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화
“정이흔이 부탁한 거라고?”
선희다가 나간 뒤, 한차수는 한숨을 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정이흔은 사람이 좋아도 너무 좋았다.
‘정이흔을 저대로 놔둬도 되는 걸까?’
원작의 정이흔은 동생 정서흔의 죽음으로 성격이 변한다.
조금 과장해서 죽었다 새로 태어났다고 할 정도였다. 그만큼 소설 속 정이흔은 인간미 없고 냉혹한 인물이었으니까.
하지만 이제 그런 미래는 오지 않는다.
정서흔은 사지 멀쩡하게 돌아와 제멋대로 굴고 있고, 정이흔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으니까.
호구 같은 성격을 그대로 가지고서.
“…위험할지도 모르겠는데.”
가만히 읊조리는 한차수의 눈빛이 복잡했다.
그냥 평범한 사람이라면 이렇게 걱정하지는 않을 터였다. 하지만 정이흔은 평범한 호구가 아니라 S급 호구이지 않은가.
악역인 자신도 이렇게 쉽게 믿어 주고 뭐든 퍼주려 하는데, 다른 놈한테 잘못 걸린다면?
‘안 봐도 뻔하군. 골수까지 빼 먹히고 잘못하면 목숨까지 잃겠지.’
그러면 그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질 터였다.
어쨌거나 정이흔은 한국을 대표하는 S급들 중의 하나이자, 주요 전력이었으니까.
“흐음.”
그럼 어떻게 한다. 이 세계에 성격 개조 같은 게 있을 리도 만무하고.
한차수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그렇게 몇 시간이나 지났을까.
선희다를 불렀을 때와 똑같이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한차수 헌터, 계십니까?”
“……?”
“보호자가 방금 전에 도착하셨습니다. 바로 집으로 간다고 하시니 준비하시면 됩니다.”
나한테 보호자가 있다고?
“한차수 헌터. 제 말 들리십니까?”
쿵쿵, 문이 세차게 흔들렸다. 잠깐의 간격을 두고 한차수가 침착한 어조로 대답했다.
“일어나 있습니다.”
“예, 그럼 잠시만 안에서 기다리세요. 팀장님께서 보호자분 데리고 오실 겁니다.”
인기척이 멀어졌다. 한차수는 단숨에 방을 가로질러 문을 걸어 잠갔다.
‘보호자라니, 그게 무슨 소리지?’
관리국 직원이 던지고 간 소식은 그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원작 한차수에게 가족이 있다는 정보는 접한 적이 없기 때문이었다.
혹시 내가 놓친 게 있었을까? 아니다. 집 안도 샅샅이 뒤졌고, 일기장도 전화번호부도 모두 확인했다.
원작 한차수에게 가족의 흔적은 없었다.
그때,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모두 두 사람. 직원이 언급한 팀장과 보호자라는 사람일 것이다.
한차수는 숨을 죽이고 인기척에 귀를 기울였다.
“곽 실장님께서 무척이나 죄송하다고 말씀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됐으니까 그건 정이흔한테나 말하세요. 그래서 정확히 상태가 어땠다고요?”
“갑자기 피를 흘리고 쓰러지셨습니다. 지금은 괜찮은 것 같은데….”
낯선 목소리 하나와 어딘지 귀에 익은 목소리 하나.
‘잠깐, 저 목소리는.’
한차수가 두 번째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을 때였다.
“시끄럽게 숨 쉬지 말고 나와요, 한차수 씨.”
낭랑한 백담의 목소리가 복도를 울렸다.
***
한차수는 묘한 눈으로 상대를 응시했다.
백담과 함께 온 공무원. 그는 자신을 김민도 팀장이라고 소개했다. 그러더니 몹시 미안한 얼굴로 기태연은 바빠 오지 못했다고 했다.
“원래 좀 잘 흥분하는 분이긴 한데 이렇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대신해 사과드리겠습니다, 한차수 씨.”
일개 B급 헌터를 대하는 태도라기엔 퍽 정중했다. 정이흔과 금명결의 수작이 제법 성과가 있는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는데.’
몇 시간 되지 않은 사이 어지간히 각성자 관리국을 괴롭힌 모양이다. 참 쓸데없는 짓을 잘도 하지.
그나저나 백담은 어떻게 자신의 보호자가 된 걸까. 한차수는 슬쩍 사내를 건너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부드러운 눈매가 곱게 휘었다. 그러더니 김민도를 향해 눈짓했다.
대화에나 집중하라는 뜻이었다. 한차수는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시선을 돌렸다.
그사이 상대는 어딘가 초조한 기색이 되어 있었다. 뭐지? 의아해하는데 김민도가 조심스레 덧붙였다.
“저, 사실 원하신다면 기태연 실장이 직접 한차수 씨께 사과하도록 자리를 마련할 수도 있습니다. 저희 곽 팀장님께서 본부장님에게 직접 말씀드리면….”
본부장이라니. 한차수는 놀라 거절했다.
“아뇨, 괜찮습니다.”
그는 차분한 태도로 공무원을 안심시켰다.
“어차피 쌍방 간의 오해로 인해 발생한 일이니까요. 이쯤에서 서로 앙금 없이 털어 내는 게 좋겠습니다.”
“정말 그걸로 괜찮으시겠습니까?”
“예.”
그러자 공무원의 얼굴에 감탄이 번졌다. 역시 듣던 대로다, 라며 뭐라고 중얼거리는 것 같았다.
‘이상한 오해를 산 것 같은데.’
하지만 나서서 오해를 풀기엔 귀찮았다. 일단 집에 가는 게 우선이었으니까.
“그럼 부디 무사히, 아무 일 없이 안전하게 귀가하시길 바라겠습니다!”
