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화
너도 놀랐냐, 나도 놀랐다.
이쪽은 소설에 빙의한지라 미처 몰랐다 쳐도, 너는 그러면 안 되지.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가 히든 보스에게서만 드롭된다는 정보를 어디서 얻은 건지는 차치하더라도….
‘제대로 감정도 안 한 아이템의 능력치를 제멋대로 확신하고선 내놓으라 난장판을 벌였다 이 말이야.’
역신의 귀걸이는 입수 난이도 1급의 희귀 아이템. 게다가 성능은 AA급이었다.
즉, 동급의 아이템이 던전에서 드롭되는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수치로 계산한다면 0.5%를 겨우 넘을까.
한차수가 차가운 눈으로 금명결을 응시했다. 서릿발 같은 시선에 금명결은 몸을 움찔했다.
“아니, 내가 너무 급해서….”
할 말이 없네. 소파에 축 늘어지며 금명결이 중얼거렸다.
며칠 전 위풍당당하게 납치 시도를 할 때는 언제고. 참으로 보잘것없는 위용이었다.
한차수가 살며시 그의 앞으로 홍삼 음료를 밀었다.
“병 주고 약 주네, 한차수 씨.”
금명결이 실없이 웃었다. 한차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게 누가 아이템에 눈이 멀어서 앞뒤 가리지 않고 덤벼들라고 했나.
하지만 굳이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다. 이제 곧 볼 일 없는 사이가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었다. 괜히 미운털 박혀 봤자 자신만 손해고.
그게 아니더라도 애초에 원인 제공자는 자신이니까.
‘좀 억울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악역에 빙의한 걸 어쩌겠나. 이미 저질러진 일. 아무리 고달프고 짜증 나더라도 적응하고 사는 수밖에 없었다. 그편이 여러모로 심신에 좋기도 하고.
그사이 금명결은 홍삼 음료 한 병을 다 비워 냈다.
“그럼 거래소 문 닫기 전에 감정부터 하러 가죠.”
1층에서 본 안내문에 의하면 아이템 감정소는 4층이었다.
한차수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자 두 남자가 기다렸다는 듯 따라왔다.
띵!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사람들이 북적였다.
“53번 대기자 이쪽으로 오세요! 계단으로 올라가시고, 최종 감정서는 안에서 안내해 주실 거예요.”
“예.”
7층과는 퍽 다른 분위기였다. 은행과 비슷하다고 해야 할까.
한차수는 대기 번호가 나오는 전광판들을 흘끗 보고 시선을 돌렸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자기 순서를 기다리며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어, 저 사람 그쪽 사람 아니야? 여기 있으면 위험하지 않나.”
“어어, 아냐, 아냐. 거기 이번에 프리올로 들어갔잖아. 이번에 자격증 발부받았더라고.”
“아, 그랬어? 어쩐지 다들 태평하더라니. 또 나만 몰랐네, 나만 몰랐어.”
대부분 감정을 맡기기 위해 온 헌터나 소규모 길드에서 나온 직원들인 듯싶었다.
한차수는 그들의 대화를 흥미롭게 들으며 걸음을 내디뎠다.
안타깝게도 뒤에 따라붙은 S급들 때문에 더 이상의 귀동냥은 어렵게 되었지만.
“근데 한…, 아니 그쪽 그거 계속 쓰고 있어야 돼?”
“제가 편합니다.”
“어어, 그렇구나.”
오늘 쓴 가면은 새 부리가 달린 검은 가면이었다. 눈 안쪽에 검은 천이 덧대진 게 마음에 들었다.
“오.”
“와.”
“우왁, 뜨거워!”
S급들을 봐서 놀란 모양이다.
한차수는 허벅지에 커피를 흘린 사람을 안타까운 눈으로 보고 대기표를 뽑으러 갔다.
그 뒤로도 한참이나 얼떨떨한 시선이 오갔다. 보기 힘든 S급 둘을 한꺼번에 봐서 놀란 눈치였다.
그게 딱히 거북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이놈들이지.
“정이흔 길드장은 안 바쁜가? 추수꾼들이 되게 만나고 싶어 하던데.”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지만 얼마 전 건물이 불에 탄 엑실리스만 할까요? 괜찮으시면 화염계 헌터를 당분간 파견해 드릴 수 있습니다.”
“야, 너 진짜 말 한마디를 안 지는구나.”
“저희가 지금 싸우고 있는 거였습니까?”
입 좀 다물어라.
보기 힘든 S급들이면 뭐 하는가. 사람 창피한 줄도 모르고 이렇게 싸워 대는데.
한차수가 흘끗 고개를 돌려 금명결을 노려보았다. 하여튼 저 녀석이 문제였다. 가만히 있는 정이흔한테 시비는 왜 거는 건지.
시선이 마주치자 금명결이 눈을 찡긋거렸다.
“하아….”
한숨과 함께 한차수는 가차 없이 고개를 원위치시켰다.
그냥 없는 셈 쳐야겠다. 그게 아니라면 말 안 듣는 대원 하나 데리고 다닌다 치지, 뭐.
다행히도 눈치는 있는지, 두 S급들은 대기하는 동안 더 이상 말싸움을 벌이지 않았다.
“72번 대기자 이쪽으로 오세요!”
그렇게 제 차례가 돌아왔다. 한차수는 감정사가 기다리고 있는 작은 사무실로 들어섰다.
썩 내키진 않았지만 뒤에 시커먼 두 사내를 데리고.
“72번 대기…. 어억, 컥. 아,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
“음, 으음…. 일단 여기에 성함이랑 헌터 자격증 고유 번호 써 주시면 되고요.”
쓱 하고 서류를 내미는 감정사의 시선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한차수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감정사를 이해했다.
