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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역인데 퇴사하면 안 될까-25화 (25/113)

25화

금명결이 귀걸이를 포기하지 않으리란 건 진작에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솔직히 말하자면 모르는 게 이상할 정도지.’

욕심이 없다면 왜 계속 길드원들을 통해 뇌물을 갖다 바쳤겠는가.

바보가 아닌 이상 금명결의 관심이 식지 않았다는 걸 모를 수 없었다.

그러니 여기까지 튀어온 게 아니겠나.

“미행이라도 붙이셨습니까?”

“한차수 씨, 내가 그렇게 한가한 사람으로 보여? 사람 보는 눈이 좋은걸. 우리 길드 인재팀으로 채용해야겠어.”

미친 소리에는 참 끝이 없다. 한차수가 질린다는 눈으로 보자 금명결이 씩 웃었다.

그의 손이 거래소 문패를 가리켰다.

“사람을 스토커처럼 보네. 당신이 아니라 거래소마다 붙여 뒀어요. 한차수 씨 나타나면 바로 나한테 알리라고.”

“하.”

“혹시라도 한차수 씨가 내가 준 백숙만 홀랑 먹고 다른 사람이랑 귀걸이 나눠 끼면 어떻게 해. 나는 손해 보는 짓은 안 한다고 유명한데, 까딱하다간 놀림거리가 되잖아.”

당당하다 못해 책임지라는 듯한 태도에 한차수는 할 말을 잃었다.

부리나케 달려왔길래 자신에게 미행을 붙인 줄 알았더니, 아예 거래소마다 인력을 배치했다고?

‘아주 대놓고 경고장을 날린 셈이로군.’

앞으로는 다른 거래소에 간다 하더라도 귀걸이를 공유할 사람을 찾을 수는 없으리라.

애초에 그럴 생각도 없었지만, 어이없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한차수는 싱긋 웃고 있는 금명결을 위아래로 흘겼다.

‘확실히 머리가 잘 돌아가는 놈이긴 해.’

제게 직접 미행을 붙였다면 바로 꼬투리를 잡았을 텐데. 금명결을 바라보는 한차수의 눈이 가늘어졌다.

‘원작에서도 좋은 집안 출신이라고 했던가.’

하긴 그러니까 정이흔과 달리 한국에 별 기반이 없는 상태에서 길드를 꾸릴 수 있었을 테다.

아마도 부모 중 한쪽만 한국인이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한차수가 흐릿한 기억을 더듬어 금명결에 대해 떠올려 보던 참이었다.

“아, 여기 계속 서 있다가는 재수 없어질 것 같아. 우리 저쪽으로 갑시다. 가서 마저 이야기하자고.”

금명결이 어깨를 덥석 붙들더니 복도 반대쪽을 가리켰다.

통창 아래로 펼쳐지는 탁 트인 도시 정경을 즐길 수 있는 작은 라운지였다.

푹신한 소파에 엉덩이를 붙이자마자 금명결이 자연스레 음료수병을 내밀었다.

“목 좀 축여요.”

음료수병에는 인삼이 크게 그려져 있었다.

‘몸에는 좋겠군.’

유리 몸인 제 상태를 의식한 건가. 한차수는 가볍게 감사 인사를 건네고 뚜껑을 땄다.

그리고 바로 후회했다.

“윽.”

이 정도면 암살 시도라고 쳐도 되지 않을까?

한차수는 음료수를 병째로 금명결에게 집어 던지고 싶은 걸 참고 다시 뚜껑을 닫았다.

“냄새는 그렇지만 마셔 보면 괜찮을….”

“됐습니다. 음료수 하나로 이야기가 달라지는 것도 아니고.”

멀찍이 음료수병을 밀어내며 한차수가 말했다.

“걱정하시는 것부터 말씀드리자면, 매칭 상대를 알아보려고 거래소에 온 건 아닙니다.”

“뭐, 그건…….”

