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화
“쯧.”
“또 까였나 본데, 우리 막내.”
킬킬거리는 웃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머리를 흐트러트리는 손짓에 금명결이 성질을 냈다.
“하지 마.”
“왜? 차여서 기분 안 좋아? 아이스크림 사 줄까?”
금명결과 꼭 닮은 금빛 눈동자가 짓궂게 빛났다.
영국 10대 길드인 넥타르의 마스터이자 드루이드라 불리는 S급 헌터, 금이랑이 씨익 웃으며 그의 어깨를 쳤다.
“어린애도 아니고, 필요 없어.”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쉬자 웃음소리는 더 커졌다. 오랜만에 건수를 잡았다는 느낌이 여실했다.
‘그때 자리를 비우는 게 아니었어.’
소파에 몸을 파묻은 금명결의 미간에 금이 갔다. 살면서 후회라는 걸 거의 느껴 본 적 없는 그이거늘, 이번만은 달랐다.
금이랑과의 만남은 한 달도 전에 잡힌 일정이었다. 깰 수 없으며, 설령 깼다간 뒷감당이 불가능한 약속.
하지만 상황이 이렇게 되니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하필이면 거기서 싸움이 날 줄이야.’
남세우는 제법 개성 넘치는 인물이지만 임무에 있어선 진지한 사내였다. 그런 그가 도발에 걸려 넘어갔다니. 그걸로도 모자라 싸움에 정신이 팔려 한차수가 기태연한테 잡혀간 것도 몰랐다니.
말도 안 되는 우연의 연속에 금명결이 기함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네가 그렇게 안달복달 못 하는 거 오랜만이네. 이번엔 정말 확실한가 봐?”
어느덧 웃음기가 사라진 얼굴로 금이랑이 물었다. 금명결은 이제 와서 무슨 말이냐는 듯 눈을 찌푸렸다.
“이제 와서 무슨 소리야. 역신의 귀걸이를 대신할 만한 걸 찾았다고 말했을 텐데.”
금이랑이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가슴을 세차게 두드렸다.
“S급 능력이 세 개나 달린 소켓 아이템이라고는 말 안 했잖아!”
“당연하지. 전화기에 대고 그런 소리를 했다간 반나절도 안 돼서 전 세계에 퍼졌을걸.”
“아하. 그래서 내 잘못이다?”
“적어도 누님이 한국으로 올 수 있지 않았냐는 소리지.”
“그게 가능해 보이냐?”
입술을 비튼 금이랑이 천장을 가리켰다.
그곳엔 수정처럼 새하얀 나무가 거꾸로 박혀 있었다. 푸른 나뭇잎은 바람 한 점 없음에도 잘게 흔들렸다. 작은 보석들이 부딪히는 것처럼 짤랑이는 소리가 공기를 울렸다.
‘낮은 곳으로 임하는 성령의 나무’였다.
삿된 것을 물리치고 악한 힘을 억누르며 정화하는 힘을 가진 나무. 그것이 교외 저택 천장에 박힌 건 다름이 아니라 금명결 때문이었다.
반년 전, 역신의 귀걸이가 망가지고 금명결은 악령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으니까.
당연히 통제권이 약해진 걸 느낀 악령은 기회를 놓치지 않고 그를 지배하려 들었고. 그 뒤는 당연히도 지난한 싸움의 연속이었다.
금이랑은 그런 동생을 위해 나무의 씨앗을 어렵게 구해다 겨우 싹을 틔웠다.
그런데 동생이란 놈은 이제 와서 대체품을 찾았다고 누나의 고생을 모른 척하다니….
“도와준 건 고맙지만 이젠 괜찮아. 한차수가 있으니까.”
저주 계열 S급 특성 능력치 증가. 그거라면 잃어버린 악령에 대한 통제권을 되찾고도 남는다.
금명결이 자신만만하게 말하자 금이랑이 입꼬리를 올렸다.
“당장이라도 네 것이 될 것처럼 말하네.”
