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화
악역으로 살기 참 힘들구나. 벌렁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는데 백담이 돌아왔다.
한차수는 그의 눈치를 보다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입니까? 혹시 안 좋은 일이라도….”
백담은 그를 가만히 보더니 갑자기 뺨을 붙잡았다.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할 새도 없이 따스한 기운이 몸을 감쌌다. 힐링이었다.
“신경 쓰지 마요, 잡상인이니까.”
“하지만.”
“씁, 정신 사납게 하지 말고 다 먹었으면 올라가 방에 처박혀서 쉬어요.”
한차수는 식당을 빠져나가는 백담의 등을 가만히 응시했다.
‘거짓말이군.’
담벼락이 사람 키보다 높은 고급 주택 단지다. 이런 곳에 잡상인이 얼씬거릴 리 없다.
‘도대체 누구길래…. 잠깐.’
식당 천장에 달린 전등이 느리게 점멸했다. 불이 들어왔다 나가기를 수차례.
점점 어두워지는 사위를 느끼던 한차수는 뒤늦게 깨달았다.
‘이런.’
전구가 고장 난 게 아니라 제 몸이 수마를 견디지 못하는 거였다.
털썩.
무언가 엎어지는 소리가 울리고, 백담이 식당으로 들어섰다. 의자 위에 아슬아슬 늘어져 있는 한차수를 본 그가 코웃음을 쳤다.
“하여간 조심성 없긴.”
쓰러진 한차수를 보는 백담의 얼굴은 태연했다. 그러라고 쓴 스킬이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가 한차수의 무릎 밑으로 손을 집어넣었을 때였다.
띵―동.
“…….”
띵동, 띵동, 띵동―
이제는 눈치도 안 보겠다는 듯, 종소리가 격렬하게 울렸다. 이러다간 겨우 재운 한차수가 깨게 생겼다.
작게 욕을 읊조린 백담은 결국 통화를 받았다.
연결음이 끝나고 화면 위에 떠오른 건 꼴 보기 싫은 얼굴. 각성자 관리국 공무원인 우저근이었다.
“백담 헌―.”
“한차수 씨 건강해요.”
우저근이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백담이 딱 잘라 말했다.
“너무 건강해서 집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갈 필요가 없어요. 특히나 각성자 관리국에 검사받으러 갈 필요는 요만큼도 없어요. 그러니까 돌아가시죠?”
방금 전 식사를 방해한 것도 이 인간이었다. 그것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를 대면서 말이다.
“저희는 그저 한차수 씨의 건강을 확인하려는 것뿐입니다.”
그래, 이 헛소리. 백담은 코웃음을 쳤다.
‘자기네들이 빨리 데려가라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건강 확인차 다시 데려가겠다고?’
백담은 우저근의 뒤에 정이흔이나 금명결이 있다고 확신했다. 기태연의 비밀을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한 추리였다.
‘어떻게 데려왔는데 쉽게 내줄 수는 없지.’
게다가 두 사람이 각성자 관리국을 압박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정이흔은 현재 게이트 공략 중이고, 금명결은 비행기 안이니까.
한마디로 안 내주겠다고 버티면 끝이라는 소리다. 백담은 재차 목소리를 높였다.
“애초에 그쪽에서 데려가라고 날 불렀으면서 이제 와서 괜찮은지 봐야겠다니 장난해요? 말이 너무 앞뒤가 안 맞잖아요.”
“그건.”
“그리고 나라에 한 명뿐인 S급 힐러가 괜찮다는데 자꾸 이러는 거, 내 실력을 못 믿겠다는 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네요.”
스크린 너머, 우저근은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백담의 말에는 틀린 구석이 없었으니까.
‘난감하군.’
그는 막 한차수의 집에 갔다가 허탕을 치고 이곳까지 온 참이었다.
‘하필이면 백담이 보호자였을 줄이야.’
한차수가 집에 없는 걸 확인한 뒤에야 우저근은 보호자 정보를 요청했다. 당연히 집에 돌아갔으리라 생각했던 게 패착이었다.
