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화
아니, 도대체 어디가 어떻게 아프길래 갑자기 피를 토하며 쓰러진단 말인가.
‘괜찮아져서 퇴원한 게 아니었나?’
이러다 관리국 안에서 송장 치우게 생겼다. 한차수를 감싼 기태연의 얼굴이 새카매졌다.
“아, 시말서 쓰기 싫은데.”
힐러들을 불러오라며 우저근을 보낸 지 한참. 도대체 어디서 뭘 하는 건지 감감무소식이었다.
그사이 품에 가둔 온기는 빠르게 식어 가고 있었다. 여기저기 주물러 보던 기태연은 뭔가 생각난 듯 인벤토리를 뒤졌다.
“돌겠네.”
지난번에 다 쓰고 채워 두는 걸 깜빡했다. 따로 포션이 필요한 체질이 아니다 보니 매번 잊어버렸다.
“쿨럭!”
죽어 가는 날 보라는 듯 한차수가 재차 피를 쏟아 냈다. 뜨끈한 핏물을 묘한 얼굴로 바라본 기태연이 소매를 걷었다.
“한차수 헌터.”
“…….”
“내가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니까, 알아서 좀 정상 참작 해 봐요.”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내뱉던 기태연이 그대로 제 손목을 물어뜯었다.
까득, 끄드득. 단단한 무언가가 찢기는 소리가 공간을 울리고.
“먹기 힘든 거니까 흘리지 말고 잘 받아먹고….”
기태연은 하얗게 질린 한차수의 입술 위로 푸른 핏방울을 떨어트렸다.
점점 혈색을 되찾아 가는 한차수를 내려다보는 눈이 하얗게 빛났다.
우저근을 비롯한 관리국 내 헌터들이 들이닥친 건 그 후의 일이었다.
“으아아,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언젠가 이런 날이 올 줄 알았다고! 실장님, 제가 그렇게 살다가 큰코다칠 거라고 얘기했잖아요!”
“글쎄, 그 전에 네 코가 먼저 부러질 것 같은데.”
“팀장님, 실장님이 협박해요!”
“…이 대리, 빨리 치료부터 합시다.”
한발 뒤로 물러서, 기태연은 한차수가 치료받는 광경을 지켜보았다.
팔짱을 낀 그의 손목 어디에서도 상처는 찾아볼 수 없었다.
***
“한차수 씨이…. 눈 좀 떠 보세요. 제발요. 아니면 저 죽어요.”
뭐지, 비가 내리나…?
겨우 정신을 차린 한차수는 당황했다. 흐릿한 시야 가득, 물방울이 쏟아지고 있었다.
‘설마 피 좀 토했다고 밖에 던져 놓은 건 아니겠지.’
당황스러움을 느끼며 겨우 눈을 깜빡이는데.
“으아악! 한차수 씨익!”
갑자기 눈앞으로 오렌지가 달려들더니, 비명을 질렀다.
“윽…!”
찌이잉, 고막을 파고드는 고성에 머리가 울렸다. 한차수는 반사적으로 얼굴을 찡그렸다.
그사이 회복된 시력이 시야를 밝혔다. 사물이 점점 뚜렷해지고, 오렌지에 이목구비가 생겼다.
방울방울 눈물을 떨어트리면서 이쪽을 보고 환하게 웃는 오렌지는….
‘정이흔이 보냈다던 사람이잖아.’
이 사람이 여기서 뭘 하는 거지. 기태연은 어디 가고?
한차수가 묻기도 전에, 상대가 덥석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방긋 올라간 입꼬리 위로 눈물이 줄줄 흐르는 게 살짝 소름 끼쳤다.
“하, 한차수 씨….”
“…….”
“마, 말 좀 해 봐요. 바보 된 거 아니죠? 머리 멀쩡하죠? 그쵸?”
“…멀쩡합니다.”
“흐아악, 사랑해요!”
