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화
“72번 감정서 여기 있습니다. 확인하시고 잘못된 점 있으면 지금 말하세요.”
특수 코팅된 종이를 바라보는 한차수의 시선은 착잡했다. 감정서 값을 지불한 그는 터덜터덜 1층 직행 엘리베이터를 탔다.
-내려갑니다.
기계적인 목소리와 함께 몸이 쑥 꺼지는 느낌이 들었다. 유리 벽에 기댄 채 밖을 보자 땅이 점점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도망치면 잡힐 테지.’
가능하면 이대로 창문을 깨고 사라지고 싶었다. 물론 그러자마자 바로 잡힐 테지만.
“후우.”
1층이 가까워졌다. 곧 눈에 넣기도 싫은 S급들을 만나야 한다는 소리.
한차수는 유리에 비친 자신을 보며 머리를 쓸어 넘겼다. 단정한 이마 아래, 회색 눈동자가 침착하게 빛났다.
‘뭐가 됐든 정신만 붙잡고 있으면 된다. 당황하는 기색을 내보이면 그 길로 패배 선언을 하는 거나 다름없어.’
저주받은 망령의 귀걸이가 1%도 안 되는 확률을 뚫은 건 제 탓이 아니었다.
금명결이 그걸 가지기로 결정한 이상 아이템 감정은 피할 수 없는 수순이었으니까.
언제가 됐든 결국 밝혀졌을 정보. 그렇다면 휘둘리지 말고 다음 행보를 생각하는 게 옳다.
‘제일 큰 문제는 역시 귀걸이가 귀속 아이템이라는 건데.’
자신이 읽은 내용 중에 귀속 아이템을 해제하는 내용이 있었던가?
천천히 머릿속을 되짚는 가운데 진동이 느껴졌다. 발신인은 금명결과 정이흔. 둘 다 급한 일이 생겨 먼저 자리를 뜬다는 내용이었다.
‘운이 좋군.’
한차수는 행복한 마음으로 금명결에게 답장했다.
[천천히 볼일 보고 오시길 바라겠습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부디 아주 오래 걸렸으면 좋겠다. 그동안 귀걸이를 넘기는 방법에 대해 알아봐야 하니까.
정이흔에게도 대충 비슷한 내용을 보냈다. 그랬더니 무슨 뜻인지 알 수 없는 답장이 도착했다.
[한차수 씨, 사람을 보냈으니 헷갈려서 다른 쪽으로 가면 안 됩니다.]
이게 무슨 이야기일까. 정이흔에게서 온 메시지를 다시 읽을 때였다.
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쩌렁쩌렁한 고음이 순식간에 고막에 박혔다.
“저기다!”
“가서 신병 확보해!”
“와아아, 까마귀를 보호해라!”
“미친 새끼들 아냐, 이거?”
“아, 씹. 누가 안개 풀었어! 고석진, 너지?!”
“천령 애들 쓰러진다아! 얘들아, 가서 까마귀부터 모셔라!”
…저것들 이야기였군.
활짝 열린 엘리베이터 문 너머. 시커먼 헌터 떼가 먹구름을 몰고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아무래도 빌어먹을 S급들이 바쁘다고 길드원들을 대신 놓고 간 모양이었다.
“거기 가만히 계시오!”
선두에 선 건 검은 두루마기의 사내. 긴 남색 머리카락이 옷자락과 함께 바람에 휘날렸다.
“까마귀 청년!”
설마, 저게 날 부르는 건가.
한차수는 무심한 얼굴로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안타깝게도 그보다 사내의 발이 더 빨랐다.
두루마기 사내가 엘리베이터 문턱을 밟은 순간이었다.
“까마귀 청년, 우리가…. 큭!”
“어딜!”
어디선가 나타난 주황 머리 여인이 사내를 벽에 처박아 버렸다. 한차수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었다.
그런데 날아간 곳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타닥, 탁! 불똥 튀는 소리가 들리더니 형광등이 일제히 점멸했다.
