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화
“제가 있어도 백선이 집으로 올지 안 올지는 모릅니다.”
“당신이 있으면 무조건 와요. 내가 굳이 이 말을 내 입으로 하게 만들어야겠어요?”
조금 열받은 듯 이쪽을 돌아보는 눈이 매서웠다.
한차수는 새삼 이 세계의 형제들은, 아니 형들은 어딘가 돌아 있다는 걸 실감했다.
‘한차수에게 형이 없어서 다행이야.’
형이 없다 못해 부모도 없지만 알 게 뭔가. 적어도 저런 형이 있는 것보다는 나았다.
팔짱을 낀 한차수가 창밖을 바라보다 툭 내뱉었다.
“오래 머물지는 못합니다.”
“그거야 닥쳐 봐야 아는 일이죠.”
백담이 사르르 눈웃음을 쳤다.
한차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들어와요.”
백담의 뒤를 따라 걷던 한차수는 눈매를 찌푸렸다.
그냥 평범하게 넓은 집이라고 생각했는데. 이상할 정도로 층고가 높은 대신 복도가 좁고 길었다.
걷다 보면 자연스레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로.
“아.”
그러나 복도의 끝에 다다르면 감상이 달라진다.
갑자기 탁 트인 공간이 나타나더니, 천창에서 햇빛이 그들을 내리찍는다.
한차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생활 공간이라기보다는 경건한 종교 시설에 더 잘 어울리는 집이었다.
“당신은 2층을 쓰면 돼요.”
백담이 계단을 가리켰다. 한차수는 위로 향하는 좁다란 길을 바라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2층은 백선이 쓰는 곳 아닙니까?”
그걸 어떻게 알았냐는 듯 백담이 그를 돌아보았다. 한차수는 어깨만 으쓱했다.
“병원에 있을 적에 거의 매일 얼굴을 보다시피 했잖습니까. 그때 들었죠.”
그 외에도 학창 시절의 일이나 친구들과의 추억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백담이 콧잔등을 찡그렸다.
“지금 선이랑 친하다고 자랑하는 거예요?”
“제가 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그런 짓을 왜 합니까.”
억울한 척 눈을 크게 떴지만… 맞다. 사실 여기까지 끌려온 게 좀 짜증 나서 건드려 봤다.
그래서 뭘 어쩔 건가. 그가 사랑해 마지않는 동생이 자길 그리도 애틋하게 여긴다는데.
한차수는 뻔뻔해지기로 했다.
나라고 못 할 거 뭐 있나. 다른 두 S급에겐 원작 한차수가 저지른 죄라도 있지. 지금의 백담에게는 떳떳하다 못해 결백한 몸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었다.
“한차수 씨.”
“예?”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고 싶어요?”
퇴원도 내가 시켰는데 입원이라고 못 시키겠니.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씻고 옷 갈아입고 오겠습니다.”
한차수는 얌전히 계단으로 향했다.
***
“한차수는 어디 있지?”
긴급 출동을 마치고 돌아온 기태연이 물었다. 숙직실 문에 기댄 그의 얼굴이 피로했다.
“예? 누구요?”
“차수? 어디서 차라도 받아 왔어요?”
숙직실에 모여 삼삼오오 보드게임을 하던 이들이 고개를 들었다. 멍청한 표정을 보아하니 다들 모르는 모양이었다.
기태연이 얼굴을 쓸어내렸다. 안 그래도 졸려 죽겠는데 아랫놈들은 하나같이 멍청해 빠져가지고….
숙직실을 둘러보던 그가 성큼 걸음을 옮겼다.
“규혁아.”
“예, 예? 어, 저요?”
“네가 모르면 안 되지.”
멍청한 것들을 너무 오냐오냐한 걸까.
기태연은 자신의 너그러움을 한탄하며 부하 직원의 시야를 친히 자신과 같게 해 주었다.
“규혁아. 우리 이규혁 대리.”
“커헉, 억… 시, 실장님. 마, 말로 하세요!”