S급 둘이 왜 여기 있는지. 저 사람들과 함께 온 나는 뭐 하는 인간인지 궁금하겠지.
하지만 가면을 벗기에 앞서 확인할 게 있었다.
“개인정보는 모두 보호되는 게 맞습니까?”
“예, 아, 네! 비밀 유지 조항은 아래에 있으니까 읽어 보시면 돼요.”
한차수는 재빨리 조항들을 확인했다. 감정사에서 고객의 신상 정보를 함부로 유출할 수 없다는 내용이 있었다.
만약 감정사가 의도로 고객 정보를 유출할 시에 생기는 페널티도 적혀 있었다.
한국에서 제일가는 거래 협회라더니, 이름에 걸맞게 꽤나 강력한 보호 조항이었다.
‘좋아.’
한차수는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가면을 벗었다. 앞에서 헉하는 소리가 들려 확인하니 감정사가 손사래를 치고 있었다.
“죄, 죄송해요. 사레가 들려서…!”
“괜찮습니다.”
전투계도 아닌 사무직 각성자. S급을 이렇게 가까이서 만날 기회는 없는 게 당연했다. 위압감에 놀라는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한차수는 감정사를 위해 빠르게 기입을 끝냈다.
“아이템은 여기에 올려놓으시면 돼요.”
“귀속이라서요.”
“아, 그렇네요. 그럼 신체 접촉에 동의하시는 거죠?”
“예.”
감정사의 손이 귀걸이를 덮었다. 겹쳐진 손 사이로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다.
“제가 끝났다고 말씀드릴 때까지 움직이시면 안 됩니다.”
우웅-
감정사의 눈 주위로 흰 빛무리가 어렸다. 한차수는 흥미로운 얼굴로 감정 과정을 구경했다.
“……?”
그런데 시간이 좀 오래 걸리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은 5분도 안 돼서 나오던데. 어째선지 10분이 지나도록 감정사의 손은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감정사님.”
“쉿! 조용히 하세요.”
감정사의 이마엔 땀이 한가득 맺혀 있었다. 그뿐이랴. 눈가에서는 흰빛이 빙글빙글 어지러이 돌았다.
이렇게까지 일에 열심일 줄이야. 퇴사가 인생의 목표인 자신과는 참 다른 인물이었다. 한차수는 작게 감탄했다.
“이건…!”
“음?”
감정사가 고개를 확 치켜들었다. 동시에 귀걸이를 든 손이 꽉 붙들렸다.
“한차수 고객님.”
왜 그런 목소리로 나를 부르는 거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척추를 직격했다.
“축하드립니다. 입수 난이도 1급, 심지어 소켓이 두 개나 달린 S급 능력치 아이템이에요!”
그와 동시에 눈앞에 아이템 창이 떠올랐다.
[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 ]
-불길한 신을 모시던 사제가 착용하던 귀걸이. 소유주의 핏물이 말라붙어 있다.
-입수 난이도 : 1급
-저주/신앙 계열 스킬 공격력 증가 (S)
-저주/신앙 계열 마나 회복 속도 향상 (S)
-저주/신앙 계열 특성 능력치 증가 (S)
-등록 가능 소켓 (2/2) : 현재 봉인 중
-커플 아이템 ( 파트너가 등록되지 않았습니다. )
-귀속 아이템 ( 소유주: 한차수 )
아….
‘X됐다.’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
감정이 끝나고, 감정사는 산뜻한 얼굴로 왼쪽 문을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서 대기하시면 곧 최종 감정서 나올 거예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를 붙잡은 건 당연하게도 금명결이었다.
“같이 가자.”
금빛 눈동자가 열기에 달아올라 있었다. 희번덕거리는 게 대놓고 미친놈이었다.
“안 됩니다.”
부리 달린 가면을 뒤집어쓰자 금명결이 매달려 오기 시작했다. 어린애도 아니고 떼쓰는 솜씨가 수준급이었다.
“아, 같이 가자. 어차피 이제 알 거 다 아는 사이인데 뭘 그리 빼?”
아이템 감정 결과를 알게 되었다는 말을 이렇게 하다니.
외국에서 살다 와서 그런가. 단어 선택이 참으로 참신했다.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리는데, 뒤에서 꺅 소리가 났다.
‘이런.’
감정사를 잊고 있었다. 고개를 돌리자 책상에 이마를 박고 있는 게 아닌가.
금명결이 기운을 흩뿌리자 더는 버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안 되겠다 싶어 한차수는 정이흔에게 부탁했다.
“부탁드립니다, 길드장님. 다녀오는 동안 다른 곳에서 기다려 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금명결을 떼 놓을 생각은 이미 날아가고 없었다. 대놓고 저주 계열 S급이 떴는데 뭘 어쩌겠는가.
그래도 일단 사람은 살리고 봐야지.
한차수는 감정사의 앞에 물컵을 밀어 놓고 쪽문으로 향했다.
정이흔이 금명결의 뒷덜미를 붙잡고서 상큼하게 웃었다.
“걱정 마세요. 말을 안 들으면 묶어서라도 데리고 있겠습니다.”
“뭐? 정이흔 길드장 취향이 이상하네. 태우는 것도 좋아하더니 이제는 사람도 묶…. 아! 이게 얼마짜리 옷인 줄 알아?”
“다녀오세요.”
거의 맹수를 조련하는 조련사 같은 느낌이었다. 잘 부탁한다는 눈빛을 마지막으로 한차수는 두 사람을 뒤로했다.
달칵.
그리고 문이 닫히자마자 탄식했다.
“미치겠네.”
0.5%의 확률을 뚫고 잭팟이 터져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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