에도 폭발음은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점점 더 가까워졌다.

쿠웅, 쿵, 콰앙―!

위에서부터 아래로. 마치 케이크를 짓눌러 으깨듯 누르며 들어오는 힘.

백담은 도대체 어디서 뭘 하고 있는 건지 따질 겨를도 없었다. 한차수는 그저 백선을 따라 먼지바람 사이를 달렸다.

새파란 빛이 점멸한 건 그 순간이었다.

“——!”

시간이 느려진 것처럼 보였다. 분명 빛 한 점 들지 않아야 할 벽면. 그곳이 두부처럼 으깨지더니 시린 빛 한 줄기가 날카롭게 돋아났다.

키이이잉―

푸른빛은 순식간에 면적을 넓혔다. 우글거리는 빛줄기가 만들어 낸 것은 매끈한 동체. 가시처럼 뾰족한 두 다리가 바닥을 파고들고, 칼날 같은 팔이 이쪽을 가리킨다.

동시에 네 개의 눈동자가 눈을 떴다. 위아래로 찢어진 새빨간 동공.

적이다.

본능이 그렇게 말했다. 심장의 두근거림이 느려지고, 고막은 소음을 밀어냈다.

하지만 그걸 발견한 건 그 혼자가 아니었다.

“안 돼!”

백선이 그의 앞을 가로막고 있었다. 마치 이번엔 제 차례라는 듯이.

그는 번쩍 정신을 차렸다.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덧씌워진 과거가 지워지고 현실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김유회가 아니었다. 자신은 한차수였다. 결말도 모르는 판타지 소설의 엑스트라 악역.

그리고 지금 백선은 자신을 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제 목숨을 지옥 밑바닥으로 처박고 있었다.

자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려 하다니. 만약 진짜로 백선이 이러다 죽기라도 한다면….

사지 절단 합체쇼가 멀리 있지 않았다. 쭈뼛 돋는 소름에 한차수는 그대로 백선의 팔을 붙잡았다.

“가만있어!”

그리고 힘주어 당겼다. 백선의 몸이 돌아가며 휘둥그레진 연노란색 눈동자가 보였다. 시선이 마주치고, 그가 경악하는 게 느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한차수는 힘주어 백선을 껴안았다.

‘괜찮아.’

버틸 수 있어.

한차수는 확신했다.

서리거인 던전 히든 보스의 일격도 견딘 몸이었다. 게다가 지금은 그때보다 상황이 더 좋았다.

빌어먹을 백담이 이 집구석 어딘가에는 있을 테니까.

‘동생 대신 다쳤는데 당연히 치료해 주겠지.’

쐐애애액!

무언가가 날카롭게 쇄도하는 소리. 격통이 몸을 뒤흔들었다.

“커헉!”

[ 경고! ]

[ 치명적 상처를 입었습니다! ]

[ 상태 이상 ‘지속적 출혈’이 발생합니다. ]

[ 체력이 떨어집니다. ]

[ 체력이 떨어집니다. ]

.

.

.

[ 대상자의 생명 유지를 위해 스킬 ‘재생’의 효과가 일시적으로 변동됩니다. ]

[ 가사 상태로 돌입하시겠습니까? ]

[ Y / N ]

※ 본 저작물의 권리는 저작권자에게 있습니다. 저작물을 복사, 복제, 수정, 배포할 경우 형사상 처벌 및 민사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3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