“너 이 새끼, 왜 모르는 척해.”
“도대체 뭘요…”
“한차수 담당 너잖아. 어디 갔는지 왜 몰라.”
“어? 예? 안전 관리과에서 연락 안 했습니까?”
뭔 소리야. 기태연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당황한 이규혁이 빠르게 말했다.
“두 시간 전에 한차수 씨 깨어났고, 안전 관리과에서 찾아왔습니다. 그쪽에서 한차수 씨 보호자 확인하고 실장님한테 따로 연락드린다고 했는데요.”
기태연이 머리를 쓸어 올렸다. 날카로운 얼굴에 실금이 그어져 있었다.
“연락 안 왔다.”
“예? 아, 설마.”
이 대리의 눈이 허망해졌다. 기태연의 입꼬리가 한없이 치켜 올라갔다.
위기관리실을 상대로 이런 장난질을 벌일 곳은 한 곳뿐이었다.
“이 대리 덕에 안보실에 한 방 먹었네.”
각성자 관리국 집중 안보실. 위기 관리실의 아성을 넘고자 만들어진 후발 주자였다.
본부장을 등에 업고 되도 않게 자신들을 걸고넘어지는 애새끼들이기도 했고.
“으아아….”
“가서 한차수 잡아 와. 그리고 안보실 새끼들 지금 어디 있는지도 알아 오고.”
“옙!”
우르르 뛰어나가는 부하들을 보며 기태연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피를 먹은 이들에게선 때때로 부작용이 나타나고는 한다. 별로 심각한 부작용은 아니지만….
“2미터짜리 인면어를 또 보고 싶지는 않은데.”
숙직실을 나서는 기태연의 눈빛은 제법 심각했다.
***
개운하게 씻고 내려온 한차수는 눈을 휘둥그레 떴다.
“자리에 가서 앉아요.”
백담은 혼자서 바쁘게 접시를 나르고 있었다. 하나같이 김이 풀풀 나는 게 아무리 봐도 금방 만든 요리들이었다.
‘설마 직접 한 건가?’
보면서도 놀라웠다. 백담이 직접 요리를 만들다니.
얼굴만 봐서는 요리는커녕 손끝에 물 한 방울 닿는 것도 용납지 못하게 생겼는데 말이다.
“도와드릴까요?”
그냥 앉아 있기 겸연쩍어 물어봤는데 코웃음이 돌아왔다.
“벨트도 스스로 못 매는 양반한테 접시를 맡기라는 건 아니겠죠? 혹시 돌았어요?”
“…아닙니다.”
“머리가 제대로 안 돌아가면 말해요. 뇌는 내 영역이 아니라서.”
빠르고 냉정한 진단을 내리고 백담은 다시 부엌 안으로 사라져 버렸다.
‘말 한번 살벌하게 하네.’
하지만 말투만 떼놓고 보면 그는 나름대로 자신을 배려하는 걸지도 몰랐다. 사실 배려라기보단 귀찮은 일을 방지하려는 목적이 더 커 보였지만.
그러고 보니 병원에서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회색 눈동자가 천천히 과거를 훑었다.
‘그래, 그… 피 토했던 때.’
몰래 병원을 빠져나갈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스킬을 여러 개 발동시켰을 때. 페널티로 하필이면 각혈이 걸렸다. 그리고 타이밍 좋게 백담한테 현장을 들켰었지.
당시의 적막을 떠올리면 지금도 소름이 돋았다. 다행히도 백담은 의사들을 불러 모으는 대신 자신을 죽어라 노려보기만 했었다.
어쨌든 그때도 백담은 나름 친절했다. 자신 대신 바닥에 흘린 피를 기꺼이 치워 주었으니.
“흠….”
역시 말은 저렇게 해도 힐러라 이건가?
한차수는 열심히 부엌에서 뭔가를 뒤집는 백담을 건너다보았다.
아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높이 묶고 요리하는 게 어지간한 열정이 아니었다.