“이미 따로 알아보셨겠죠. 거래소마다 사람을 보내 놓으신 분이니까.”

금명결이 싱긋 눈을 접어 웃었다.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그에게서 강자의 여유가 풍겨 나왔다.

예상대로군.

한차수는 담담한 얼굴로 그를 마주 보았다.

“그렇게 염려하지 않으셔도 귀걸이를 경매나 거래에 내놓을 생각은 없습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귀걸이를 나누어 낄 자격을 내놓는 거지만 그게 그거였다.

한차수가 눈으로 라운지 바를 훑으며 이어 말했다.

“애초에 커플 아이템은 매칭이 성사되는 일도 거의 없으니 마음 내려놓으셔도 될 텐데요.”

“내 마음이 평화로워지려면 한차수 씨가 집 안에 있어야 해서.”

“…….”

“지금도 심장이 두근거리네. 가까이에 거래소가 있어서 그런가.”

끼익. 몸을 기울이며 중얼거리는 눈빛이 무척이나 위험했다. 한차수는 설핏 미간을 찌푸렸다.

‘생각보다 심한걸.’

역신의 귀걸이 대체품을 찾는 마음은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도가 좀 심했다. 마치 그에게 남은 선택지가 이것밖에 없는 것처럼.

‘잠깐, 뭔가 이상하지 않나?’

한차수가 신중한 얼굴로 생각에 잠길 때였다.

띵동, 명쾌한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륵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거래소에 방문한 사람이겠거니 생각한 한차수는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목소리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아, 젠장.”

금명결의 낯이 와그작 일그러졌다. 한차수가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길드장님?”

“한차수 씨, 대신 설명 좀 해 줄래? 나 이번엔 진짜 대화만 하러 찾아온 거라고.”

금명결의 시선은 이쪽을 향해 있지 않았다. 한차수가 그를 따라 고개를 돌리려던 순간.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한차수 씨.”

“…….”

“몸은 괜찮나요?”

오싹 소름이 돋았다. 반사적으로 고개를 틀자 사내의 다정한 낯이 보였다.

정이흔이었다.

***

도대체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한차수는 커피를 마시며 고민했다. 이걸로 벌써 세 잔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홍삼을 제외하면 마실 게 없었으니까.

아니, 이게 문제가 아니지.

“정말 믿을 수가 없습니다. 한 길드의 수장이라는 분이 거래소에서 감히 납치극을 벌이려 하다니.”

“아, 진짜. 납치 아냐! 내가 미쳤다고 거래소에서 그런 짓을 하겠어? 아무 짓도 안 했다고!”

“그럼 뭡니까. 아, 수작질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게 아니면 사기극?”

나는 분명 장비 아이템을 사러 왔을 뿐인데.

어쩌다 이 둘이 나를 사이에 두고 설전을 벌이고 있는 걸까.

진지한 얼굴로 고민하는데 금명결이 별안간 자신을 불러 댔다.

“허어…! 한차수 씨, 방금 이 사람이 말한 거 들었지? 수작이래, 수작.”

“…….”

“응? 뭐라고 대답 좀 해 봐.”

싫다. 여기서 대답하는 순간 참전 의사를 밝히는 거나 다름없으니.

모르는 척 고개를 돌리자 금명결의 입술이 비틀렸다.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금명결이 뭐라 하기도 전에 정이흔이 선수를 쳤다.

“그럼 솔직히 묻죠. 한차수 씨를 회유하러 오신 게 아니라면 왜 여기까지 오셨습니까.”

당연히 그 이유 말고는 없었다. 금명결은 침묵했고, 한차수는 감탄했다.

그래도 꼴에 길드장이라고 자신을 지켜 주는 게 그럴싸해서였다.

‘악역에 빙의한 것만 아니었으면 천령 길드에 뼈를 묻어도 좋았겠어.’

한차수가 아니라 백선에 빙의하기만 했어도 좋았을 텐데. 씁쓸함에 혀를 차는데 금명결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 바빠서 이만 가야겠다.”

