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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29화 (29/113)

29화

[ 한국 아이템 거래 협회소에서 일어난 대형 길드 간의 충돌! ]

짜릿한 제목의 기사가 시사란을 덮고, 각 길드 홍보 담당자들이 걸려 오는 전화에 진저리를 치는 때.

한차수는 끔찍한 둔통과 함께 정신을 차렸다.

“윽.”

정신을 차린 그는 시큰거리는 뒷목에 신음을 내뱉었다. 겨우 눈꺼풀만 들어 올린 회색 눈동자가 고통에 흐릿했다.

“아, 미친.”

망치로 누가 내리친 것 같은 고통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아플 수가….

망치는 아니지만 비슷한 거에 맞았지, 참.

멍한 얼굴로 한차수는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겨우 거래소를 빠져나오던 찰나, 누군가 제 뒷목을 내려친 순간을 말이다.

“하….”

사는 게 왜 이렇게 고달프지.

한차수는 반쯤 넋 나간 얼굴로 천장을 응시했다. 신을 믿지는 않지만, 만약 있다면 한 번만 만났으면 좋겠군.

소설에 빙의도 하는데 신을 때리는 거야 쉽지 않을까.

불경한 생각을 하는 것도 잠깐. 한차수는 곧 방 안의 풍경을 둘러보았다.

단정한 눈매가 의아함에 일그러졌다.

‘뭐 하는 곳이지?’

병실인 듯 병실 같지 않은 공간. 철제프레임 침대와 보급형 침구를 본 한차수의 눈썹이 치켜 올라갔다.

익숙하게 느낀다면 얼마든지 그럴 만한 풍경이었다. 비교하자면, 그래. 야전 병동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이 세상에서는 처음이었다. 아무래도 비슷한 기능을 하는 공간인 것 같긴 한데….

어디에 딸린 곳이냐, 그게 문제였다.

철컥, 철컥.

“쯧.”

혹시나 해서 시도해 봤다만 역시나 문이 열리지 않았다. 문고리는 계속 헛돌아가기만 했다.

하긴 대놓고 사람을 기절시켜 끌고 온 놈이다. 정신을 차렸다고 도망치게 내버려 두겠는가.

“…내리치면 어떻게 될 거 같은데.”

외투랑 단검이 어디 있더라. 인벤토리를 뒤지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점점 소리가 가까워지는 걸로 보아 이쪽으로 오는 듯했다.

한차수는 재빨리 자신이 누워 있던 침대에 몸을 던졌다. 도중에 프레임에 정강이가 찧었지만 신음이 튀어 나갈 일은 없었다.

이게 다 습관 덕이었다. 자화자찬한 한차수는 눈을 감고 몸을 틀었다.

타이밍 좋게 덜그럭하며 문이 열렸다. 뒤이어 땅을 박차는 듯한 강한 발걸음 소리.

저벅, 저벅, 탁.

구두 굽이 마지막으로 바닥을 내리친 순간. 차가운 냉기가 발끝에서부터 솟아올랐다.

쩌저적!

침대가 통째로 얼어붙었다. 몸을 일으킨 한차수가 마주한 건 서늘한 낯의 사내였다.

“추운 데서 자면 입 돌아갑니다.”

새파란 눈동자가 한차수의 면면을 훑었다. 차가운 빛과 달리 끈질긴 눈빛.

“생각보다 멀쩡하네요.”

빠르게 훑어 내리는 시선. 자못 불성실하게 보였으나 시선이 닿는 곳은 꼼꼼했다.

“한차수 헌터, 내가 누군지 알겠어요?”

“…모르겠습니다.”

“그래? 그럴 수 있죠.”

사내는 어느새 맞은편 침대에 걸터앉은 채였다. 품을 뒤지는 모양새가 담배를 찾는 것 같았다.

‘나한테 억하심정이 있는 건 아닌가 보군.’

한차수는 차분히 숨을 골랐다. 얼어붙은 시트가 손끝에서 바스락거렸다.

‘그럼 도대체 왜 날 데려온 걸까.’

