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화
한차수는 말이 되는 소리를 하라며 엑실리스 길드원들을 쫓아냈다.
하지만 임시방편일 뿐이었다. 그 후로도 그들은 지치지도 않고 나흘 내내 찾아왔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인 점이 하나 있다면.
“오늘은 또 뭡니까.”
“저번에는 죄송했습니다!”
다음번 방문에서 아파트 키 대신 현관 보수 비용을 들고 나타났다는 점이었다.
그 뒤로는 물에 술 타듯 자연스럽게 방문이 이어졌다. 특히나 이지훈은 보수 공사가 잘 되고 있는지 확인한다는 명목으로 매일같이 찾아왔다.
이제는 쫓아내는 것도 귀찮아 대충 인사하자 그가 여느 때처럼 싹싹하게 웃었다.
“요새 기력이 통 없으시던데.”
그게 다 너 때문이라는 말 대신 한차수는 봉투를 받아 들었다.
“걱정된다고 말씀드렸더니 길드장님께서 이걸 꼭 보내 드리라고 하셔서요.”
봉투를 열자 실한 닭 한 마리가 뽀얀 국물 속에 다리를 꼰 채 누워 있는 게 보였다.
백숙이었다.
“…….”
하는 짓이 점점 정이흔과 겹쳐 보이는데, 내 착각인가?
그래도 먹는 걸 거절하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돌려보낸다 한들 버리겠다고 할 게 뻔했으니까.
신차도 그런 식으로 주차장에 버리고 간 놈들이다.
백숙마저 그런 신세가 되게 할 수는 없었다. 한차수는 기꺼이 봉투를 건네받았다.
“그런데 언제까지 이러실 겁니까?”
“예?”
“그냥 직접 오시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사죄랍시고 번번이 찾아오는 것도 귀찮게 느껴졌다. 그때마다 뭘 들고 오는 것도 신경 쓰였고.
목적이야 뻔하니 차라리 날을 잡아서 이야기를 하는 게 더 빠르고 효율적이지 않을까.
‘다른 사람이랑 귀걸이 나눠 낄 생각 없다고 확실히 다짐이라도 해 두고 싶은데.’
막상 다짐을 들어야 할 장본인이 코빼기도 안 보이니, 원.
원작 주인공들이 직접 찾아오지 않는 건 여러모로 심신에 좋았으나 계속 이런 식이면 좀 곤란했다.
“선물은 됐고 한 번 뵈었으면 좋겠습니다.”
묵직한 쇼핑백을 들어 올리며 말하자 이지훈이 곤란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아시겠지만 불규칙 게이트 건으로 많이 바쁘셔서요. 그래도 한차수 씨의 말씀은 빠짐없이 전해 드리고 있습니다.”
그래, 생각해 보면 다짜고짜 귀걸이 내놓으라며 문을 부수지 않는 게 어디인가.
차 문짝이 뜯어졌을 때를 생각하면 참 장족의 발전이다.
‘정이흔도 내버려 두랬으니 신경 끄자.’
제발 차를 받아 달라며 현관 바닥을 부숴 놓고 간 날. 그렇지 않아도 정이흔에게 연락을 했었다.
천령 길드 측에서 차를 가져갔으면 한다고 말했더니 돌아오는 답이 가관이었다.
-그냥 가져요.
“예?”
-금명결은 그나마 눈치 볼 때가 가장 말이 통하는 상태입니다. 내버려 두세요. 한차수 씨에게 나쁠 건 없을 겁니다.
누가 호구 아니랄까 봐. 정이흔은 철석같이 금명결이 속죄 중이라 믿었다.
지난번 불규칙 게이트와 관련한 모든 사후 처리까지 전담하고 있었으니 그리 믿는 것도 이해는 갔다.
정부 관계자가 자신을 불러내지 않는데도 그의 영향이 끼쳤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는 제법 도움이 된단 말이야.’
그 외에도 정이흔은 안심이 될 만한 말을 하나 남겼다.
-아, 그리고. 지난번 물약에서 나온 벌레는 고독이 아니라 다른 걸로 판명됐습니다.