두 팔을 벌리며 껴안으려는 오렌지를 진정시키는 건 꽤 어려워 보였다. 하지만.
“아, 머리가.”
머리를 짚으며 신음을 내뱉자 다행히 금세 떨어져 나갔다. 그사이 한차수는 밖을 힐끔 내다봤다. 점점 짙어지는 하늘. 저녁은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어어, 음, 크흠, 흠. 그게 말이죠.”
갑자기 말을 아끼기 시작한 오렌지를 탈탈 털어 정리한 내용은 대략 이랬다.
오렌지의 정체는 천령 길드 소속 A급 헌터, 선희다. 정이흔의 부탁을 받고 온 일일 경호원이 맞았다.
다만 거래소에서의 싸움은 의도한 게 아니었고, 자기도 어쩌다 그렇게 일이 커졌는지 당황스럽다고.
“저 평소에는 되게 침착하거든요? 길드장님도 그래서 절 믿고 한차수 씨를 맡긴 건데….”
썩 신뢰 가는 말은 아니었지만 자기가 그렇다니 그건 차치하고.
하여튼 대낮에 각성자끼리 전투를 벌인 건 중범죄로 다뤄질 수 있는 사안이었다. 일반인들의 안전을 위협하는 일이었으니까.
다만 실제로 피해를 입은 일반인이 없으며, 거래소 측에서 선처를 원했기에 쇠고랑을 차는 신세는 면했다고 한다.
일주일간의 구금실행은 피할 수 없었지만.
“…여기 구금실입니까?”
피 흘리고 쓰러진 사람을 구금실에 보내? 한차수는 기태연의 인성에 감탄했다.
성격이 쓰레기 같아서 본부장을 못 달았다더니. 그럴 만하네.
“아, 그건 아니에요. 여긴 관리국 본부에 있는 직원용 회복실. 전 잠깐 한차수 씨 보러 들른 거예요.”
눈물을 쓱 닦아 낸 선희다가 씩씩하게 대꾸했다.
“기 실장이 한차수 씨를 데려갔다는 거 알고 제가 만나게 해 달라고 그랬거든요. 그 인간이라면 분명히 한차수 씨를 괴롭힐 테니까.”
사람 보는 눈이 제법 정확한 오렌지였다. 한차수가 더 말해 보라며 그녀에게 물병을 건넸다.
크으, 목을 축인 선희다가 툴툴대며 말했다.
“근데 끝까지 안 된다면서 버티더라고요? 사건 현장 근처에 있었으니 수상하다지 않나. 조사가 필요하다지 않나. 아니, 우리 들들 볶아서 다 털어 놓고 뭔 지랄인가 했는데….
갑자기 우 팀장이 힐러를 불러 모으더라고요.”
손이 모자랐는지 심지어 자신과 함께 취조를 받던 힐러도 불려 나갔다고 한다.
“뭐야, 너는 왜 부른 거래?”
“나 한차수 씨 치료하고 왔어.”
“뭐?”
그 덕에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그때를 떠올린 선희다의 눈에 싸늘한 빛이 스쳤다.
들떠 올랐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그래서 우 팀장한테 차분히 의견을 개진했죠.”
선희다가 꽈악, 주먹을 쥐었다 피었다. 한차수는 그녀의 의견 개진이 물리적 형태였음을 직감했다.
“예상대로 달려와 보니 한차수 씨가 막 사경을 헤매고 있더라고요? 하, 기 실장, 그 개씨발 새끼가 진짜.”
“알겠습니다. 진정하세요.”
선희다의 눈동자에 화륵 불이 붙었다. 한차수는 다급히 그녀를 다독였다.
더 듣고 있다가는 선희다가 못 참겠다며 기태연을 죽이러 갈 것 같았다.
‘어찌 되었든 기태연이 날 놔준 건 맞군.’
하긴 스킬을 써서 겁을 주긴 했어도 어디까지나 말로만 몰아붙였는데 갑자기 쓰러졌으니. 기태연이라 하더라도 제법 놀랐을 테다.