자신을 마주 보는 사내를, 한차수는 똑같이 바라보았다.

날카로운 눈매와 새까만 눈 그늘 때문일까. 담배를 빼 문 모습은 자못 사나웠다. 그것도 아니면 살이 없어 움푹 들어간 뺨 때문일 수도 있겠다.

그런데 무섭기는커녕 어딘가 친숙했다. 이유를 찾던 한차수는 탄성을 삼켰다.

‘그 포스터.’

이전 세상에서 보았던, 무너진 지붕 아래 반쯤 찢긴 포스터에 담겨 있던 사내.

그에게서 느꼈던 거칠고 뒤틀린 느낌이 사내에게서도 풍겼다.

“그럼 자기가 여기 왜 온 건지도 모르겠네.”

정신을 차리자 사내의 얼굴이 가까이 있었다. 지독한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정장보다는 가죽 재킷이 어울릴 것 같군.’

무심코 포스터를 떠올리며 고개를 돌렸다. 확실히 사내에겐 공무원보다는 무대가 걸맞았다.

“이봐요, 한차수 헌터.”

사내가 재차 부름에도 눈을 마주칠 수가 없었다. 부조화에 웃음이 나올 것 같아서.

그래서 눈을 돌리는데…. 그게 보였다. 순전히 우연이었다.

사내의 왼쪽 팔뚝, 걷히다 만 소매 아래에 하얀 비늘이 돋아나 있었다.

“아.”

깨달음이 파도처럼 머리를 후려쳤다. 어쩐지 묘하게 낯익다 했더니. 입술을 타고 작은 헛웃음이 흘렀다.

각성자 관리국 제1본부 위기 관리실 실장, 기태연.

그는 작중에서 정이흔과 라이벌 구도를 형성하는 존재였다.

주된 능력은 ‘동결’, 대외적인 헌터 등급은 A급.

더불어 외견과 달리 나름대로 능력 있는 공무원이셨다.

기태연이 이쪽을 건너다보며 툭 내뱉었다.

“생각보다 태평한 성격인가 보네.”

“…….”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르는데 말이죠.”

읊조리는 목소리는 건조했으나 내용은 무거웠다. 반쯤은 협박이 섞인 말이었다. 그러다가 정말 쇠고랑 차게 될지도 모른다는.

하지만 한차수는 전혀 겁나지 않았다. 어떻게 된 건지 상황 파악이 끝났으니까.

“고작해야 거래소 주위에 있었다는 걸로는 절 잡아 놓을 수 없으실 텐데요.”

기태연이 담배를 돌리다 말고 눈썹을 치켜들었다.

“가면은 연기를 막고자 쓰고 있던 거고, 유리를 깬 건 출구를 뚫기 위함이었습니다. 제 뒤로 다른 사람들도 몇 명 나왔을 텐데요.”

거래소에는 일반인 직원들도 있었다. 그들 중 몇 명이라도 자신이 깨고 나간 길을 이용했겠지.

아니나 다를까, 사내는 대번에 실망한 기색이었다.

협박거리를 잃은 게 그리도 슬픈 건가. 한차수는 사내를 티 안 나게 노려보았다.

“지금이라도 한차수 헌터가 작당했다고 말해 주면 알아서 잘 손질해 줄게요.”

공무원이 푸른 눈을 느리게 깜빡이며 양형 거래를 제안했다. 무죄인 입장에선 어처구니가 없었다.

“남의 죄를 덮어쓰고 감옥에 갈 만큼 선량한 사람은 아닙니다.”

“남의 앞을 막아설 만큼은 선량하다던데.”

천령 길드 애들 말로는, 그렇다고요. 기태연이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한차수의 눈매가 좁아졌다. 다 알면서 왜 붙들어 뒀나 싶어서다.

“제 잘못은 없으니 이만 돌아가고 싶습니다만.”

“아, 그건 불가.”

“예?”

기어이 담배에 불을 붙인 기태연이 희미한 미소를 흘렸다.

“불규칙 게이트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한차수 헌터의 증언은 듣지 못했잖아요.”