우저근이 난감해하는데, 백담이 돌연 그를 불렀다.
“우저근 팀장님.”
“예.”
예쁘게 미소 지은 그가 가운뎃손가락을 들었다.
“빡치게 하지 말고 꺼져요. 애먼 생산계 헌터 겁박해서 피나 쏟게 한 주제에 뭐가 잘났다고 여기까지 기어 들어와요? 다시 돌려주기는 뭘 돌려줘, 참나.”
“백담 헌터, 잠깐…!”
뚝하고 화면이 새까매졌다.
뒤이어 초인종 소리가 여러 번 울렸으나 그가 다시 통화를 받는 일은 없었다.
“하아….”
그리고 같은 시각.
“내가 작작 하랬지, 이 새끼들아.”
기태연은 집중 안보실을 잡아 족치고 있었다.
“이, 이러시면 곤란합니다!”
“이 일이 본부장님 귀에 들어가면 어떻게 될지… 악!”
쩌저적―!
집중 안보실 직원들의 하반신이 일시에 얼어붙었다. 바닥에서부터 솟아오른 얼음 창이 그들의 목을 겨눴다.
“미쳤습니까, 기태연 실장?!”
김민도 팀장도 그중 하나였다. 기태연을 향해 총구를 겨눈 채 그가 소리 질렀다.
“같은 각성자 관리국 동료를 상대로 무력 사용이라니, 이거 징계 정도로 안 끝납니다!”
“한두 번도 아닌데, 뭘. 그래서 곽 실장은 어디 있지? 내가 없는 사이 한차수 풀어 주라고 압박 넣은 윗선과 즐거운 시간 보내고 계신가?”
김민도가 입을 꾹 다물었다.
“정답인가 보군.”
기태연이 나른히 웃으며 담뱃재를 털었다.
“그럼 곽 실장이 돌아올 때까지 나랑 좀 놀아 줘야겠어.”
투둑. 떨어져 내린 잿더미는 바닥에 닿는 순간 얼어붙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무언가 손을 뻗으며 튀어나왔다. 각진 손가락, 두꺼운 몸체를 가진 무언가의 정체는 골렘이었다.
“안 그래도 우리 애가 온기를 느낀 지 좀 오래돼서 말이야.”
안보실 직원들의 얼굴이 공포에 물들었다. 기태연의 얼음골렘은 포옹을 좋아하기로 유명했다.
그러니까, 상대의 갈비뼈를 으스러트릴 만큼 강한 포옹을.
“으아악!”
“티, 팀장님 어떻게 좀 해 보세요!”
“가까이 오면 발포한다. 마지막 경고라고, 기태연. 씨발, 오지 말라고 했잖아!”
이미 다섯 차례 골렘에게 포옹당한 경험이 있는 김민도가 악 소리를 질렀다.
쾅!
굉음과 함께 벽이 흔들렸다.
***
“허억…!”
한차수는 식은땀을 흘리며 잠에서 깨어났다. 떨리는 눈으로 제 가슴을 더듬은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꿈이었나.”
식당에서 그렇게 잠이 들고 어느새 아침이 된 모양이었다. 한차수는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직도 심장이 거세게 뛰고 있었다.
“별 거지 같은 꿈을 다 꾸는군.”
잠자리가 바뀌어서 그런가. 참 이상한 꿈을 꿨다. 갑자기 가슴에 구멍이 뚫리고, 심장이 꺼내지더니, 그 사이로 푸른 피가 차갑게 흘러내리는 꿈.
“괴물도 아니고 무슨….”
한차수는 멍하니 읊조렸다. 꿈의 영향인가. 아직도 심장 부근이 시큰거리는 기분이었다.
가슴팍을 문지르는데 돌연 귓가에 숨소리가 닿았다.
“한차수 씨.”
“……!”
백담이었다.
“놀랐잖습니까.”
한차수가 책망하듯 말하자 백담이 코웃음을 쳤다.