금명결이 어깨를 으쓱였다. 당연한 소리를 왜 굳이 하냐는 의미였다.
금이랑이 히죽거리며 턱을 괴었다.
“정말로 그렇게 생각해? 상대는 너네 길드원 때문에 관리국에 잡혀간 뒤로 전화는커녕 메시지도 전부 씹고 자기를 치료해 줬다는 마음씩 착한 S급 힐러네 집에 숨어 버렸는데?”
“…….”
“야, 커플 아이템 계약 맺자고 꼬시는 게 그렇게 쉬울 줄 알아? 됐고 한동안은 여기서 꼼짝도 하지 마. 귀신 주렁주렁 단 채로 들이댔다가 까일라.”
살기등등해진 동생을 뒤로하고 금이랑은 자리를 떠났다.
역시 금명결은 놀려야 제맛이라니까.
계단을 내려가는 그녀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
“이게 뭐야.”
샤워를 끝내고 나온 한차수는 조금 놀랐다. 부재중 전화 목록 가득 금명결이 찍힌 탓이었다.
‘이쯤 되니 조금 무서운데.’
잠시 고민하던 한차수는 메시지 창을 열었다.
‘언제까지 무시해서 될 것도 아니니까.’
대충 안부를 묻는 메시지를 적어 보내자 바로 답장이 왔다.
[날 이렇게 애타게 하는 건 한차수 씨가 유일해, 정말로.]
[내가 돌아갈 때까지 무사히 있어야 해.]
보내지 말 걸 그랬다. 한차수는 바로 화면을 밀어 닫았다. 시간은 오전 10시. 백선이 올 때까지는 한 시간가량 남은 상태였다.
“흠… 집 구경이라도 할까.”
어제는 잠들어 버린 탓에 집 구경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복도에 발을 들이자마자 어그러졌다.
“윽!”
집안 한가득 풍기는 강렬한 향신료 냄새. 재채기가 나올 정도로 강렬한 향기는 얼이 빠질 정도였다.
“도대체 무슨 요리를 하길래…. 이런 미친.”
식당을 확인한 한차수는 저도 모르게 욕설을 내뱉고 말았다.
거대한 공간 한가운데 거대한 통돼지 구이가 돌아가고 있었다. 온기 유지를 위함인지 장작불까지 쬐면서.
“…….”
굳이 다가가 확인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코를 찌르는 냄새의 근원이 저 통돼지 구이라는 건.
“무슨 연회도 아니고….”
도대체 이걸 저걸 누가 다 먹는단 말인가. 인상을 찌푸리는데 어디선가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다다다닥.
“후후후후….”
채를 썰고, 뭔가를 휘젓고, 물을 끓이는 소리였다. 설마 요리가 저게 끝이 아니었던 건가? 한차수는 뒤늦게 식탁을 확인했다.
어제는 분명 한 개였던 식탁이 네 개가 되어 있었다. 오싹 소름이 돋았다.
‘사랑하는 동생이라더니, 위장을 터지게 해서 죽일 심산인가?’
궁금했지만 물어볼 마음도 안 생겼다. 어차피 이유를 들어 봤자 이해도 안 갈 게 뻔했으니까.
한차수가 질린 얼굴로 식당을 빠져나오던 순간이었다.
딩——동
기다렸다는 듯 종이 울리고, 음산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한차수 씨, 어디 가요?”
뒷덜미를 잡아채는 목소리. 한차수는 애써 침착함을 유지한 채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부엌에서 빠져나온 백담이 그를 집요히 응시하고 있었다.
“가긴 어딜 갑니까. 아무 데도 안 가…, 잠깐만요. 왜 그런 얼굴입니까?”
“눈빛이 불손해요.”
“뭐라고요?”
“방금 전에 못 볼 거 보는 눈으로 날 봤잖아.”
이 녀석, 쓸데없이 예리하네. 한차수가 속으로 혀를 차는데 백담이 거리를 좁혔다.
눈으로 좇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이제 와서 도망가려는 건 아니죠?”