도박을 시도한 보람이 있었다. 한차수는 활성화된 재생 스킬을 확인하고 시선을 내렸다.
“후우…. 죄송해요. 미치겠네. 아픈 분을 앞에 두고 내가 이런 험한 말을 내뱉다니.”
그사이 선희다는 갑작스러운 자책 모드에 돌입해 있었다. 감정 변화가 참 극적인 타입이었다.
사정없는 손짓에 주황색 머리칼이 두둑 뜯겨 나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제어가 안 되는지 모르겠어요. 그래도 한차수 씨가 무사해서 다행이에요, 정말.”
“그렇습니까.”
“예에, 제가 확인도 했으니 한차수 씨는 곧 집으로 돌아가실 수 있을 거예요. 저는 비록 여기 남겠지만 괜찮아요. 길드장님이 복수해주겠다고 했거든요.”
주황색 머리통이 흐흐 웃으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뜯기다 만 머리카락이 나풀나풀 허공에 흩날렸다.
한차수의 얼굴에 미약한 경악이 어렸다.
“복수요?
설마 각성자 관리국을 때려 부수는 건 아니겠지. 아무리 호구라도 그 정도는 아닐 거야. 한차수가 걱정하는데, 선희다가 손을 꼭 붙잡아 왔다.
“아, 걱정 마세요. 본부장을 납치해 살해한다거나 그런 건 아니에요. 그냥, 안 그래도 바쁜 각성자 관리국을 좀 더 바쁘게 만들어 주겠다는 것뿐?”
“…….”
“엑실리스 측에서도 협조한다고 했으니까 한차수 씨는 아무 걱정 마세요.”
걱정하지 말라면서 더 걱정하게 만들다니.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몰라도 제발 적당히 했으면 좋겠다. 한차수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저 때문이라면 괜찮습니다. 굳이 그렇게 하지 않으셔도….”
“아뇨!”
선희다가 강하게 고개를 휘저었다.
“저나 다른 헌터들은 몰라도 한차수 씨는 엄연한 피해자죠. 강압적인 각성자 관리국의 처사에 곤욕을 치룬 피해자! 그러니 저희에게 다 맡기세요.”
도저히 말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 이미 늦은 뒤였다.
“2지구 쪽에서 정체불명의 폭발음 발생! 해당 지역 담당 헌터들은 빨리 출동 대기해 주세요!”
“율혜동 수목원에 갑작스러운 안개 출현? 잠깐, 범위가 계속 넓어지는데? 야, 이거 어떻게 된 거야!”
벽 너머 복도에서 들려오는 무전과 고함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한차수의 눈이 흔들렸다.
“선희다 씨, 저게 설마.”
“아이참, 저는 모르겠네요. 한차수 씨는 아무 걱정 말고 푹 쉬다 집에 가시면 된답니다.”
선희다의 해맑은 분위기가 이렇게 무섭게 느껴지다니. 한차수가 새삼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와 함께 문 밖에서 누군가 선희다를 불렀다.
“면회 시간 끝났습니다. 선희다 헌터, 나오세요.”
“…….”
“10초 내로 나오지 않으면 수감 기간 여기서 일주일 더 늘어납니다.”
선희다는 욕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안녕히 계세요. 다시 만날 때까지 꼭! 몸 건강히 있으시구요.”
“예에….”
그럴 수 있으면 말이다. 비척비척 이불 속으로 들어가려던 한차수가 순간 멈칫했다. 그리고 선희다를 불렀다.
“잠깐만요. 선희다 헌터.”
“네?”
“아까는 왜 절 VIP라고 불렀던 겁니까?”
문득 떠올라 물었을 뿐이다.
거래소에서는 죽어라 VIP라고 불렀던 사람이 지금은 잘만 한차수 씨라고 부르고 있으니까.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예상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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