“그건 금명결 길드장이 알려 주신 걸로 압니다.”

“아냐, 아냐. 사건에는 여러 관점이 필요하지. 우린 당신이 본 게 궁금해요, 한차수 헌터.”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기세가 피부를 찔렀다.

쩌적 하고 얼어붙는 소리와 함께 냉기가 올라오는 바닥.

슬쩍 고개를 내리니 한기가 풀풀 올라오고 있었다. 그걸로도 모자라 문이 통째로 얼어붙는 게 보였다.

‘아무래도 쉽게 보내 줄 것 같지는 않군.’

기태연이 가볍게 웃으며 손을 털었다. 떨어져 내린 담뱃재를 얼음이 통째로 집어삼켰다.

“그리고 서리거인 던전에서도 무슨 일이 있었는지 궁금하고.”

우리 차근차근 서로를 알아 가자고요. 느릿하게 말을 내뱉는 그의 입술이 곡선을 그렸다.

한차수는 그를 빤히 바라보다 낮은 한숨을 토했다.

“안 보내 주실 겁니까?”

“보내 줄 수가 없는 거지. 우린 당신이 필요하다니까.”

“…좋습니다.”

보통 사람이었다면 억울해서 가슴을 치고 매달리기라도 했겠지.

하지만… 나는 아니다.

한차수는 차분하게 스킬 창을 불러왔다.

‘여기서 시도하게 될 줄은 몰랐는데.’

어쩔 수 없지. 무고한 시민을 붙잡고 협박하는 놈은 당해도 싸다.

스킬 창을 응시하던 그가 조용히 속으로 뇌까렸다.

[ 재생 스킬 비활성화 ]

[ 주의! 패시브 스킬은 일정 시간 뒤 자동으로 재활성화됩니다. ]

[ 스킬 ‘재생’을 비활성화하시겠습니까? ]

고개를 끄덕임과 동시에 새파란 창이 허공을 뒤덮었다.

[ 스킬 ‘재생’을 비활성화합니다. ]

[ 경고! 회복 계열 스킬의 중단은 신체에 악영향을 끼칩니다. 시간을 갖고 신중히 고려하세요. ]

[ 상태 이상 ‘중독’에 걸렸습니다! ]

[ 중독 수치가 상승합니다. ]

.

.

.

[ 현재 중독 수치 ▶ 44% ]

[ 체력이 빠르게 떨어집니다. ]

[ 체력이 빠르게 떨어집니다. ]

[ 체력이 빠르게 떨어집니다. ]

[ 상태 이상 ‘각혈’에 걸렸습니다! ]

시야를 뒤덮는 메시지 창.

그리고 한차수는 피를 토하며 쓰러졌다.

“쿨럭, 컥…. 허억!”

“이게 무슨, 한차수 헌터! 정신 차려요! 이봐! 젠장, 우저근. 어디 있어!”

“실장…. 이런.”

“구경 났어? 가서 힐러들 불러와! 치료 가능한 애들은 싹 다 오라고 해!”

누군가를 향해 악쓰는 기태연을 바라보며, 한차수는 희미하게 웃었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마지막 창이 시야를 밝혔다.

[ 패시브 스킬이 재활성화됩니다. ]

[ 스킬 ‘재생’이 활성화되었습니다. ]

“눈 감지 말아 봐, 좀! 그렇게 아련하게 웃지도 말고!”

그러게 누가 결백한 사람을 그렇게 겁박하라고 했나.

기태연의 비명을 들으며 한차수는 마음 편히 눈을 감았다.

***

그리고 기태연은 충격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한차수 헌터!”

축 늘어진 몸을 꽉 붙들었다. 그러나 창백한 얼굴은 도통 눈 뜰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정신 좀 차려 봐요, 이봐.”

“으….”

그의 행동은 오히려 반대의 효과를 낳았다. 어깨를 붙들고 아주 살짝 흔들었을 뿐인데.

“커헉.”

입 안에 고여 있던 핏물이 왈칵 튀어나왔다. 기태연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한차수를 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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