“…예.”
각성자 관리국에서 빨리 나가 달라고 느끼는 건 내 착각일까. 한차수는 떨떠름함을 삼키고 각성자 관리국을 나섰다.
긴 그림자가 그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그래서… 어쩌다 백담 씨가 제 보호자가 된 겁니까?”
고개를 돌린 곳에는 백담이 있었다. 예쁘게 웃은 그가 어딘가를 가리키며 말했다.
“서서 이야기할 필요 있나요?”
새하얀 스포츠카 한 대를 본 한차수가 헛웃음을 흘렸다.
***
“이런.”
벨트를 채우는데 자꾸 손이 헛나갔다. 한차수가 혀를 차자 시동을 걸던 백담이 핀잔을 줬다.
“그거 하나 제대로 못 해요?”
“죄송합니다.”
하나도 죄송하지 않은 얼굴로 한차수가 내뱉었다.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네요.”
재생 스킬 비활성화의 후유증이었다. 손에 힘을 줄 때마다 덜덜 떨리기만 할 뿐.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백담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가지가지 하네요, 한차수 씨.”
부스럭 소리가 들리더니 백담이 이쪽을 향해 몸을 기울였다. 훅하고 상쾌한 향기가 밀려들었다.
‘그래도 꼴에 보호자로 왔다고 챙겨 주는 건가.’
단단한 팔이 몸 위를 가로질렀다. 허벅지 근처에서 헤매는 손. 한차수는 도와주려다 백담에게 손등을 맞고 말았다.
“아.”
“번잡스럽게. 가만히 있어요.”
딸깍. 벨트 맞물리는 소리가 울렸다.
“내가 어쩌자고….”
백담이 작게 중얼거렸다. 갑자기 신세 한탄이라도 하려는 걸까. 한차수는 뒤이어 나올 말에 집중했다.
하지만 말 대신 나온 건 가벼운 한숨. 가슴께를 간지럽히는 바람에 반사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뭐야. 어디 또 아파요?”
아마색 머리카락이 스륵 들려 올라가며 시선이 얽혔다.
서늘한 손이 이마를 짚었다. 곧이어 따스한 기운이 몸을 감싸고, 빛무리가 시야 밖으로 흩어졌다.
“고맙습―.”
“됐어요. 내가 귀찮아지기 싫어서 하는 거니까.”
그래, 뭐. 본인이 감사 인사 싫다는데. 한차수는 어깨만 으쓱였다. 받기 싫다는데 굳이 해야 할 필요성까지는 못 느꼈다.
차가 천천히 각성자 관리국을 나가 도로에 접어들었다. 앞선 차량을 주시하던 한차수가 물었다.
“그래서 원하신 대로 차에 탔는데, 어떻게 된 건지는 설명 안 해 주십니까?”
손가락이 핸들을 가볍게 건드리고, 연갈색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백담이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당신 병원에서 퇴원할 때 내가 보호자였으니까요.”
“예?”
한차수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거랑 이게 무슨 상관인가. 그가 다시 물었다.
“자세히 말씀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힐러 보호자 제도 몰라요?”
그게 뭔데. 한차수가 되묻듯 시선을 보냈다. 백담이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아니, 던전 공략하러 들어간 헌터가 그걸 왜…. 아, 한차수 씨 생산계였지. 내가 까먹었어요. 생산계 주제에 겁도 없이 공략에 참여했다는 걸 잊고 있었네.”
혀를 찬 백담이 핸들을 돌리며 말했다.
“A급 이상의 힐러는 유사시 헌터들의 보호자 역할을 할 수 있어요. 긴급 상황에선 가족들에게 일일이 연락할 시간도 없으니까, 보호자가 누가 됐든 일단 사람부터 살려야 한다는 거죠.”
그래서 유백 병원을 퇴원할 때 백담은 한차수의 보호자로 자신을 지정했다고 한다.
“그렇게 된 거군요.”
그리고 설명을 들은 한차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다행이다.’
백담의 말이 맞다면, 한차수에겐는 가족이 없는 게 맞다.
만약 존재했다면 각성자 관리국은 백담보다 가족에게 먼저 연락을 넣었을 테니까.
가슴 한구석에 자리 잡은 불안감이 스르륵 녹아 없어졌다. 한차수는 보다 편안해진 얼굴로 시트에 몸을 기댔다.
‘기억 상실이니 뭐니 체질에도 안 맞는 연극을 할 필요는 없겠군.’
그러는 사이 차의 속도가 서서히 느려졌다. 인적이 드문 길가에 진입한 차는 부드럽게 비탈길을 올랐다.
낯선 풍경에 한차수가 몸을 일으켰다.
“잠깐만요. 여기가 어딥니까.”
어딜 봐도 우리 집으로 가는 길이 아닌데. 도로 양옆으로 높은 담벼락과 대문들이 이어졌다. 설마설마했는데.
“지금 백담 씨 집으로 온 겁니까?”
가지가지 한다, 정말.
한차수가 묻자 백담이 피식 웃었다. 마치 그걸 이제 알았냐는 듯한 웃음이었다.
“냉큼 올라타 놓고 이제 와서 모른 척은.”
“애초에 이러려고 절 데리러 오셨군요.”
그래, 네가 나한테 무슨 좋은 감정이 있다고 보호자를 자처했겠어.
“절 미끼로 동생분을 불러내려는 겁니까?”
한차수가 추궁하자 백담이 눈웃음을 쳤다.
“약속은 지켜야죠, 한차수 씨.”
정답이라는 말이었다. 한차수는 끙 소리를 내며 머리를 짚었다.
동생에 미친놈들 때문에 참 별일을 다 겪는다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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