후우웅-
덕분에 엘리베이터도 함께 나가 버렸다.
“…….”
가지가지 한다.
한차수는 닫힘 버튼을 누르던 손을 떼고 한숨을 내쉬었다. 1층을 가득 메운 안개가 코앞까지 다가왔다.
멀리서는 아직도 쇠붙이들이 부딪히는 소리가 났다.
‘녀석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런 놈들을 보낸 거지?’
상식적으로 봤을 때 싸우라고 보낸 건 아닐 터였다. 하지만 적어도 이런 사태가 일어날 거라는 예견 정도는 해야 하는 거 아닐까.
천천히 벽을 더듬는데 불쑥 누군가 앞에 나타났다.
“괜찮으십니까? 길드장님 대신 모시러 왔습니다!”
짧은 단발이 경쾌한 느낌의 여성이었다. 주황색의 머리카락이 안개 속에서 선연했다.
머리를 뒤져 봤지만 원작에서는 보지 못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정체를 추리할 법한 단서는 있었다.
‘길드장 대신 왔다고 했지.’
마스터가 아닌 걸로 봐선 이쪽이 천령 길드인가 보군.
금명결은 모친의 영향인지 길드장이라는 말 대신 마스터를 고집했다.
“일단 몸을 피하시죠. 저쪽으로 가시면….”
여성이 손을 내밀었다. 오랫동안 무기를 잡아 굳은살이 박인 단단한 손.
한차수는 그 손을 잡는 대신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는 금명결과 정이흔 둘 중 누구도 선택할 생각이 없었다.
‘한쪽에 몸을 의탁했다간 다른 한쪽이 덤벼들 테지.’
이 난장판 속에서 새로운 형태의 인질이 되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러니.
한차수는 손을 들어 그녀의 뒤를 가리켰다.
“조심하십시오.”
그러자 동그란 눈이 사나워지더니 재빠르게 몸이 돌아갔다.
“악!”
완벽한 뒤돌려 차기였다. 소리 없이 다가온 두루마기 사내는 말끔히 걷어차였다.
포물선으로 나가떨어지는 그를 보며 여성이 소리를 질렀다.
“사이비 도사 새끼! 저리 꺼져!”
“그대는 비키시오! 까마귀 청년, 소생이 데리러 왔소. 이쪽으로 오시오!”
사내는 벌떡 일어나더니 이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창백한 얼굴 위로 피가 주룩 흘렀다.
미친놈 소굴이었다.
한차수는 대답 대신 겉옷을 벗어 주먹을 감쌌다. 사위가 어두워서 꼼꼼히는 못 하고 대충 많이 둘렀다.
“우리 VIP한테서 떨어져!”
“윽! 자네는 도대체 뭘 먹고 이렇게 사나운 건가? 호랑이를 삼키기라도 했나!”
두 사람은 저들끼리 싸우느라 정신이 팔렸다. 한차수는 쓱 주변을 훑었다.
“이 자식들 아까부터 협잡질이네, 야 정정당당하게 싸워!”
“먼저 시작한 건 너네잖아!”
싸움은 가면 갈수록 난타전의 양상을 띠었다. 이상할 정도로 과열된 열기.
이젠 저들끼리 싸우느라 이쪽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꺼림칙하지만, 내게 나쁜 상황은 아니지.’
엘리베이터 구석에 몸을 숨긴 그는 물약을 들이켰다.
[ 신체 강화 포션(10분)을 복용했습니다. ]
[ 10분간 근력을 포함한 신체적 능력이 향상됩니다. ]
몸이 부쩍 가벼워진 느낌. 머리를 한 번 털어 내고, 한차수는 유리창 가장자리에 붙었다.
옷으로 감싼 손에는 어느샌가 단검이 들려 있었다. 회빛 눈이 유리벽 너머를 살폈다.
다행히 지나가는 사람은 없었다.
한차수는 그대로 힘을 줘 가장자리를 내리찍었다.
쿵, 쩌저적….