“예?”
-하지만 누군가 손을 쓴 건 분명하니 그에 관해서는 자체적으로 조사 중입니다. 한차수 씨는 걱정 말고 정양하세요.
말하지 않아도 푹 쉴 생각이었다.
“냄새는 좋네. 어디서 사 온 거지?”
그래도 이제 제집이라고, 한차수는 익숙하게 백숙을 옮겨 담고 불을 올렸다.
곧 국물이 끓으며 맛있는 냄새가 집 안 가득 퍼졌다. 허기를 자극하는 냄새였다.
한차수는 입맛을 다신 뒤 불을 제일 약하게 맞춰 놓고 실험실로 들어갔다.
커다란 책상 위에는 별의별 약품들이 정신 사납게 놓여 있었다.
용도 별로 정리하던 도중에 엑실리스에서 갑작스레 방문한 탓이었다.
“어디까지 했더라. 으음, 마취제까지 했었나.”
라벨을 보며 하나하나 정리하는 손길이 세심했다.
갑자기 실험실을 정리할 생각이 든 건 다름이 아니라 불규칙 게이트 때문이었다.
원작의 한차수가 해를 끼친 인물을 피해도 갑자기 생기는 게이트는 피할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고 해야 할까.
‘미리 대비해 놓을 수 있는 건 다 해 놔야겠어.’
그래서 일단 집에 있는 약품을 용도 별로 파악해 상비하고 있기로 했다.
암살 계열은 A급이라 하더라도 다른 직접 전투 계열에 비하면 좀 뒤처지는 경향이 있으니까.
그걸 보조하는 의미였다.
“그럼 정리는 이만하면 됐고.”
배를 좀 채운 뒤에 아이템 거래소에 가야겠다.
한차수는 발걸음도 가볍게 자신을 기다리는 백숙을 향해 뛰었다.
***
한차수를 태운 택시는 여의도 중심부에서 멈췄다.
“수고하세요.”
차에서 내린 한차수는 익숙하게 주변을 훑었다.
휘황찬란한 건물을 사이로 깔끔한 현판이 보였다.
[한국 아이템 거래 협회]
국가인증을 받은 아이템 거래소 중에서도 제일로 치는 곳이었다.
‘지난번에는 잡템이 필요했던 거라 여기가 아니라 다른 데 들렀었지.’
한국 아이템 거래 협회, 줄여서 ‘한아협’은 콧대 높은 기관이었다.
다른 거래소와 달리 자잘한 아이템은 취급하지 않는 걸로 유명하달까.
그들의 취급 대상은 굳이 따지자면 입수 난이도 3급 이상.
그중에서도 무기나 헌터의 능력치를 보조하는 아이템들을 주로 선호한다.
즉, 애매한 잡템은 작은 중소형 아이템 거래소에나 갖다 팔라는 이야기였다.
‘뭘 모르는 사람들이야. 잡템들이 얼마나 쓸모가 많은데.’
자신만 해도 낙서장 아이템 덕에 일기의 족쇄에서 벗어나지 않았는가.
한차수는 묵직한 유리문을 밀고 들어가며 인벤토리에 있는 노트를 떠올렸다.
확실하게 없애 버린 원본 일기장 대신 그건 영원히 안전하게 제 인벤 안에 있을 예정이었다.
‘역시 잡템이라고 무시하면 안 된다니까.’
가면만 해도 그렇다. 불규칙 게이트를 빠져나온 급박한 상황에서 자신을 도와주지 않았는가.
새삼 과소평가 된 잡템들의 가치를 생각하며 안내문을 살폈다.
1, 2층은 관리사무소나 직원사무실. 실질적인 아이템 거래는 3~12층에서 이루어지는 것 같았다.
‘입수 난이도 3급의 장비 아이템은 4층이겠군.’
한차수는 가볍게 발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몸 주인이 악역 주제에 착실히 저축을 했다는 점에 깊이 감사했다.
“벨트와 팔찌, 그리고 신발까지 총 1억 3천만 원입니다.”
전부 A급 아이템이라 그런가 살벌하기 짝이 없는 가격이었다.
