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화
한차수가 문을 닫고 나간 뒤, 두 길드장은 카페테리아로 내려왔다. 딱히 감정소에 깔린 헌터들을 의식해서는 아니고.
“바쁘시다고 들었습니다만.”
“본인은 안 그런 척하네?”
정이흔은 금명결을 한차수로부터 떼어 두기 위해.
“지금이라도 달려가지 않으면 비행기가 떠 버릴 텐데요, 금명결 길드장님.”
“내 비행 스케줄은 알면서 그게 전용기라는 건 모르는구나. 생각보다 쓸모 있는 정보원은 아닌가 봐.”
그리고 금명결은 한차수가 없는 사이 정이흔 속이나 긁으려고 그냥 따라 내려왔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금명결이 손에 턱을 괴었다.
“위기감을 느끼나 보군. 날 이리도 빨리 쫓아내고 싶어 하는 걸 보면. 한차수 씨 마음이 내게 기울어질까 봐 두렵나?”
“금명결 길드장님.”
정이흔이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으며 잔을 내려놓았다.
“사람이 짐승을 내쫓는 건 경쟁심 때문이 아니라 공동체의 안전을 위해 마땅히 해야 할 일입니다.”
한차수는 내 사람이며, 너는 인간도 아니고 짐승이다. 따라서 나는 내 사람을 지키기 위해 널 내쫓는 거란다.
부드러운 목소리에 담겨 있는 뼈 있는 말에 금명결은 가만히 미소 지었다.
“오….”
“무슨 말 하는지 궁금하다.”
멀리서 그들을 지켜보던 카페테리아 직원들이 저들끼리 속닥였다.
“사이 안 좋다더니 좋아 보이는데.”
그 말처럼 두 남자가 서로 마주 본 채 미소 짓는 모습은 그림 같았다.
한쪽은 국내 1위 길드 천령을 이끄는 정이흔.
그리고 다른 한쪽은 글로벌 순위로 따지면 더 높은 엑실리스의 수장 금명결.
두 사람의 부드러운 카리스마와 압도적인 박력은 외견에서부터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한쪽은 배우, 한쪽은 마피아 같네.”
“그러게. 엑실리스 마스터는 혼혈이라서 그런지 더 그럴싸하다야.”
멀찍이서 소곤거리는 말이지만 S급의 청력에 들리지 않을 리 없었다.
작게 웃은 정이흔이 입가를 가렸다.
“아, 이런. 죄송합니다.”
호선을 그리는 눈매를 본 금명결의 이마에 혈관이 돋았다.
‘여우 같은 놈.’
대외적인 이미지로 보나, 아랫사람에게 하는 태도로 보나. 정이흔은 S급 중에서도 가장 호감을 사는 헌터임이 틀림없었다.
하지만 그와 어깨를 견주는 S급들은 알고 있었다.
정이흔은 마냥 사근사근한 사내가 아니라는 걸.
금명결이 주문한 차를 한 입 마시곤 멀찍이 밀어내며 말했다.
“정이흔 길드장.”
“말씀하세요.”
“내가 한차수 씨 앞에서 좀 가볍게 굴었다지만 거기에 휩쓸릴 생각은 아닐 거라 믿어.”
“그럴 리가요.”
정이흔이 입꼬리를 올리며 말했다.
“금명결 길드장님의 가벼운 호의가 한차수 씨가 가진 아이템을 향하고 있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있을까요.”
“…….”
“가볍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으시면 무겁고 음침한 호의라고 할까요?”
“항상 생각한 건데 내 한국어 실력의 절반은 그쪽 덕분인 것 같아.”
“제자를 둘 생각은 없었지만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그래서 내가 이번에 비서한테 하나 배운 게 있는데, 쓰임새가 맞나 확인해 주면 좋겠군.”
금명결이 씩 웃으며 말했다.
“‘경솔하다’라는 단어인데. 쉬고 싶은 사람을 붙잡고 종신 계약 강요하는 사람한테 쓸 수 있다더군. 맞나?”
“…….”
피 튀기는 설전과 끊임없는 눈싸움이 오가는 가운데. 요란한 전화 벨소리가 카페테리아를 울렸다.
“받으시죠.”
정이흔이 금명결의 핸드폰을 턱짓하며 말했다.
화면을 본 금명결의 미간에 금이 갔다. 그의 표정을 확인한 정이흔은 확신했다.
‘영국이군.’
금명결은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기 직전. 갑자기 공항을 빠져나와 이곳으로 향했다.
사전에 이상한 움직임이 있으면 보고하라 말한 게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오늘, 한차수는 두 번째 납치 시도를 당했을 수도 있으니까.
“한국은 걱정 말고 다녀오셔도 됩니다.”
금명결은 말없이 턱을 쓸었다. 금빛 눈동자가 깊은 빛을 품고 정이흔을 응시했다.
허허실실 웃고 있지만 속은 냉혹한 사내. 정이흔은 그가 무엇을 재고 있는지 알고 있었다.
‘한차수가 가진 아이템을 노릴 만한 인물이 누군지 목록을 짜고 있겠지.’
금명결에게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는 꼭 손에 넣어야 하는 물건이다. 하지만 자신 때문에 한차수를 압박할 수는 없는 상황.
그렇다면 다음 타깃은 예비 구매자들이 될 게 틀림없었다.
금명결처럼 해당 아이템에 눈독을 들일, 저주와 신앙 관련 각성자들.
정이흔도 지금 당장 머릿속에 이름 서너 개를 떠올릴 수 있었다.
금명결은 아마도 그들에게 정보가 흘러 나가지 않도록 통제할 생각이겠지.