꽈악. 어깨를 짚는 두 손이 무거웠다. 도망가면 가만두지 않겠다는 듯. 손등 위로 황금빛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럴 리가요.”
“못 믿겠어.”
“그러면 도대체 왜 물어본…, 잠깐, 잠깐만요. 진정합시다, 백담 씨.”
“싫은데요?”
두꺼운 팔이 허리를 바짝 조였다. 한차수는 몸을 뒤틀었다. 그러나 S급의 완력을 그가 이길 리 만무했다.
“역시 도망가려고 했던 거구나.”
“아니라니…, 이것 좀 놔 보십시오!”
한차수가 버둥거리든 말든. 활짝 웃은 백담은 그의 허리를 한층 더 강하게 붙들었다.
“설마 이제 와서 내빼려는 건 아니죠, 응? 선이가 누구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당신이 건강하다 못해 멀쩡하다는 걸 보여 줘야 할 거 아니야.”
가만가만 읊조리는 백담의 눈에 광기가 흘렀다. 동생에 대한 집착과 열망이 가득 담긴 눈빛이었다.
한차수는 할 말을 잃었다. 백담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윽!”
어찌나 힘이 좋은지. 한차수는 그대로 백담에게 매달려 복도를 가로지르게 되었다. 백담이 움직일 때마다 눈앞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으윽….”
올라오는 토기에 한차수는 이를 악물었다.
‘재생 스킬을 비활성화해 버릴까.’
그가 두 눈을 부릅뜨고 상태창을 불러오려던 순간이었다. 백담이 걸음을 멈췄다.
“아, 까먹을 뻔했네.”
가만히 읊조린 그가 허리를 숙여 시선을 맞췄다.
“힘들면 지금 말해요. 가는 동안 힐링하려면 자세를 좀 바꿔야 되거든.”
“…자세라면 어떤 자세를 말하는 겁니까.”
“공주님처럼 안겨 본 적 있어요?”
한차수는 조용히 상태창을 껐다.
그래, 상대는 기태연이 아니라 백담이었다. 사람을 끌어안고도 거뜬히 힐링을 시전할 수 있는 S급 힐러.
“조금만 더 천천히 부탁드립니다.”
S급 힐러한테 붙들린 게 죄지. 한차수가 체념한 얼굴로 부탁하자 백담이 활짝 웃었다.
“그럼요. 걱정하지 말아요.”
“하아….”
악역에 빙의한 이후로 처음. 한차수는 차라리 주인공한테 감금당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한창 던전 공략 중인 정이흔이 들었으면 무척이나 기뻐했을 소리였다.
한편, 백선은 대문 앞에 서서 높다란 담벼락을 올려다보았다.
“아, 들어가기 싫다.”
다시는 집에 오지 않을 거라는 선언이 무색하게도 자신은 결국 돌아오고 말았다. 뭐, 자승자박이지만.
“에휴.”
머지않아 누군가 정원을 뛰어 내려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쿵, 쿵, 쿵!
‘저게 날 반기는 발소리일까 아니면 두드려 패겠다는 경고음일까.’
귀 기울여 봤지만 아무래도 알 수가 없었다. 역시 2년간의 가출은 많은 걸 잊게 한 모양이었다.
백선은 일부러 허리를 꼿꼿하게 폈다. 만약 백담이 윽박지를 경우 의연하게 맞받아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철문이 부드럽게 열렸다. 백선은 긴장감을 풀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세 사람이 얼굴을 마주한 순간.
“차수 형 얼굴이 왜 이래.”
백선의 목소리가 대로를 쩌렁쩌렁 울렸다.
“서, 선아?”
“살갗이 다 텄잖아. 열심히 먹이고 재워서 튼튼하다며.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이게 괜찮은 사람 얼굴이야? 목덜미에 빨간 건 또 뭐야. 눈이 있으면 봐, 등신아!”
백담의 옆구리에 달랑 낀 한차수의 뺨을 붙잡은 백선이 빽 소리 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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