유리창에 금이 가는 소리. 하지만 고함 소리와 새까만 안개에 묻혀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한차수는 금이 간 유리창을 툭 건드렸다. 후드득. 덩어리진 유리 조각들이 바닥을 덮었다.
‘깔끔하게 됐군.’
한차수는 안개가 흩어지기 전 조용히 스킬을 시전했다.
[ 존재감 희석(A) ]
[ 소리 없는 발걸음(B) ]
[ 경고! ]
[ 위장 신분에 부합하지 않는 행동에는 페널티가 부과됩니다! ]
“으윽…. 큭!”
젠장, 신체 강화 물약을 먹어도 이 지랄이라 이거지.
머리가 쪼개지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겨우 정신을 차린 한차수가 조심스레 밖으로 몸을 빼냈다.
‘체력 물약을 미리 꺼내 놓을 걸 그랬나….’
생각보다 통증이 심했다. 하지만 버티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좋아. 일단 최악은 피했군.’
골목 그림자 속에 무사히 몸을 숨겼다. 한차수는 재빨리 스킬을 해제했다.
그가 안도의 한숨을 내쉰 순간이었다.
“이건 또 뭐야.”
낮은 속삭임이 귓가를 스치고 거센 충격이 뒷목을 강타했다.
한차수는 순식간에 몸의 통제권을 잃었다.
“……!”
실 끊긴 인형처럼 사지가 축 늘어졌다. 버둥거릴 새도 없이 누군가 뒷목을 잡아챘다.
“웃긴 걸 쓰고 있네.”
“일행일까요?”
“모르지. 일당이거나, 피해자거나. 아니면 그냥 수상한 놈이거나. 어쨌든 잡았으니 됐어.”
고막을 파고드는 냉소 섞인 목소리.
“우저근.”
“예.”
“구경하지 말고 들어가서 나머지 놈들 다 잡아들여.”
우르르 사람들이 몰려가는 소리와 함께 숨통이 조였다. 한차수는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천령 길드 소속 A급 헌터 선희다는 진심으로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내가 어쩌다가 이런 처지가 된 거지.’
나는 분명 길드장의 부탁을 받고 VIP를 데리러 왔을 뿐인데…!
“체포에 불응한다면 즉시 발포하겠습니다. 무기 버리고 두 손 머리 위로 드세요.”
눈 깜짝할 사이에 안개를 헤치고 나타난 건 각성자 관리국 우저근 팀장. 그리고 그를 위시한 수십의 정장 무리였다.
“투항하십시오, 선희다 헌터. 그리고 남세우 헌터.”
그들은 순식간에 전투에 지친 길드원들을 제압했고, 남은 건 둘뿐이었다.
“예에….”
선희다가 지친 얼굴로 두 손을 드는데, 남세우가 입을 열었다.
“우 팀장.”
“예.”
“우리는 피해자라오. 저들이 갑자기 회까닥해서 우리를 공격했소.”
“그렇습니까.”
“뭐? 잠깐만, 야, 말은 똑바로 해. 먼저 뒤통수친 건 너희잖아!”
대낮에 도심에서 싸움판을 벌여 봤자 좋을 거 없다는 건 F급 헌터도 아는 일이었다.
그래서 선희다는 엑실리스의 도발에 넘어가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아 문제가 터져 버렸다. 엑실리스 측의 누군가가 갑자기 천령 길드원을 공격했으니까.
“이게 미쳤나!”
“야, 잡아!”
그렇게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커져 갔다. 선희다도 처음엔 그들을 통제하려 애썼지만 소용없었다.
“사이비, 사이비 했더니 이게 진짜 사이비가 됐나. 먼저 공격한 게 누군…. 악, 머리야.”
갑작스러운 고통이 머리를 파고들었다. 왜 이러지? 입술을 꽉 깨무는 찰나.
강렬한 깨달음이 고통을 뚫고 계시처럼 솟아올랐다.
“잠깐.”
“?”
“V, VIP. 우리 VIP 어디 있어.”
선희다와 남세우의 얼굴이 동시에 새파랗게 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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