“금명결 길드장.”

“이 얘기는 나중에 하자고. 어차피 우리 조만간 회동을 가져야 하잖아? 그 뭐냐, 제주도 게이트에서 드롭된 수정. 그거 감정 곧 끝나 간대.”

금명결이 싱긋 웃으며 대화의 맥을 끊었다. 손목을 내려다보며 시간을 확인하는 게 제법 바빠 보였다.

“그럼 다음에….”

“앉으시죠.”

“응?”

한차수가 목소리를 낸 건 그 순간이었다. 금명결이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 정이흔 또한 마찬가지였다.

“한차수 씨? 왜….”

돌아본 한차수의 얼굴은 차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눈동자는 그와 달리 뜨거웠다.

‘어쩌면 이 녀석을 떼어 놓을 수 있을지 모른다.’

방금 전, 금명결의 말을 통해 그는 한 가지 힌트를 얻었다.

귀걸이를 향한 금명결의 집착을 끊어 놓을 수 있는 힌트를 말이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다시 앉으세요.”

왔을 땐 네 맘대로지만 갈 때는 아니란다.

한차수의 태도에 두 S급들은 전에 없이 당황했다.

“한차수 씨, 괜찮습니까? 체력적으로 힘들 텐데.”

“어어, 나도 바쁘거든. 나중에 편한 데서 이야기하자.”

“아뇨.”

딱 잘라 거절하며 한차수가 소파를 가리켰다.

“앉으세요.”

“…….”

“나중에 또 이야기할 필요 있습니까? 오늘 끝냅시다.”

이왕 이렇게 만난 거, 오늘 종지부를 찍자.

돌변한 태도에 금명결이 눈을 깜빡였다. 정이흔도 마찬가지였다.

곁에서 안절부절못하는 호구를 무시하며, 한차수가 금명결을 불렀다.

“금명결 길드장님.”

“어? 응? 왜?”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를 꼭 가져야 하시는 이유가 뭐였죠?”

“그야 내가 가지고 있던 게….”

금명결은 당연한 사실을 한 번 더 읊으려 했다.

망가진 역신의 귀걸이를 대체할 만한 게 그것밖에 없다는 이야기를.

그러나 말을 끝내기도 전에 한차수가 말허리를 싹둑 잘랐다.

“그러니까, 제가 가지고 있는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가 길드장님이 원하는 ‘저주받은 공명의 귀걸이’가 맞는지 어떻게 확신하시냐는 말입니다.”

“…어?”

금명결은 이제 멍한 걸 떠나 멍청해 보이기까지 했다. 한편, 정이흔은 나지막한 탄식을 내뱉었다.

‘이쪽은 그래도 머리가 돌아가나 보군.’

반짝거리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정이흔을 뒤로하고, 한차수가 설명을 시작했다.

“금명결 길드장님. 잘 들어 보십시오.”

“응응, 말해.”

금명결은 숫제 구연동화를 들으러 온 어린아이 같았다.

자리에 앉아 두 손을 무릎 위에 붙이고 귀를 쫑긋하고 있다는 소리였다.

“길드장님도 서리거인 던전에서 귀걸이가 나온다는 건 알고 계셨지만 거기에 귀속이 붙을 줄은 모르시지 않았습니까.”

“어…. 그렇지, 그런데 그게 뭐?”

한차수가 한숨과 함께 머리를 쓸어 올렸다. 아직도 못 알아차렸냐.

그가 짓씹듯 단어를 하나하나 내뱉었다.

“던전에서 드롭되는 아이템은 히든 아이템이라 하더라도 능력치가 랜덤으로 정해집니다.”

“아.”

“귀걸이에 귀속 속성이 붙을지 몰랐던 것과 동일하게, 제가 가진 귀걸이의 능력치가 길드장님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크게 벌려지는 입만큼 금빛 눈동자가 휘둥그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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