자신으로서는 그를 말릴 이유가 없었다.
리스크가 적을수록 좋다는 건 상식. 그리고 통제 가능한 선의 변수는 오히려 약간의 긴장감을 불어넣는다.
무분별한, 인식할 수 없는 수많은 위협 대신 확실하고 통제된 위험.
‘금명결 하나 정도라면 괜찮아.’
한차수는 그가 아이템을 노리는 한 천령 길드에 계속 남을 수밖에 없으리라.
만족스러운 생각을 끊어 낸 건 금명결의 호쾌한 선언이었다.
“차는 잘 마셨어, 천령 길드장.”
고민을 끝낸 걸까. 금명결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돌아오면 마저 이야기하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긴 그가 찻잔을 턱짓했다. 계산하라는 의미였다.
정이흔은 소리 없이 웃으며 고개를 까딱였다.
“별말씀을요.”
차 한 잔 값으로 내쫓을 수 있다면 남는 장사지. 정이흔은 앞으로도 몇 번이고 차를 살 용의가 있었다.
예의상 일어나서 금명결을 배웅하려는데, 요란한 벨소리가 또 한 번 울렸다.
“안 받아?”
“…….”
“내가 알기론 그거 그쪽의 시끄러운 부길드장한테서 걸려 는 전화일 텐데.”
대놓고 비웃은 금명결이 어서 받으라며 눈을 반짝였다. 받기 전까지는 자리를 떠날 태세가 아니었다.
“하….”
결국 한숨을 쉰 정이흔이 통화를 받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고함이 쏟아졌다.
-야, 정이흔! 너 지금 어디야!!
소리를 들은 금명결이 배부른 호랑이처럼 만족스러운 낯을 띠었다.
***
한편, 한차수는 극심한 고뇌 속에 매몰되어 있었다. 벽에 기댄 그의 입에서 연신 한숨이 터져 나왔다.
끔찍하디끔찍한 0.5%의 잭 팟을 터트린 결과였다.
‘이런 행운을 몰아줄 거라면 내가 악역에 빙의할 때 줬어야지.’
신이 진짜로 있다면 허리를 부러트리고 싶을 정도였다. 한차수는 울적한 눈으로 창밖을 보았다.
하늘이 참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이전 세계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청명함.
하지만 더럽혀지지 않은 자연을 즐기기엔 자신의 상황이 참혹했다.
[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 ]
-불길한 신을 모시던 사제가 착용하던 귀걸이. 소유주의 핏물이 말라붙어 있다.
-입수 난이도 : 1급
-저주/신앙 계열 스킬 공격력 증가 (S)
-저주/신앙 계열 마나 회복 속도 향상 (S)
-저주/신앙 계열 특성 능력치 증가 (S)
-등록 가능 소켓 (2/2) : 현재 봉인 중
-커플 아이템 ( 파트너가 등록되지 않았습니다. )
-귀속 아이템 ( 소유주: 한차수 )
재차 확인했지만 역시 달라지는 건 없었다.
한차수는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고 아이템 창을 닫았다.
‘입수 난이도 1급에 S급 스킬이 셋. 거기다 소켓이 두 개나 달렸어.’
가치로만 따지자면 당장 경매장으로 달려가 긴급탈출석과 맞바꿔도 될 정도였다.
아니, 따지자면 누군가에게는 긴급탈출석보다 더 귀한 존재였다. 무려 소켓이 두 개나 달려 있으니까.
소켓은 입수 난이도에 상관없이 아주 희귀한 확률로 발생하는 능력치.
주로 마력을 품은 원석이나 보석 같은 걸 가공해 넣어, 아이템에 추가적인 능력치를 부여한다.
아마 이걸 보고 금명결은 눈이 돌아갔을 거다. 잘만 하면 귀걸이 하나로 아이템 세 개의 효과를 가질 수 있을 테니.
그러니 어떻게 해서든 귀속을 풀어야 한다.
‘죽는 한이… 아니, 죽으면 안 되지.’
어떻게 보전한 목숨인데. 금명결 때문에 날리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복도에서 가능한 한 오래 시간을 때우고, 한차수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겼다.
부디 두 S급이 바쁜 일정으로 인해 돌아갔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한 걸음을 거의 1분 동안 옮기며 발급실에 도착했을 때였다.
“억.”
“…?”
발급실 앞에 있던 안내 직원이 그를 보고 숨을 삼켰다. 한차수가 고개를 기울이자 입을 틀어막기까지 했다.
‘어디 아프기라도 한가.’
그러고 보니 감정사도 자꾸 콜록댄 게 기억났다.
한차수는 감정사가 S급의 위압 때문이 아니라 감기에 걸렸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하긴, 이 건물은 유독 냉방이 잘되는 편이었으니.
“괜찮으십니까?”
“허억… 네, 네!”
그 사이 숨을 갈무리한 직원이 조심스레 물었다.
“…72번이십니까?”
“예. 들어가면 됩니까?”
“아뇨. 아직 앞 번호 손님이 들어가 계십니다. 안쪽에서 부를 때까지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그렇게 느릿느릿 왔건만 아직도 앞 순서가 끝나지 않았다니. 한차수는 한아협의 일처리 속도가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다.
대기표를 확인한 뒤에는 발급실 앞에서 잠시 머물렀다. 생각보다 대기 시간이 길어지는 탓에 한차수는 뉴스를 살피기로 했다.
제 이름이 어딘가에 또 나오지는 않을까, 습관적인 검색이었다.
‘서락산, 서리거인 던전…. 모두 없군. 백선으로 보이는 기사도 없어.’
다행이라 생각하며 휙휙 페이지를 넘기는데 차례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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