“팔부터 내려놓고 말해요. 참나, 한차수 씨가 이렇게 폭력적인 사람일 줄은 몰랐네.”
“놀라서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쩐 일이십니까. 설마 깨워 주려고 오신 건 아닐 테고.”
“왜 아니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맞아요, 깨워 주려고 온 거.”
한차수가 미심쩍은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백담은 뻔뻔하게 미소 지었다.
사실 한차수의 추측이 옳았다. 백담이 한차수를 찾아온 건 다른 목적 때문이었다.
‘분명히 이 부근이었는데.’
오늘 새벽, 백담은 이질적인 파동을 느꼈다. 잠결이었고, 생각보다 빠르게 사라진 탓에 정확한 위치는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대략적인 위치는 파악했다.
한차수에게 내준 손님방이 있는 3층이었다.
하지만 막상 한차수는 아무것도 모르는 모양이다. 저렇게 얼빠진 얼굴을 하는 걸 보면.
‘그래도 확인은 해 봐야겠어.’
동생이 곧 도착할 텐데 꺼림칙한 점을 놔둘 수는 없었다. 생각을 끝낸 백담은 선심 쓰듯 한차수에게 손을 내밀었다.
“뭡니까?”
“뭐긴 뭐예요. 우리가 병원에서 단둘이 지겹게 했던 그거지. 손 내밀어요.”
“그냥 힐링이라고 말하면 안 되는 겁니까?”
투덜거리면서도 한차수는 순순히 손을 겹쳤다. 백담은 눈을 가늘게 뜨고 스킬을 발동했다.
[ 공평한 치료 ]
사아아―
백담의 눈 위로 황금빛 빛무리가 내려앉았다. 한차수의 몸이 조금 늘어졌다. 백담은 그대로 상대를 받친 채 치료에 집중했다.
“윽.”
그렇게 얼마나 몸속을 헤집었을까. 한차수가 피로한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얼마나 더 해야 합니까?”
백담은 눈썹을 치켜들었다.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빨리 끝내라고 종용하다니. 참 환자답지 않은 환자였다.
“어차피 끝내려고 했어요.”
백담은 깔끔한 태도로 손을 털었다.
‘딱히 이상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은 없군.’
귀찮은 저주에 걸린 이들에게선 간혹 이질적인 파동이 느껴지곤 한다. 하지만 살펴본 결과 한차수는 별달리 달라진 구석이 없었다.
퇴원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아슬아슬하게 살아 숨 쉬는 몸. 딱 그 상태 그대로였다.
‘아무래도 간밤에 느낀 파동은 우연이었나 보네.’
괜한 데 시간 낭비를 했다. 백담이 혀를 찼다. 그래도 덕분에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각성자 관리국 녀석들, 역시 누군가에게 사주를 받은 게 틀림없어.’
더 안 좋아진 구석도 없는데 뭘 확인한답시고 한차수를 데려가나. 분명 제게서 한차수를 빼앗으려는 수작질이 틀림없었다.
‘금명결이나 정이흔이나 도대체 왜 이런 평범한 남자한테 집착하는지 모르겠군.’
상념이 끊긴 건 그 순간이었다. 어느새 손을 놓은 한차수가 그를 향해 물었다.
“다 끝난 겁니까?”
“아, 네. 골골대는 게 별로 달라진 점은 없네요. 오래 못 살겠어요, 한차수 씨.”
미간을 찌푸리는 한차수를 일으켜 세우며 백담은 피식 웃었다.
그래, 녀석들이 집착하든 말든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한차수는 지금 제 손안에 있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두 시간 뒤에 선이 오니까 씻고 나와요. 옷은 옷장에 있는 거 아무거나 걸쳐 입으면 되고.”
“알겠습니다.”
방을 나서는데 전화가 왔다. 발신인을 확인한 백담은 더없이 환하게 웃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금명결에게서 걸려 온 전화였다. 백담은 고민 없이 단번에 착신 거부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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