백선이 집에 돌아온다니 좋아 죽겠나 보다. 이해할 수 없는 형제애에 한차수는 조금 질린 낯이었다.
저러다가 백선이 연인이라도 데려오는 날에는 피바람이 불겠네. 무심코 그렇게 생각했을 때였다.
‘그러고 보니 연인이 생기는 건 백선이 아니라 백담이잖아?’
원작에선 그와 로맨스 기류를 풍기는 여성이 등장했었다. 어디까지나 주인공은 정이흔인지라, 비중 있게 다뤄지지는 않았지만.
‘어쩌다가 만난 거였더라…. 음, 백담이 우울증에 걸려 있을 때 위로해 주면서 만났다고 한 것 같은데.’
거기까지 생각했을 때 가슴 한구석이 섬뜩해졌다.
소설 초반부, 한차수의 복수에 가담한 백담은 어느 순간 종적을 감춘다. 그리고 중후반부에 연인과 함께 등장해 정이흔에게 조력한다.
왜 종적을 감췄냐고?
‘한차수를 죽이고도 동생을 잃은 상실감을 극복하지 못해서….’
아이고, 이놈의 엑스트라 악역이 참 등장인물 여럿 망쳤었구나. 원작을 떠올린 한차수는 새삼스럽게 혀를 찼다.
“하….”
그래도 이제 백선이 죽을 일은 없으니 다행이었다. 아냐, 잠깐만.
‘그렇게 되면 백담이 연인과 못 만나게 되는 거잖아?’
남의 연애를 이렇게 망쳐도 되는 걸까. 한차수가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먹어요.”
탁하고 접시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정신을 차리니 어느새 백담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일단 되는 대로 만들었어요. 못 먹는 거 있으면 말하고.”
머리끈을 풀자 긴 머리카락이 등 뒤로 물결쳤다. 참 생긴 건 멀쩡하다 못해 아름다운 사내였다.
‘비록 애인은 없겠지만….’
죄책감을 가진 것도 잠깐이었다.
한차수는 상 위에 차려진 음식의 향연에 넋을 놓았다.
도대체 뭘 넣어서 어떻게 만들면 이런 색과 냄새가 나는 건가.
금명결의 부하가 가져다주는 음식도 이런 수준은 아니었다. 한차수는 가슴속 깊은 울림을 느끼며 수저를 집어 들었다.
그러다 잠깐 시간을 두고 백담을 흘끗 보고선.
“…잘 먹겠습니다.”
덤덤하게 인사했다. 납치는 나쁜 일이지만 먹을 걸 주는 건 나쁜 일이 아니니까.
이것저것 열심히 먹는 모습에 백담의 입꼬리가 한껏 치켜 올라갔다.
“오….”
“옆에 있는 나물에 싸 먹어요.”
“이렇게 말입니까?”
“보통 소고기를 나물이라고 부르지는 않죠.”
식사는 제법 즐거웠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즐기기로 마음먹은 게 도움이 됐다.
‘어차피 백선이 오기 전까지만 있으면 되는 거 아닌가.’
게다가 백담의 태도로 봐서는 그리 오래 걸릴 일도 아니었다.
‘동생한테 집착하는 옆집 형네 집에 왔다고 생각하자.’
인생에 그런 옆집 형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비유하자면 그 정도가 될 것 같다.
한차수는 깔끔한 자기 합리화를 끝내고 붉은 양념에 버무려진 고기를 공략했다.
하얀 쌀밥을 반 공기가량 비워 냈을 무렵이었다. 경쾌한 종소리가 길게 울렸다.
띵―동
“잠깐 기다려요.”
인자한 미소로 이쪽을 바라보던 백담이 몸을 일으켰다. 멀어지는 발소리가 들리고, 한차수는 낮은 숨을 내쉬었다.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린 건 식사를 끝마칠 즘이었다.
“지금 나랑 장난해요? 헛소리하지 말고 꺼져요. 팔다리 잡아 뜯었다가 다시 붙여 버리기 전에.”
순간 원작이 떠올라 심장이 철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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