하지만 이 정도 지출은 감당할 수 있었다.
천령 길드는 월급에 있어서 상당히 후한 직장이었으니까.
거기다 더해 진짜 한차수는 틈틈이 회사 물품을 빼돌려 블랙마켓에 팔기까지 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일시불로 결제하겠습니다.”
지갑이 몹시 빵빵하다는 뜻이다.
‘악역에 빙의한 유일한 장점이군.’
한차수는 호기롭게 카드를 건네며 미소 지었다.
***
그러나 악역의 풍족한 지갑으로도 해결 불가능한 일이 있었으니.
“…75억이요?”
“예. 문의하신 ‘만능 탈출석’의 가격은 현재 75억입니다.”
바로 불규칙 게이트를 클리어하지 않고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아이템, 만능 탈출석이었다.
“75억….”
기가 막혀 저도 모르게 읊조리자 안내 직원이 방긋 미소 지었다.
“경매에 참가하시겠습니까?”
“…….”
한차수는 입을 꾹 다물었다. 혹시나 해서 살 수 있을까 들러 본 거였는데. 7억도 아니고 75억이라니.
심지어 확정 가격이 아니라 현재가이지 않은가.
‘경매의 세상은 무섭군.’
하긴 20년 만에 드롭되었다는 만능 탈출석이다. 한차수는 아쉬운 얼굴로 발길을 돌렸다.
‘구하기 힘든 건 알았지만 이 정도라니….’
원작의 정이흔은 그래도 잘만 구하던데. 그게 다 주인공 보정이 들어갔던 거란 말인가.
결국 한차수는 만능 탈출석을 포기해야만 했다.
아무리 원작 한차수가 양심 없는 악당이어도 그 정도 돈을 모아 놓지는 않았으니까.
‘아쉽기는 하지만 어쩔 수 없지. 살면서 불규칙 게이트에 휘말릴 일이 또 있을 리도 없고.’
그렇게 씁쓸함을 달래며 7층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던 순간이었다.
“한차수 씨.”
묵직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뒤에서 훅하고 손을 뻗어 왔다.
“여기서 뭐 해요?”
살짝 능글거리는 음성은 어딘가 낯이 익었다.
“하아…. 금명결 길드장님.”
한차수는 나지막한 한숨과 함께 천천히 몸을 돌렸다.
덜컹거리는 심장을 겨우 진정시킨 뒤였다.
하마터면 저 녀석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찍어 버릴 뻔했으니까.
“그건 제가 드릴 말씀입니다. 여기서 뭐 하고 계신 겁니까?”
바쁘다는 인간이 왜 갑자기 여기서 튀어나오는 건가.
한숨 섞인 대꾸에도 불구하고 금명결은 싱글거리는 낯짝이었다.
“글쎄요, 뭐 하러 왔을까. 한차수 씨랑 같이 엘리베이터 타러 왔나?”
그러고 보니 어느새 금명결의 손이 제 손 위에 겹쳐져 있었다.
의식하기가 무섭게 금명결이 손에 힘을 주었다.
그리고 붉게 불이 들어와 있던 버튼을 다시 한번 눌러 취소하는 게 아닌가.
‘정말 뭐 하자는 건지 모르겠군.’
“금명결 길드장님, 혹시.”
“한차수 씨.”
선물에 답례를 안 해서 이러나 싶어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말문이 잘렸다.
“예, 말씀하십시오.”
그래. 왜 이러는지 이유나 듣자.
한차수가 차분히 답하자 금명결이 궁금해 미치겠다는 얼굴로 물었다.
“내가 그렇게 별로였습니까?”
“…예?”
“그동안 잘 보이려고 꽤 노력한 것 같은데.”
혼란스러워하는 한차수를 내려다보며 금명결은 들으란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그의 팔을 잡아끌더니 방금 지나온 복도에 걸린 명패를 가리켰다.
[커플 아이템 매칭 전문 거래소]
“…아.”
이 자식, 내가 다른 사람이랑 커플 귀걸이를 할 줄 알고 튀어온 거구나.
썩 기쁘지 않은 깨달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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